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마일스는 영국 대학노조(UCU) 전국집행위원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오랜 활동가,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책갈피)의 저자다.(하단 사진) 이 글은 2019년 1월에 발표됐다.


2018년 11월 20일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에는 그해 세계 곳곳에서 살해당한 트랜스젠더 369명을 추도했다. 2017년에는 325명이 살해당했는데, 이 수치도 그 전 해보다 증가한 것이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훨씬 더 많은 수의 트랜스젠더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지난해[2018년] 초 트랜스 여성인 나오미 허시가 런던에서 칼에 찔려 숨졌는데, 2014년 이래 영국에서 처음 벌어진 트랜스젠더 살해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대부분 트랜스 여성이지만 일부는 트랜스 남성이거나 논바이너리*다. 대부분 나오미처럼 흑인이거나 소수 인종이며, 가난하다. 피해자 중 60퍼센트가량이 성매매에 종사하는데, 이는 많은 트랜스젠더가 사회에서 주변화돼 있고 빈곤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소수자 혐오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트랜스젠더와 그 밖의 성소수자(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등) 권리에 대해 정치적 공격이 증가하는 것을 반영한다. 언어와 미디어를 통한 공격은 물리적 공격을 조장한다. 브라질에서는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그를 지지하며 행동하는 극우 폭력배들에게 한 트랜스 여성이 살해당했고 다른 한 명은 심하게 구타당했다. 성소수자, 여성, 흑인, 좌파에게 보우소나루가 집권한 브라질은 살 떨리는 곳이다.

많은 나라에서 트랜스젠더 혐오(이하 트랜스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우파, 극우파와 함께 성장해 왔다. 푸틴의 러시아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이제 정신질환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 헝가리에서 파시스트들은 자긍심 행진을 공격하고, 빅토르 오르반의 극우 정부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전통적 가치를 훼손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음모라는 이유로 성별 연구를 금지했다. 터키에서는 트랜스젠더 자긍심 행진이 금지됐고 경찰과 폭력배들의 공격을 받는다. 2016년에는 터키의 저명한 트랜스젠더 활동가 한데 카데르가 살해당했다.

도널트 트럼프는 집권 초기에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금지했고, 이후 일터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연방정부의 보호조치를 없앴다. 그가 꺼내든, 가장 최근이자 가장 악독한 위협은 성별 개념의 재정의 시도다. 그에 따르면 성별이란 “태어나기 전이나 태어났을 때 식별할 수 있는 불변의 생물학적 특성에 근거한 것으로서, 남성 또는 여성”이다. 만약 이것이 통과된다면 트랜스젠더와 간성인 사람들은 법적으로 지워질 것이다.

트럼프는 또한 악명 높은 트랜스 혐오자이자 “젠더(성별) 이데올로기” 비판자인 로저 세브리노를 연방 민권청장에 임명했다. 세브리노와 대안우파의 극단적인 사회보수주의자들은 젠더 개념을 남녀 간 차이를 지우기 위한 좌익의 전략으로 여긴다.

2017년 호주에서도 성소수자 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안전 학교’ 프로그램을 좌절시키기 위해 이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위협”이 들먹여졌다.

다양성, 다문화주의,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권리에 대한 진보적 태도를 증오하는 이들은 이슬람 혐오, 좌파에 반유대주의 딱지 붙이기와 함께, 트랜스젠더 권리와 젠더 개념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극우파는 사람들이 차별받는 집단에 덜 공감하길 원하고, 그 대신 국적, ‘인종’, 전통적인 가족 가치에 근거한 정체성을 고취시킨다.

성별인정법 개정안

영국에서 트랜스젠더 옹호자들은 2004년 제정된 성별인정법(GRA)이 진보적이긴 하지만, 출생 증명서를 정정하기 위한 성별 인정 증명서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원치 않는 의료적 절차[정신과 진단 등]를 거쳐야 하는 것을 오랫동안 비판해 왔다.

영국에서는 2016년 1월 ‘여성·평등 의회 위원회’가 트랜스젠더를 지원하는 권고안 30건을 발표한 이후 언론에서 트랜스 혐오가 부쩍 급증했다. 그 권고안들은 트랜스젠더들의 삶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설문 결과에 대한 정부의 초기 반응은 꽤 긍정적이었다.

