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000년이 될 무렵 유럽 기독교 세계는 종말이 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가정과 재산이 버려지고, 생산이 멈추고, 광신도 집단이 생기고, 공포가 확산됐다.

이 시기는 신비스러움에 집착하고 비논리적인 행태가 유행한 시기로 흔히 묘사된다.

이런 평가는 대개 종교개혁 이후에 나왔다.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은 당시 가톨릭 성직자들이 특유의 불합리성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주장했다.

세속주의로의 고고한 진보를 몹시 보여주고 싶어 했던 후대 역사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일까지 꾸며냈다.

오늘날 논설가들도 똑같은 식으로 거들먹거린다. ‘눈송이 세대’는 더 강해져야 하고 공연한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눈송이 세대”는 눈송이가 저마다 유일무이한 결정을 이루고 있듯이 요즘 젊은 세대가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비판이나 시련을 견디지 못하며 쉽게 절망한다고 비꼬는 말이다.]

그러나 서기 1000년 무렵 유럽을 휩쓴 극심한 공포는 현실에 뿌리가 있다.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전초지에서는 침략군에 맞선 힘겨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봉건제 생산 양식의 심화하는 위기가 기근, 전염병과 겹쳤다.

대다수 사람의 비참한 상태를 제하더라도 걱정거리가 넘쳐나는 시기였다.

오늘날 대중 매체들은 공포를 부추기고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비난한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실린 한 기사 제목은 이런 것이다. “코로나19, 아프리카 메뚜기 떼, 불붙은 종말론적 공포.”

그러나 작은 글씨로 된 본문에서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이를 일축한다.

사실 사람들이 코로나19에 대해 걱정하고,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안전해질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더욱이 영국에서는 보수당 정권이 인간의 안전이 아니라 이윤의 흐름을 더 걱정해서 몇 주 동안 대응을 미적거렸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공포에 떨 만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 두려움과는 별개로, 이 사회에는 종말론적 공포를 이용해 먹는 산업이 존재한다.

세계 종말을 소재로 한 영화, TV 드라마, 소설, 비디오 게임은 무수히 많다.

그런 데에서 종말의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한동안은 자연재해가 유행이었고, 이후 좀비나 유행병이 인기를 끄는 소재였다.

공포

물건이 텅 비어 있는 미국 워싱턴 소재 한 마트 ⓒ출처 Wonderlane(플리커)

이 체제는 라면과 휴지를 사재기하라고 부추기며 우리에게 두려움을 되팔 것이다.

진짜 문제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모두가 절멸한다고 하는 ‘기후 재앙론’이라고 주장하는 괴이한 체제 옹호론도 있다.

이는 기후변화 부인론자들의 위장술이다. 보통 그들은 ‘기후 비상사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말 임박’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다를바 없다고 주장한다.

기후 위기 반대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TV쇼 진행자 피어스 모건 같은 자들이 보통 그런 주장을 펴지만, 지각 있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세계 거의 모든 곳에는 대홍수 신화가 존재한다.

그런 신화들은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이 내려와 육지에 사는 숨 쉬는 모든 생명들이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런 신화가 터무니없다고 해서] 해수면 상승이나 재앙적 기후변화의 시작이 허구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기후 재앙, 핵 전쟁, 세계적 유행병으로 세계가 종말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도 삶에 지쳐 있고 진절머리를 내지만 동시에 죽음을 두려워 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과 지구에 대한 착취·억압·차별에 의존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끝을 모르는 이윤 축적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세상을 보고 조금치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이다.

소외

이 세계 자체와 그 안에서 우리가 자리한 처지는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 내내 인간은 자연을 상대로 노동을 해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고, 이를 위해 다른 인간들과 협력적 관계를 맺었다.

삶의 가장 본질적 측면이어야 하는 노동이 [자본주의하에서는] 견뎌야 하는 짐이 된다.

소외로 인해 노동자들은 노동 과정을 지배하지 못한다. 노동의 산물은 상품이 된다.

