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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칼럼
‘홍준표 법’과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동지들이여, 우리가 노동계급이냐 “국민”이냐?

“이 법에 과도하고 인권 침해의 요소가 담겨져 있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이 법의 부결에 대해 우리가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국민의 병역의무에 예외가 있어서 안 된다는 이 법의 기본 취지에 적극 동의한다.”

이는 2005년 6월30일 민주노동당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홍준표 법”(병역 면탈을 위해 국적 포기한 이들의 동포로서의 권리를 제한시키는 법) 부결에 대한 논평의 요지이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5명이 찬성 투표하기도 한 이 법에 대한 이와 같은 당론 차원의 논평을 보니 나는 민주노동당이 정말 사회주의 정당 맞는지 심히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왜 그랬는가? 민주노동당이 “홍준표 법”을 지지한 두 가지 근거인 “형평성의 문제”와 “병역의무의 예외 없음”을 차례로 문제 삼으면서 이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하자.

물론 사회주의자들이 피지배층의 권익 옹호의 차원에서 현존 자본주의 사회의 “형평성”을 제고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이치에 맞다. 자본주의 그 자체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형평성”을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만, 일단 약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의미에서 가장 심한 ―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법마저도 위반하는 ― 불평등들을 시정토록 사사건건 투쟁해야 한다. 한데, 극우주의자 홍준표가 제출한 두 개의 법안은 정말로 한국 지배층의 고질적인 병역 회피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실제로는 자녀를 미국 등 해외에서 낳아 외국 국적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경우들은 상당수 한국 지배계급의 핵심부보다는, 유학생이나 상사주재원 등 중간층 상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핵심부 같으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자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건강상의 이유로” 면제를 받아주거나 아이를 표면적으로 군대에 보내도 행정병 등 후방에서의 “편한 보직”을 따주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이러한 편법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군부와 재계, 관계(官界), 학계 등 특권집단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비공식적 연결망인데, 이 연결망을 부르주아 국회의 어떤 법으로도 잘라내기가 힘들 것이다. 혁명적 변혁이 이루어져야 그 연결망이 어느 정도 와해될 수 있을 것이다.

“홍준표 법”이 실제로 중간계층의 상층부에만 타격을 줌에도 불구하고 한국 지배계급이 드디어 자정(自淨) 기능을 발휘한다는 선전적 효과를 거두어야 됐던 것인데, 극우파의 포퓰리즘에 사회주의자들이 말려든 것은 극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정말 빈민개병제의 희생자인 징병 대상자들의 권익 옹호를 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종교, 신념, 성격상으로 군대에 갈 수 없고 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투쟁과 사병 인권과 생활환경 개선 투쟁, 그들의 쥐꼬리만한 월급 인상을 위한 투쟁을 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한국 국적을 잃게 된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보다, 사병들을 위해 내무반의 바닥이 아닌 2인실에서 잠잘 권리, “국가의 노동자”로서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월급을 받을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더 급하지 않은가?

물론, 병역이 존재하는 한 다소의 사회주의자들도 이 현실을 단순히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병역이라는 걸 필요악으로 조건부 인정하는 것과, “병역의무에 예외가 없다”는 식의 극우파의 군사주의적 애국주의에 적극 동의하는 것은 서로 달라도 한참 다른 이야기다. 양심상 무기를 들 수 없는 사람이나 타고난 성격상 합숙 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체복무 제도도 없는 군대, 폭력까진 아니더라도 폭언을 듣거나 “알몸 사진” 같은 방법으로 인간적 존엄성을 밟히지 않고서는 제대할 수 없는 군대, 인권 의식이 전무해도 “군기”와 “상명하달”을 꼭 내세우는 군대, 노역을 시켜도 월급다운 월급을 주지 않고 최소한의 사생활이 허용되지 않는 내무반에서 살게 만드는 군대 ― 이러한 권위주의 형(型) 군대에 예외 없이 모두를 끌고 가는 데 우리 사회주의자들도 동참해야 한단 말인가?

헌법에 병역의무가 명시돼 있어도 강제로 인분을 먹고 “알몸사진” 찍을 의무란 명시돼 있지는 않다. 그러기에 군 당국이 반(反)인권적 관습들을 일소하고 사병들에게 인간다운 생활과 근무 여건을 제공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징병 연령의 남성들에게 “예외 없이 병역 이행하라”는 소리를 할 명분은 없다. 인권이 짓밟히는 곳으로 사람을 강제로 집어넣는 것도 인권 정신에 맞지 않은 행위다.

지금 한국 군대의 형편없는 인권 수준에 대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차원에서도 장황히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적 시각에서도 한국군의 존재 목적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느 부르주아 국가에서도 군이란 계급적 지배의 물리적 기반이지만, 동족상잔과 베트남 민중이나 광주 민중의 학살, 범죄적인 이라크 파병과 같은 “남다른” 경력을 가진 한국군은 지배계급의 내부 구조 안에서도 “친미극우”의 극단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다. 외무부도 한 몫을 했지만 이라크 파병 결정을 내리는 데서는 군 당국의 파병안 적극 추진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지만 만약 미 제국의 대북 도발이나 침략이 새로운 한국 전쟁을 촉발시킨다면 지금 군에 가 있는 남성들이 미 제국의 총알받이로 동족을 살육하는 데 동원될 것 역시 분명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예외 없는 군 복무”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도하는 것이 우리 세계관에 훨씬 잘 부합되는 일인데, 과연 어떻게 해서 민주노동당이 극우파의 군사주의적 발상에 동감하게 됐던가?

표를 의식하는 기회주의적 처신도 한 몫을 한 것 같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을 “노동자의 대표”이기에 앞서 “국민”으로 인식하는 데 있는 것 같다. 혁명적 변혁의 길을 열어 주는 계급의식보다 부르주아 국가가 내면화시킨 “국민의식”이 더 앞선다면 사회주의자로서 거세를 당하고 만다. 민주노동당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