"트랜스 여성은 여성이고, 트랜스 남성은 남성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차별받는 집단을 방어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익 트랜스 혐오자들뿐 아니라 소수의 트랜스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사회주의자들도 권고안 중 특히 두 개(트랜스젠더 자신의 결정만으로 성별 인정 증명서를 발급하는 것과 공식 인구 조사 자료에서 논바이너리 범주를 도입하는 것)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비판자들은 이 권고안이 “여성” 범주를 지우고, 여성의 공간을 “남성의 몸을 한 트랜스젠더들”에게 개방하며, [자신의] 성별을 고민하는 아동들을 해롭고 난폭한 “트랜스젠더 로비”에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중 마지막 주장은 지방정부법 28조*를 옹호했던 자들이 게이 남성을 약탈적 소아성애자라고 중상모략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어린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사람들이 지원을 구할 때 맞닥뜨리는 현실은 성별 정체성 클리닉이 제한돼 있어서 첫 번째 진료를 잡는 데까지 수개월이 걸린다는 것이다. 진료를 잡더라도 처방은 수술이 아니라, 상담과 사춘기 억제제 처방 등으로 제한된다. 성별 전환을 계속 진행할지 여부를 충분한 정보를 갖고서 결정할 수 있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해악적 결과와 피해를 낳는다. 익히 확인됐듯이 적절한 지원은 생명을 살린다.

트랜스젠더들은 쓰나미 같은 트랜스 혐오 공격과 우리네 삶에 대한 부정확한 논평에 맞서 우리의 존재를 방어하는 일을 반복하느라 진이 빠진다.

여성의 공간을 위협한다는 주장은 오해에 기초한 것이거나, 더 나쁘게는 트랜스 혐오적인 유언비어다. 성별인정법은 여성의 공간에 접근하는 것과 무관하다. 관련 내용은 2010년 평등법에 규정돼 있고 “여성의 공간”에서 트랜스젠더를 법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 단체에서 예외 조항을 발동해서 트랜스 여성을 배제하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트랜스젠더를 받아들인다.

정부는 권고안에 대한 의견을 2018년 10월까지 받았다. 트랜스 혐오 단체들과, 트랜스 혐오자들이 뭉친 맘스넷 같은 SNS에서는 부정적인 의견 제출을 조직했다. 트랜스젠더들이 우려하는 것은 정부가 권고안에 따른 변화를 회피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의회의 초점이 브렉시트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특히 더 그렇다.

트랜스 혐오자들과 트랜스젠더 비판자들

특히 미국에서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종교적 우파들 중 일부는 핸즈어크로스디아일(HATA)과 같은 비종교적 위장 조직을 통해 활동한다. 그들은 성별 정체성을 아예 제도적으로 인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편협함을 가짜 자유주의로 치장해서 이런 입법이 시민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는 트랜스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단체인 ‘영국 여성의 자리(WPUK)‘가 — 대체로 교원노조(NUT)와 공무원노조(PCS) 소속이다 —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선택만으로 법적 성별을 바꾸는 것과 논바이너리 인정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성별인정법 개정이] 여성의 조건을 침해하고 시스젠더 여성(타고난 성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여성)을 더 큰 남성 폭력과 괴롭힘의 위험에 처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 로라 마일스 외 지음 | 정진희 엮음| 책갈피 | 2018년 |184쪽|9000원

그들은 [우익 신문] 〈데일리메일〉 기사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트렌드’와 같은 트랜스 혐오 웹사이트 자료까지 긍정적으로 소개하며 유포한다. 그들은 “논쟁”을 하자고 말하지만 정작 [성별인정법] 개정에 찬성하는 트랜스젠더를 연단에 초대한 경우는 없다.

