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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N번방’ 사태:
뿌리깊은 여성차별과 성 상품화가 낳은 악성 디지털 성범죄

성 착취 불법촬영물을 제작·유포·판매한 ‘텔레그램 N번방’(그 일종인 ‘박사방’) 운영자의 실체가 드러났다. 범죄의 잔인하고 끔찍한 실상은 공분과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다.

ⓒ이미진

가해자들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어린 여성들에게 접근해 고액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개인 정보와 나체 사진을 받아 냈다. 그리고 이를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성행위 영상을 찍어 보내도록 강요했다. 이 영상을 각 단계별 비밀대화방에 돈을 받고 유통시켜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것이다.

아동·청소년들까지 “성 노예”로 삼은데다 수법이 잔인하고 가학적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이들은 나체 사진을 지인과 가족에게 유포하겠다는 협박이 여성에게 줄 엄청난 공포심을 이용했다. 피해자들은 앞으로의 인생이 끝장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가해자들은 성폭행을 사주해 그 영상을 찍어 올리는 짓도 저질렀다.

검거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은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 등에게까지 사기·협박으로 돈을 뜯어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이런 일련의 범죄가 24살 청년 홀로 저지른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이미 올해 초 ‘텔레그램 N번방 처벌법’ 입법 청원에 1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그런데도 관련 법을 논의하자고 모인 국회 법제사법위원들은 여야, 정부 부처 할 것 없이 사태의 심각성과는 동떨어진 얘기나 했음이 정의당의 폭로로 드러났다. “자기만족을 위해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처벌할 것이냐”, “자기는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 등.

그러나 이번 사태는 일반 포르노(‘야동’)와는 달리, 사기와 협박으로 여성의 성을 갈취해 돈을 번 성 착취이다. 미성년자들을 노렸다는 점이 특히 악랄하다. 이는 피해 여성들에게 크나큰 상처와 고통을 남기고 삶을 나락으로 내모는 성범죄이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과 여성들의 삶에 미치는 악영향에 비해, 여전히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도 실질적이지 않다.

따라서 여성의 고통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은 디지털 성범죄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고, 범죄 수익도 전부 몰수해야 한다.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지원도 대폭 강화돼야 한다. 특히 여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불법촬영물을 완벽히 삭제해 주고 그 비용을 무상 지원해야 한다. 이런 취지의 개혁 법안이 신속히 통과되길 바란다.

한편, 해당 텔레그램방 가입자 전원 처벌 요구도 들끓고 있다. 정의당의 법안에도 성 착취물 제작자와 유포자뿐 아니라 이용자까지 처벌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가입자 수치가 26만 명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그간 여러 종류의 방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중복 추산한 숫자인 듯하다. 이번에 드러난 ‘박사방’에는 약 1만 명이 가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입자 중 성범죄를 적극 공모한 자들은 마땅히 엄벌을 받아야 한다. 그저 일반 야동 사이트로 알고 미끼용 방에 무료 가입한 사람들과 달리, 강요와 협박에 의해 제작된 성 착취물임을 잘 알면서도 돈을 지불하고 영상물을 공유·유포한 유료 회원들은 성범죄의 방조자로서 일정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여전히 미온적인

문재인 정부는 엄청난 공분이 일자, 텔레그램 N번방 이용자 전원 조사와 운영자 철저 처벌 등을 주문했다. 경찰도 “디지털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2년 전 불법촬영 항의 운동에 참가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가의 방치와 미온적 대처에 항의했던 여성들은 이런 물음을 던지고 있다. ‘예고된 비극이었는데 정부는 도대체 뭘 했나?’

연인원 수십만 명이 모인 불법촬영 항의시위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은 현실 2018년 여름에 열린 불법촬영 항의 시위 ⓒ이미진

문재인 정부는 2년 전에도 불법촬영 범죄 엄벌과 피해자 지원 강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항의 운동이 잦아들자 지난해 초 국회에서 불법촬영물 삭제 지원 예산이 전액 삭감됐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함께 자행한 일이었다. 양진호의 검경 로비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웹하드 카르텔과 정부의 유착 의혹이 불거졌지만, 뭐 하나 밝혀진 것도 처벌된 것도 없다.

무엇보다 그토록 수많은 여성들이 현 정부를 강력 성토하며 항의한 근본 배경인 여성 차별의 현실이 그대로이다. 여성들의 삶이 더 팍팍해질수록 각종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도 더 높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해 여성 노동자들의 조건을 공격해 왔다. 코로나19 사태는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또한 조국 사태로 날카롭게 드러난 계급 불평등과 현 정부 권력자들의 부패와 위선은 20대 청년 여성들에게도 큰 상처와 실망을 안겼다. 이것이 누적된 결과, 올해 초에는 20대 여성의 문재인 지지율 하락이 두드러졌다.