상품이 된 노동의 산물은 인간의 필요가 아닌 몰인격적인 시장과 기업주의 이윤 추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소외돼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사고는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예컨대 파멸적 위험에 대한 거짓 경고가 진짜 재앙을 일으키는 데에 이용될 수 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은 당시 이라크 통치자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이를 사용할 계획이라는 거짓된 경고로 정당화 됐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결정적 증거, ‘스모킹 건’이 나올 때까지, 즉 버섯구름이 피어오를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버섯구름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먹고 마시고 즐겨라, 아니면 냉소하든지’ 같은 주장도 위험하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냥 애쓰지 말자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주장을 유행시켜도 세계 종말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해결이 까마득한 실질적 위험이 넘쳐난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해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편, 불안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 보면 우리가 직면한 위험이 너무나 큰 나머지 인간들이 알아서 문제를 함께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20세기 초 어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윤 추구가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로 통합되는 가운데 자본가들이 이윤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터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여러 이유에서 틀렸다. [세계의 경제적 통합에도 불구하고]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그런 주장을 반증한다.

세계 종말이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과학자들이 고안한 ‘지구종말시계’는 현재 자정(종말) 2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지구종말시계는 냉전 시기의 핵무기 경쟁이 비합리적으로 합리적인 귀결로 이어지던 시기에 고안됐다.

핵전쟁은 인류 전체를 절멸시킬 수 있다. 즉, 핵무기 경쟁은 서로가 서로를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는 상황을 낳았다. 이것이 이른바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다. 머릿글자를 따면 “광기”(MAD)다.

1960년대 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핵전쟁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케네디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만회하려고 벼랑 끝 전술을 폈다. 결국 먼저 굽힌 쪽은 소련이었지만, 실제로 핵전쟁이 날 수도 있었다. 리처드 닉슨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핵무기 사용도 불사할 것이라고 소련이 믿게 하려고 “미치광이 전략”을 폈다.

이 전략은 먹히지 않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지배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분별력을 갖출 것이라는 믿음이 다시 유행했다.

이후 사회주의자이자 역사가인 E P 톰슨은 1980년대 반핵 운동의 부상에 크게 기여했다. 톰슨은 “절멸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핵전쟁의 위험성이 극도로 심각하기 때문에 [지배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핵전쟁을 막을 이해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지배자들에게 세상을 폭파하는 것은 그들의 이익에도 어긋난다고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부자들도 소외를 겪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뒹굴며 안락하게 지낸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자들은 결국 우리 모두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들 스스로를 포함해서 말이다.

현재 그럴 공산은 꽤 커 보인다.

지배자들은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쏟아부어 모든 사람과 지구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것을 기꺼이 묵인하고, 실행하고, 찬양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체제가 가하는 폭력 일부를 극적으로 되돌려줘서 변화를 촉발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런 전략은 번번히 실패했다.

지배자들에게 애걸하거나 지배자 몇몇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지배자들을 막아낼 만큼 강력한 힘을 찾아야 한다.

혁명

불안해 하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분노를 저항으로 돌리자는 것은 그저 좋은 아이디어인 정도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이다.

개혁 입법을 하거나, 창문을 깨거나, 심지어 건물을 폭파한다 해도 현 체제의 파괴적 작동 방식을 근절할 수 없다. 그러나 혁명으로는 그럴 수 있다.

혁명은 체제가 계속 굴러가도록 노동하던 압도 다수 대중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에 나설 때 벌어진다.

그런 시기에 사람들은 기존 방식대로 살 수 없음을 일순간에 깨닫게 된다.

위기는 사람들을 마비시킬 수 있지만, 해방으로 나아가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은 갈수록 악화하는 끔찍한 삶을 감내할 것인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지를 거듭해서 선택해야 한다. 사람들이 언제나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니며, 싸운다 해도 승리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은 기차를 타고 가던 인류가 비상 브레이크를 당기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혁명이라는 ‘비상 브레이크’는 재앙을 막고 인류의 혁명적 잠재력을 실현시킬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대학살극을 끝내기 위해서 노동자들과 군인들은 국제적으로 저항에 나서야 했다. 즉 혁명을 일으켜야 했다.

이번 종말을 막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