화장실에서 트랜스 여성이 ‘시스젠더’ 여성을 공격했다는 어떠한 사례도 없는 반면, 트랜스 여성들이 괴롭힘과 모욕을 겪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고정관념에 따라 충분히 ‘여성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스젠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몇몇은 트랜스젠더 죄수 캐런 화이트의 최근 사례를 지적했다. 여성에 대한 폭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화이트는 여성 교도소에 잘못 배치돼 재소자 네 명을 추가로 공격했다. 사실 이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은 교도소의 수형자 위험 관리 수준 심사와 그에 따른 분류가 실패했다는 것이지, 트랜스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경우든, 문제 있고 폭력적인 사람 한 명 때문에 모든 트랜스 여성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늘어나는 트랜스 혐오

2015년 몇몇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평등 위원회’에 로비한 것에서 시작된 일은 순식간에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2018년 7월 한 트랜스 혐오 단체가 런던 자긍심 행진에서 예정에 없이 선두를 장악해서 트랜스 혐오적인 전단을 배포했다.

일부 언론은 너무나 적대적이어서 2018년 10월 정부 평등청이 언론의 “부정확한 억측”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정도였다.

노동당은 선거 때마다 여성만이 공천받을 수 있는 선거구를 지정하는데* 이것도 쟁점이 됐다. 노동당 지도부는 이런 선거구에서 트랜스 여성도 공천받을 수 있다고 밝혔고 이는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2018년 세계 여성의 날에 최대 300명의 트랜스 혐오적 페미니스트들이 이에 항의하며 노동당에서 탈당했다.

한편, 한 트랜스 아동에 관한 이야기인 ITV의 3부작 드라마 〈버터플라이〉 등 긍정적인 프로그램들과 트랜스젠더를 지지하는 기사들이 있어 왔다. 하지만 2018년 11월 방영된 채널4의 ‘트랜스 아동  — 더는 회피할 수 없다’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트랜스젠더 반대 선전을 거의 노골적으로 했다.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은 저메인 그리어와 린다 벨로스 같은 트랜스젠더 비판적 인사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연설을 불허했다는 (대체로 사실무근인)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비판자들과 트랜스 혐오자들은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아 왔고 우익 언론은 물론이고 안타깝게도 좌익 신문 〈모닝스타〉한테도 그랬다.

과열되기 일쑤인 SNS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트랜스 혐오자와 비판자들은 소수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대다수 페미니스트와 여성 단체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영국 〈가디언〉 신문이 트랜스 혐오적 주장을 수용하는 사설을 실었을 때, 미국 〈가디언〉 편집부는 그 논조에서 거리를 두는 공개 서한을 썼다. 마찬가지로 ‘영국 여성의 자리’가 올해 초 아일랜드 투어를 계획했을 때, 많은 페미니스트·사회주의자·여성 단체들이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아일랜드의 2015년 성별인정법은 (몇몇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의 의사만으로 성별을 바꿀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영국보다 앞서 있다. 남성이 여성만의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성별 인정 증명서를 악의적으로 신청했다는 보고는 한 건도 없었다.

사실 트랜스젠더는 성별 인정 증명서가 없어도 출생 증명서를 제외한 모든 문서에서 성별을 바꿀 수 있다.[영국에서는 해당 문서 발급 기관에 성별 정정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인을 제시하면 여권, 운전면허증 등에서 성별을 각각 고칠 수 있다.] 성별 인정 증명서가 있으면 원치 않는 공개(‘아웃팅’)에 대한 일부 법적 보호를 받게 되지만, 그것이 여성만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면허 같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트랜스 여성이 여성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누가, 또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