결국 그간 정부의 행태를 보면, 이번에도 총선을 앞두고 떨어진 표심 잡기용 검거 성과 과시와 반짝 립서비스에 그치는 것 아닌지 우려가 들 수밖에 없다. 또한 버닝썬 사태 등에서 경찰은 여성 차별을 뿌리 뽑을 의지와 능력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성범죄 고리의 부패한 일부라는 점이 드러난 바 있다.

주류 상업 언론들은 앞다퉈 이 사태를 선정적으로 보도하지만, 이들도 여성을 욕보이고 성적 대상화하는 노골적인 광고들을 거리낌없이 실으며 수익을 창출해 왔다. 심지어 디지털 성범죄 엄벌을 요구하는 기사들 주변에도 그런 광고들이 번쩍이며 클릭을 유도하고 있다.

악성 디지털 성범죄의 토양

지난 몇 년간 여성운동의 성과로 소라넷이 폐지되고 양진호 구속 등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대중의 경각심이 커졌다. 그럼에도 수단만 바뀔 뿐 왜 성범죄는 근절되지 않을까?

스마트폰과 온라인 게시판의 발달, 익명성과 보안성이 뛰어난 메신저 개발 등이 이런 범죄를 용이하게 하는 수단이겠지만, 그것이 범죄의 원인은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근본 배경에는 이윤지상주의와 뿌리 깊은 여성 차별, 성의 소외, 빈곤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이 중심인 자본주의 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를 하거나 뒤틀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끔찍한 개인들을 양산한다. 이는 디지털 성범죄 시장을 형성해 희생양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번 ‘N번방’ 범죄에서도 온갖 더러운 수단이 이용됐다. 한번 영상이 유포되면 여성의 평판과 인간관계, 심지어 삶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협박이 동원됐다. 게다가 이들에게 협박·강제에 의한 성 착취물 제작은 일반 포르노와 달리 별다른 투자금을 들이지 않고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차별 때문에 여성이 이런 성범죄의 손쉬운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흔히 남성의 성적 욕구 해소 대상이나 소유물로 취급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들은 서민층 가족, 특히 그 안의 여성에게 양육, 가사 등 노동력 재생산의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 이 탓에 여성에 대한 온갖 차별이 정당화되고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는다.

자본주의에서 성 상품화는 광범하게 벌어진다. 여성의 몸과 성행위 자체가 인격과 분리된 물건처럼 사고 팔릴 뿐 아니라, 여성의 섹시한 이미지가 상품 판매에 널리 이용된다. 이런 성 상품화에서 어린 아이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청소년 걸그룹 멤버들에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히고 남자들을 유혹하는 섹시 댄스를 추게 만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남성이 성욕을 과시하고 여성의 신체를 더 모욕적으로 취급하는 게 마치 우월한 남성성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뒤틀린 성의식도 부추겨진다.

지난 20여 년간 진행된 시장경제의 확장은 경쟁과 개인주의·파편화 경향을 강화해,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이는 타인의 고통에 극히 둔감하고 여성들과 상호 존중하고 교감하는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망가진 심리의 이기적인 개인들이 늘어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 성범죄의 상당수는 직접 현실의 여성을 상대하지 않고 온라인 익명성 뒤에 숨어 영상을 훔쳐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방식이다. 그러다보니 일부는 어느 순간 범죄라는 인식조차 사라지고 점점 더 자극적인 대상에 집착하게 되는 듯하다.

이 끔찍한 현실의 이면에는 하층계급 여성들이 처한 빈곤 문제도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가난한 여성들이 자신의 몸이나 벗은 이미지를 팔아서라도 돈을 벌도록 내몬다. 경제적·심리적으로 취약한 아동·청소년 여성들이 ‘고액 알바’를 제공한다는 미끼에 넘어가 성 착취물의 희생양이 된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이런 사기와 협박에 취약하게 만든 건 이들이 처한 처참한 빈곤이나 가족관계의 파괴였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소외의 영향을 받음에도 대다수 남성들은 성 착취물 제작·유포 같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일상적 남성문화’와 ‘강간문화’를 보여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남성들이(또, 적잖은 여성도) 일반 포르노를 볼지는 몰라도, 스너프 필름(실제 강간, 폭력, 살인 등을 찍은 영상)을 즐기고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남성은 비교적 소수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런 짓이 역겹다고 여길 것이다. 소라넷 운영자 중 여성이 있었던 데서 보듯, 극소수이지만 여성도 돈벌이를 위해 성 착취물 제작과 유포에 가담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N번방’ 사태의 책임을 모든 남성에게 돌리는 것은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을 끝장낼 효과적인 전략과 연결되기 어렵다. 성범죄의 근원은 남성의 생물학적 본성과 거스를 수 없는 욕망 탓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성 해방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성 착취물 제작·유포·판매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성 종양과도 같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이 심화돼야 한다. 여성들이 끔찍한 성범죄의 희생양으로 내몰리지 않는 세상을 위해 싸우자. 문재인 정부의 ‘말뿐인 페미니즘’이 아니라 여성들의 실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며 여성이 성적 물건 취급받는 현실을 바꿔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