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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흔, 그래도 풀잎은 자란다
오키나와 역사 탐방을 다녀와서…

나는 ‘종전(終戰)국’이 아닌, ‘휴전(休戰)국’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전쟁의 휴식기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종종 쉽게 잊는다. 그래서 ‘전쟁(戰爭)’을 현재형이 아닌 지나간 과거형의 역사, 실제가 아닌 추상 속에서 부정적 개념으로만 단지 생각해왔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나와는 먼 곳의 얘기로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동두천, 용산 등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거리에 미군기지가 여럿 남아 이곳의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전쟁을 지나간, 나와는 먼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아픔을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서 나는 좀 더 이것들과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쟁’의 의미가 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다가왔다.

지난 1월, 미국의 이란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반대하는 평화행동집회에 참여했다. 전쟁이라는 폭력 행위에 반대하는 집회는 누구나 찬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집회는 수많은 반대의 목소리에 둘러싸였다. 평화를 요구하는 것에 왜 이토록 많은 반대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에 맞서 어떻게 전쟁의 폭력을 설득하고, 투쟁해 나갈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러던 중 오키나와에 연수를 다녀오게 되었다. 일본 본토와는 다른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현재도 미군기지 반대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이곳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과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이하 민의련) 회원들이 함께 공부하고 탐방했다. 그러면서 전쟁을 바라보던 나의 시각을 좀 더 넓히고, 앞으로 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도 키워보았다.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곳

식민의 역사를 배워 온 나에게, 일본은 ‘침략국’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더욱이 최근 아베 정부의 과거사 부정이나 경제 보복과 관련해 이런 이미지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렇게 뭉뚱그려진 이미지와 감정의 화살은 나의 시각을 협소하게 만들어 왔다. 오키나와현의 평화기념자료관과 가마(전시의 피난 동굴)에서 오키나와전의 흔적들을 돌아보며,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한국 역사에만 있다고 생각했던 전쟁의 아픔이 이곳에도 똑같이 있었다. 수많은 폭력의 증거들이 탄흔으로, 잔인한 사진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묻은 이의 증언으로, 그리고 위령비로 남아 있다. 우리가 진짜 싸워야 하는 것은 선 반대편에서 우리와 같이 피 흘렸던 이 사람들이 아니다.

조금 더 넓게 보면, 전쟁의 피해자인 이곳이 동시에 침략국인 일본에 속하기도 하는 것처럼 한국의 국민들도 식민의 역사와 함께 베트남 참전에서의 잔인했던 역사를 같이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분들의 피해를 기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적 부흥만 기록할 것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일부 한국군이 베트남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을 알고, 기억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으로 시작된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갖는다. 일본 본토로부터 계속 차별받아 왔고, 오키나와전에서는 본토 결전을 모면하기 위한 희생지였다. 이후 1972년 일본에 반환되기 전까지 미국의 점령하에 놓여 미군기지가 밀집되는 등 구조적 차별을 받고 있다. 이렇게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이곳의 역사를 배우고, 그 유적에서 지난 아픔을 떠올려보며, 전쟁의 가해자라고만 생각했던 일본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이를 통해 전쟁의 피해자가 누구인지 바로 보아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희생된 많은 분께 묵념하며,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겼다.

군사기지의 섬

“휘우웅~” 도심에서 듣기 힘든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차를 타고 있었는데도 소리가 주는 위협감에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커다란 전투기였다. 이후로도 종종 전투기는 엄청난 소리와 위압감으로 오키나와의 마을 상공을 다니며, 이곳이 전쟁터임을 계속 상기시켰다. 실제로 오스프리(미 해군 수직 이착륙수송기)를 비롯한 헬기 등의 추락, 낙하 등의 사고도 있어왔다. 헬기 사고가 있었던 오키나와 국제대학을 직접 가보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지척인 교정에 까맣게 타버린 나무만이 헬기 추락의 아찔한 흔적을 전하고 있었다.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이런 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살아가는 현 주민들의 불편함과 불안함이 그려져 마음이 아팠다.

오키나와 전쟁과 미국의 지배역사는 다만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일본 국토 0.6퍼센트에 불과한 작은 섬에, 주일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밀집해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생각보다 엄청나다. 기지는 전략적 위치만을 고려해 세워지므로 기존에 있던 촌락을 모두 밀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환경도 파괴한다. 미군에 의한 범죄도 심각하다. 반환 이후 미군에 의한 범죄는 약 6천여 건에 달하고, 이 중 6세 여아 폭행 살인 사건, 미군 병사 집단 성폭행 등 흉악범죄만도 5백여 건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전쟁은 기지라는 모습으로 아직도 오키나와의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왜 이런 아름다운 섬에 이토록 많은 기지가 세워진 것일까? 역사적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은 실제로 방위를 명목으로 오키나와를 베트남 전쟁과 한국전쟁의 기지로, 이후 중국과 대립하는 최전선의 주둔지로 활용해 왔다.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보면, 동아시아에서 오키나와가 갖는 국제적인 위치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더욱이, 미군기지가 이렇게 많이 주둔하고 계속 훈련하는 모습은 미국이 오키나와를 전쟁적 요충지로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결국 전쟁은 과거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가장 유리한 곳을 찾아 다음을 준비 중이다.

