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이슬람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이슬람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미국 참사 이후 서방 지배자들과 기성 언론들은 오사마 빈 라덴이나 탈레반 또는 지하드 등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고 있다. 서방 지배자들의 눈에 비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무자비한 테러를 일삼는 무장 테러 집단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은 중동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기도 한다. 이 운동은 중동의 부패하고 제국주의에 타협적인 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특정 상황에서는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레바논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헤즈볼라, 이집트의 지하드 등이 대표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란 혁명의 성과물을 가로챈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1980년에 정권을 장악하면서 유명해졌다. 지금 미국이 공격 목표로 삼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도 대표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다.

‘근본주의’, ‘이슬람주의’ 또는 ‘이슬람 행동주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는 20세기에 중동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운동으로서 쁘띠부르주아 지도부가 국가를 장악해 이슬람 개혁 강령을 실행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쁘띠부르주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이래로 서방 제국주의 열강은 원료를 약탈하기 위해 중동을 침략했다. 그 결과 중동의 전통적인 경제 구조는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자본주의적 방식이 도입됐다.

중동 지역 왕조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부패하고 무능해 반제국주의, 사회 개혁, 강력한 국가 건설 등의 과제를 수행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기성 지배자들의 모습을 비판하면서 행정 관료와 지식인 등의 쁘띠부르주아지는 민족주의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운동을 추구했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종종 ‘진정한 이슬람 도덕의 회복’이라는 외피를 썼다. 알 아프가니는 세속적 개혁 사상과 전통적 이슬람 사상을 결합해 이슬람 근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는 제국주의 지배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서방의 제도를 도입함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독립적인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한편, 이집트의 와프드당(독립당)이나 이란의 레자 한처럼 제국주의에 도전해 민족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신생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등장했다. 그러자 종교와 세속의 결합을 주장하는 근본주의 운동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권한 와프드당이 억압당하는 대중의 바람을 제대로 대변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하자 이슬람 근본주의가 다시 부상했다. 1929년에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최초의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이 탄생했다.

이 조직의 창설자인 알 바나는 꾸란(코란)과 움마(이슬람 공동체)에 바탕을 둔 이슬람 원칙들을 대중적 정치 활동을 통해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이 조직의 이데올로기는 전형적으로 쁘띠부르주아적이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서방의 경제 지배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서방에 협력하는 이집트 지배 계급에도 반대했다. 이 조직은 자본주의의 과도한 측면들이나 서방의 물질 문명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계급 투쟁 사상에도 반대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와 꾸란 그리고 무함마드(마호멧)의 어록인 하디스에 기초를 둔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가들은 국가 관료, 교사, 장교 등 중간 계급과 학생에서 배출됐다. 하지만 지배 계급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대안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쁘띠부르주아적 기반을 벗어나 노동자 계급의 일부와 농민 그리고 빈민들에게 종교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아랍 민족주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중동 지역은 격변에 휩싸였다. 석유를 장악하려는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아랍 민족주의도 강력하게 부상했다. 1952년에 이집트에서는 낫세르와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아랍 민족주의는 계급적 기반, 개량주의적 목적, 서방에 대한 반대와 이슬람 근대화 등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비슷했지만, 이슬람이 중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쁘띠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반대 운동을 얼마나 잘 이끌고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또 다른 요소는 노동자 운동이었다. 중동 지역에서 노동자 운동은 철저하게 소련의 대외 정책에 종속돼 있었다. 소련이 낫세르를 파시스트 군사 독재라고 비난하다가 나중에 이집트와 동맹을 맺자 소련을 추종했던 공산당들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좌파의 공백은 근본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68년 투쟁은 중동 지역에서도 거대한 파업과 공장 점거 그리고 거리 시위와 전투를 낳았지만 이 투쟁들을 이끌 조직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1970년 이집트에서 낫세르가 죽고 나서 등장한 사다트의 서방화와 개방화 추진은 아랍 민족주의의 실패를 뜻했다.

이란의 팔레비나 이집트의 사다트 등 중동의 부패한 지배자들이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제휴하자 이슬람 근본주의는 세력을 확대할 기회를 갖게 됐다.

1979년의 이란 혁명과 호메이니의 집권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다시 부상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979년 노동자와 학생 등은 팔레비 정권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제국주의의 주구 노릇을 하는 것에 반대해 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혁명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 성과물을 가로챈 자가 바로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호메이니였다. 근본주의가 등장한 지 50년 만에 최초의 근본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심장 없는 세계의 심장

이슬람 근본주의는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의 산물로,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이 운동은 제국주의와 이들에 협조적이던 중동 지역의 지배 집단들 때문에 자신의 야망이 좌절된 쁘띠부르주아지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운동은 민족주의 세력의 무능, 노동자 운동의 침체 속에서 도시 빈민들을 지지자로 끌어들이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은 협소한 쁘띠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체제의 개혁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한도 내에서만 변화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을 위해 국가를 장악하려 한다. (그렇다고 봉기나 테러 등의 방식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현재 중동 지역에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부상할 만한 환경이 조성돼 있다. 석유 지배를 위한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 강화,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 계급, 미국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원, 중동 지배자들의 모호한 태도, 경제 침체 등.

이슬람 근본주의는 세속적 대안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때 번성한다. 부르주아 민족주의나 경쟁 세력인 쁘띠부르주아적 대안이 위기에 빠져 있고 노동자 계급 행동이 침체해 좌파 조직이 미약할 때 번성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슬람 근본주의는 대중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여 이슬람 전통을 발전시킬 수 있다. 중동에서 이슬람 근본주의는 심장 없는 세계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의 억압적이고 여성차별적이며 엘리트주의적 모습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는 억압당하거나 착취당하는 대중의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사회 세력들의 사회적·경제적 열망을 함께 볼 때 이슬람 근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을 무조건적으로 그렇지만 비판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