아일랜드의 교훈

아일랜드에서의 지난 몇 년은 여성의 권리와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대치시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보여 줬다.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의 권리 증진이, 어렵게 얻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분열적이고 비관적인 견해는 우익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사실은] 여성의 권리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공격하면서 페미니즘에 친화적인 양 행세할 수 있게 하고, ‘성은 둘뿐이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명백한 현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파와 트랜스젠더 비판적 좌파 모두에게 만연한 본질주의* 주장과는 달리, 젠더는 말할 것도 없고 생물학적 성(섹스)조차도 이분법적이지 않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최근 글(“왜 생물학적 성은 이분법적이지 않은가?”)에서 생물학자 앤 파우스토-스털링은 생물학적 성이 염색체 차이에 따라 단순히 둘로 나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파우스토-스털링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엄격한 이분법적 정의를 법제화하려는 시도는 도덕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잘못됐다고 본다. 수십 년 동안 그녀와 키스 무어 같은 다른 생물학자들은 사람들을 두 성별 범주 중 하나로 분명하게 분류할 수 있는 단일한 생물학적 척도는 없다고 주장해왔다. 성별에는 염색체, 태아 생식샘, 태아 생식기, 호르몬, 체내 생식적 성, 사춘기 호르몬, 사춘기 형태학적 성 등 여러 층위가 있으며, 각각은 대립 유전자*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에 의해 매개된다. 그런 만큼 간단한 유전자 검사로 성별을 규정할 수 없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과학보다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트랜스 여성은 여성이고 트랜스 남성은 남성’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회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은 현실에서 성소수자와 여성 양쪽의 권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반동 세력을 좌파적으로 색칠해 준다.

여성과 트랜스젠더의 투쟁을 분열시키면 둘 다 약해진다. 아일랜드의 경험은 정반대를 보여 준다. 여성들과 트랜스젠더들이 함께 싸우면 전진을 이루고 권리를 방어할 수 있다.

2015년 아일랜드에서 성별인정법과 동성 결혼이 성공적으로 쟁취된 뒤, 2018년 낙태금지법 폐지 운동은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 운동에서 페미니스트, 노동조합원, 사회주의자,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과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함께 싸웠다.

차별의 근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차별이 물질적 근원을 갖고 있다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성소수자 권리를 위한 투쟁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정체성 정치들(예컨대, 특권 이론)을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이론들은 계급과 계급 투쟁을 경시하고 집단적인 저항 전략보다는 매우 제한된 개인적인 저항 전략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별 정체성은 “기분”이나 “느낌”이 아니라, 내면 깊이 뿌리박힌 실재적인 것이다. 이것은 자아 감각, 육체와 그에 대한 자각, 타인에게서 받는 기대, 그리고 물질적 상황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

사회주의자들은 차별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성별 정체성을 표현할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따라서 우파가 차별 반대 투쟁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정체성 정치[최근 서구 우파들은 종종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다]을 공격할 때, 좌파는 우파의 공격에 문을 열어주는 트랜스젠더 권리 반대 주장을 덥썩 물어서는 안 된다. 슬프게도, 최근 몇몇 사례에서 트랜스젠더 권리를 놓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트랜스젠더 비판자들은 이중잣대를 내세우고 있다. 우파처럼 그들은 성별 정체성이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그들은 “정체성은 물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적 지향이 실재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성적 지향과 같은] 섹슈얼리티와 성별 정체성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있음을 전혀 입증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또 다른 이중잣대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제할 권리는 인정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게는 똑같은 권리가 있음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차별받는 사람들과 조건 없이 연대한다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자기 결정권과 논바이너리 인정을 분명하게 지지하는 것을 뜻한다.

거의 모든 노동조합과 영국노총(TUC)이 트랜스젠더의 성별 자기 결정권을 지지하는 데에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만약 보수당 정부가 성별인정법 개정 권고안을 얼버무리려 한다면, 새로운 캠페인이 필요할 것이고 우리는 노조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만약 그 권고안이 정부의 지지를 받고 시행된다 할지라도, 트랜스 혐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노조 지부와 사회주의 조직을 통해 우리는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활동가들과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트랜스젠더의 자긍심 행사, 시위, 농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트랜스젠더와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계급 관계와 핵가족 때문에 만연한 것이다. 이는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고 분배되는 방식이 비합리적인 사회의 결과이자,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착취가 상호작용한 결과물이다.

트랜스젠더와 여성의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당장 공동의 투쟁을 촉진시킬 공동전선이 필요하다. 나아가, 트랜스젠더와 여성 모두의 이해관계는 혁명적 정치 조직을 건설해서 차별의 근원을 타도하는 데 있다. 그 근원은 바로 자본주의다.

서울에서 열린 '맑시즘2018'에서 연설하는 로라 마일스 ⓒ이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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