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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피비린내 나는 이란 개입 역사

미국이 이란 최고사령관 솔레이마니를 살해하자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 두 곳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또다시 중동에서 전쟁을 벌이려 한다. 서방 지배자들은 수십 년 동안 이란을 옥죄고, 쿠데타를 사주하고, 전쟁을 부추겨 왔다. 그 역사를 닉 클라크가 살펴 본다.

서방 정치인들은 이란을 위협하면서 마치 자신이 이란에 “민주주의”를 선사할 지사인 양 행세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서방의 개입은 이란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자르는 데 기여해 왔다.

쿠데타 사주에서 경제 제재에 이르는 미국의 행태를 보면 이란인들이 미국을 증오할 만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이 이란의 석유 산업과 금융에 부과한 경제 제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과 가난에 시달렸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이란 제재를 부활시키기로 하면서 중동에서 새로운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돼 왔다.

이란의 보통사람들이 최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저항을 촉발하기도 한다. 2017년 12월 소규모로 시작된 시위가 이란 사회에 널리 퍼진 불만과 만나며 확산했고 일부 노동자들이 가세한 일이 있었다. 2009년에는 선거 결과에 항의하는 시위(“녹색운동”)가 이란 전역에서 벌어졌다.

지난 70년의 이란 역사를 보면, 서방 정치인들이 자기 이익을 지키려고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오랫동안 이란의 천연 자원에 군침을 흘려 왔다. 그래서 1953년 이들의 정보 기관은 이란에서 선거로 집권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쿠데타를 사주했다.

[그 이전인] 20세기 전반부에 영국은 이란 석유 산업을 장악하고 석유를 마구 퍼갔다. 오늘날의 [세계적 석유 기업인] BP가 그렇게 탄생했다.

영국 국가가 51퍼센트 지분을 갖고 있던 앵글로-이란석유회사(AIOC)는 어찌나 막강했던지 사실상 이란을 좌지우지했다. 당시 이란의 ‘샤’[이란어로 ‘왕’이라는 뜻]와 그의 정부는 석유회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석유회사는 자체 병력을 보유하고서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다른 부문에서의 저항은 국가의 억압기구가 탄압했다.

이란 지배자 레자 샤는 노동조합과 정치적 반대파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마구 짓밟았다.

그러나 중동 전역에서 영국 제국과 식민 통치에 맞서는 저항은 성난 파도처럼 일었다.

1951년 이란에서 샤는 그 압력에 밀려 세속적 민족주의자 모사데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모사데그가 이끈 민족전선은 의회에서 다수당이 됐다.

모사데그가 이끈 민족주의 운동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대변한 진보적 운동이었다. 이들은 중동의 다른 민족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에 도전했다.

모사데그는 무상으로 앵글로-이란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이는 영국 제국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었고,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이란의 주요 항만 도시이자 대규모 정유소가 있는] 아바단에서 정유 공장을 되찾겠다며 이란 침공을 검토했다. 당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이에 반대했다. 그의 정부는 이미 말레이시아의 식민 통치 반대 투쟁을 분쇄하는 데, 이집트에서 영국의 이익을 지키는 데, 한국에서 미국이 벌이는 전쟁을 지원하는 데 영국군을 보낸 상태였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미국이 영국의 이란 침공을 반대했다. 애틀리는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미국과 행보를 달리할 여력이 없다”고 시인했다.

미국에게 영국의 석유 이익을 지키는 것은 큰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은 중동을 주름잡은 영국의 지위를 자신이 대체하길 바랐다. 그러나 미국도 모사데그는 우려했다. 모사데그는 둑에 구멍을 낸 것과 같은 구실을 했다.

모사데그가 정부를 구성한 [1951~1953년] 2년 동안 평범한 이란인들은 더 많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미국은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이 성장해서 모사데그를 대신할까 봐 걱정했다. 투데당은 파업과 거리 투쟁, 시위를 조직했다.

쿠데타 시도

2013년과 2017년에 미국 중앙정보부 CIA는 모사데그를 내쫓는 데서 자신들이 한 구실을 기록한 문건의 비밀을 해제하고 공개했다.

이를 보면 CIA는 당시 투데당의 지지가 커져서 이란이 스탈린주의 소련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잔뜩 겁먹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IA는 심지어 모사데그 지지자들을 모아서 투데당에 맞서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그러나 1953년 4월 미국은 모사데그를 내쫓기로 결정한다. CIA와 영국 정보기관인 MI6는 모사데그를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지도한다.

1954년 CIA 요원 도널드 윌버는 쿠데타를 위한 비밀 작전 계획(‘아약스’)을 어떻게 수립했고 수행했는지를 기록한 비밀 소책자를 썼다. 이를 보면, CIA가 모사데그의 주요 정적인 파즈롤라 자헤디에 접근해 그를 총리로 대신 앉히려 한 계획이 나온다.