기지에 반대하는 움직임들

오키나와에 있었던 기지 반대 움직임을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1950년대 기지건설을 위한 토지 수탈에 들고 일어난 ‘시마구루미’투쟁(섬 전체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민중이 자력으로 근원적 권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지만, 결국 경제적 조건 투쟁으로 남아 미국의 분권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민중운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민중들은 다음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바로 70년대의 오키나와 반환 운동이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고도 안보를 핑계로 많은 미군기지가 남았지만, 그럼에도 반전지주운동, ‘올오키나(All-okinawa)와 공동 투쟁파’의 창립과 활동, 전국민적 현민대회 등 다양한 형태의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평화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 추구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헤노코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연좌농성장을 방문했다. 하루에 세 번, 건설 현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에서 40여 명의 주민들이 농성을 통해 공사를 지연시키고 현황을 감시하고 있다. 농성장에 계신 분들의 얘기를 들었다. 미군기지, 나아가 전쟁에 반대하고 인권 보장을 외치는 이유가 분명했다. 자식들이 살아갈 마을, 산, 바다를 지키려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받지 않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게 당연한 요구를 하면서도 끝내 짐짝처럼 농성장 밖으로 들려 나가는 분들을 보며, 나는 답답하고 화가 나서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이천 일 넘게 꾸준히 투쟁해 온 분들의 의연한 모습을 보고,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끈기 있게 투쟁하는 것이 이분들의 저력임을 알게 됐다. 쉽게 무력해지지도 조급해하지도 말자. 한 걸음씩 오래 내디뎌 가는 것, 그게 투쟁의 가장 큰 힘일지 모른다.

헤노코기지 반대 현장에서 특별히 기억에 더 남는 것은 농성자 분들의 나이다.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인 분들이 나와 시위를 하고 계셨다. 그중에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분도 있었다. 놀라웠다. 나는 이제껏 노인의학을 연구하려는 의사로서, 노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소통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쟁에서는 이들을 배제된 존재로만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차별받고 소외된 노인집단과도 우리는 연대하고 같이 투쟁해 나갈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 노인 중에는 역사적 불안함으로 미국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진 분들도 많고, 나고 자란 지역사회를 떠나며 공동체적 힘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을 설득하고 소통하며, 같이 싸워나갈 때, 우리는 더 큰 연대체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역사 탐방을 마치며

“수색 군인에게 발각 될까 봐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는 어느 아버지의 참담한 모습,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에 나뒹구는 누군가의 잃어버린 팔, 폭격이 지나간 자리에 혼자가 되어 버린 어린아이의 비어 버린 표정……!”

역사적으로 일어난 모든 전쟁을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현재 많은 곳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생명을 향한 가장 잔인한 폭력. 그리고 이런 전쟁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적이 누구인지 바로 보아야 한다. 전쟁은 각 국가의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와 오키나와의 역사를 조금만 더 크게 놓고 바라봐도 이 전쟁의 핵심에는, 자본주의 경쟁 속에서 폭력을 불사하고도 이익을 취하려 했던 제국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대항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다.

그러면 그 커다란 힘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까? 너무 뻔하고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에 대한 답은 연대의 힘인 것 같다. 아주 넓고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다. 이번 오키나와 탐방을 통해 평화와 반전을 외치는 일본 민의련의 젊은 회원들과 교류하면서, 그리고 헤노코 기지에 반대하는 노인 농성자 분들을 보면서 새로운 연대의 고리점들을 발견했다. 내가 그동안 적대시하거나 혹은 약자라고 생각해서 함께 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도 함께 연대해 나갈 수 있는 이웃이었다. 결국 막막했던 투쟁에서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더 많은 연대를 위한 더 많은 소통, 그리고 소통하려는 열린 마음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오키나와에 들어서자 참 따뜻했다.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안 믿어질 만큼 바다는 푸르렀고, 하늘은 청명했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참 아름답다. 그런데 이런 세상 곳곳에는 저마다 쉴 새 없는 싸움이 이어진다. 가난과의 싸움, 권력과의 싸움, 질병과의 싸움… 그리고 또 다른 폭력과의 싸움. 나는 이 모든 싸움이 전부 제각각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보고 같이 대응해 나갈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눈을 뜨고 귀를 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전쟁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그리고 가장 현명하게 싸워야 한다. 저 푸른 풀잎이 뿌리내리기 위해…

카카즈 타카다이 전망대를 올라가는 길 담벼락 탄흔에 풀잎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