CIA는 언론을 이용해 모사데그를 비방하고 자헤디를 치켜세우는 선전 활동을 벌였다.

1차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다. 자헤디는 CIA가 제공한 은신처로 숨어야 했고 샤는 이라크로 도망쳤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 벌어진 혼란 와중에 CIA 요원들은 언론을 통해 모사데그 반대 선동을 하는 데 전력했다.

며칠 후 샤 지지자들이 거리로 나섰고 또다시 쿠데타가 벌어졌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모사데그는 체포됐고 이후 남은 생애를 감옥과 이후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법정에서 모사데그는 결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유일한 죄는 이란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이 땅에서 식민주의 조직을 제거하고, 지구상 최대 제국[영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없앤 것이다.”

쿠데타 직후 CIA는 자헤디 정부가 유지되도록 수백만 달러를 은밀히 지원했다.

미국의 대대적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은 샤는 새로운 군사 독재를 실시했다. 이제 이란에는 미군 2만 4000명이 주둔하게 됐고, 수도 테헤란에는 CIA 중동 본부가 들어섰다.

CIA는 이란에서 새로 창설된 보안경찰 사바크를 훈련시켰다. 사바크는 무수한 이란인을 살해하고 고문했다.

미국 기업들은 부흥하던 이란 석유 산업을 나눠 가졌다. 수많은 평범한 이란인들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렸다.

이른바 “근대화” 계획은 이란에서 성장하던 노동계급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을 기초로 이뤄졌다.

이란 혁명

불만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1977년 경제가 추락하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대중 시위에 나섰고 이내 이란 전체를 뒤흔든 혁명으로 발전했다.

대규모 파업 물결이 일었고 게릴라 전투가 벌어졌다. ‘쇼랴’라고 불린 파업 위원회가 공장을 장악하고서 가동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시위뿐 아니라 시 낭송회 같은 집회에도 수만 명이 몰렸고 나중에는 100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실로 강렬한 민주주의 각성 과정이었다. 늘 그렇듯, 미국은 이를 꺾으려 했다.

모사데그를 내쫓았던 바로 그 샤는 1979년, 평범한 이란인들의 손에 쫓겨났다. 미국은 그가 도피할 곳을 제공하고 이란에 제재를 가했다.

혁명은 복잡한 과정이다. 샤가 몰락한 이후 이슬람 성직자들이 이끄는 중간계급 세력이 지도력을 잡았다.

성직자 루홀라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새로운 억압적 정부가 탄생했다.

호메이니는 좌파와 노동자 조직을 탄압했지만 미국에 맞섰기 때문에 지지를 받았다.

1979년 11월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그 직원들을 1년 넘도록 인질로 잡아 뒀다.

그 학생들이 내건 요구를 보면 미국이 지원한 억압적 [샤] 정권 하에서 이란인들이 느낀 분노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샤를 재판에 세울 수 있도록 이란으로 돌려 보낼 것, 미국이 가하는 제재를 해제할 것, 모사데그 제거 쿠데타에 대해 미국이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오늘날까지도 이란 정권과 대치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광 대통령 트럼프나 그의 서방 지지자들이 제시하는 명분은 진정한 이유가 아니다. 중동에서 강력한 무기와 군대를 보유한 전쟁광 독재자들 중에는 서방의 최측근 동맹도 여럿 있다.

진정한 문제는 이란이 [1979년] 혁명 이래로 미국 제국주의와 화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이란 혁명 이듬해에 이란을 침공했을 때 이라크를 지원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간 지속됐고, 이란인 3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이란 석유 시설을 공격했고 파괴했다. 1988년에는 심지어 이란 민항기를 격추해서 29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국이 수년째 이란에 가하는 제재는 평범한 이란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줬다. 중병에 걸렸을 때 필요한 의약품도 심각하게 부족하다.

미국은 이란 정부에 맞서 벌어지는 반란과 시위를 지지하지만, 진정으로 저항을 응원해서가 아니다. 2018년 초 시위가 벌어졌을 때도 그랬다. 2015년 핵 협정은 미국이 이란에 대한 적대 정책을 그나마 누그러뜨린 것이었다. 미국이 제재를 해제하는 대가로 이란이 핵 개발 제한을 받아들이는 내용이었다.

핵 협정 이후에도 미국의 이란 위협 정책은 계속됐다. 이제 도널드 트럼프는 제재를 부활시키고,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전쟁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있다.

미국은 1953년에도 그랬듯 이란에서 정권 교체를 바라고 있을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이란에서 벌어진 시위는 평범한 이란인들이 느끼는 분노를 보여 준다. 바로 그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진정한 변화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 기사는 2018년 5월에 실린 것을 현재에 맞게 시점 등을 고쳐 재게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