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쓴 《99% 페미니즘 선언》(원제 Feminism for The 99%, A Manifesto)이 최근 움직씨 출판사에서 나왔다. 낸시 프레이저, 친지아 아루짜, 티티 바타차리야가 공저한 이 책은 지난해 영국과 미국, 스페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출간된 바 있다.

《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 친지아 아루짜, 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움직씨 출판사(2020).

저자는 모두 ‘세계 여성 파업’의 조직자들이다. ‘세계 여성 파업’은 2017년·2018년 3월 8일 세계 수십 개 나라에서 열린 거리 시위를 가리키는데, 2016년 10월 폴란드 정부의 낙태 금지 법안에 항의해 일어난 10만여 명의 시위와 아르헨티나의 여성 대상 폭력 반대 시위 ‘단 한 명도 안 돼!’(스페인어 약칭 NUM)에서 영감을 얻었다. 2017년과 2018년 미국의 3·8 시위는 트럼프의 반동적인 여성 정책과 긴축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동력이 됐다.

이 책은 2016년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인 셰릴 샌드버그 등 고위직의 엘리트 여성이 설파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1퍼센트를 위한 페미니즘”이라 부르며 거부한다. “급등하는 불평등과 양립 가능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계급과 인종에 무신경하며 우리의 대의를 엘리트주의나 개인주의와 연결시킨다고 비판한다.

저자들은 환경 정의, 수준 높은 무상 교육, 아낌없는 공공 서비스, 저렴한 서민 주택, 노동권, 보편적인 무상 의료를 위한 투쟁을 지지하고, 인종 차별 반대와 트랜스 여성 지지, 제국주의와 전쟁 반대를 천명한다.

그리고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이 “99퍼센트의 페미니즘”이라고 선언한다. 여성·성소수자 차별, 인종 차별, 제국주의 전쟁과 지배, 생태 파괴 등이 자본주의에서 비롯하고, 자본주의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저항들이 외따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옳게 강조한다. “모든 억압은 각자 구별되는 형태와 특성을 갖고 있지만, 다름 아닌 동일한 사회 체제에 뿌리내리며 그에 의해 강화된다.”(161쪽)

여성들의 투쟁적인 운동을 고무하며 자본주의에 맞서 저항 운동들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종식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모호한 몇 마디 말로 넘어간다. “모든 급진적 움직임이 공동의 반자본주의 혁명에 함께하기를 촉구”(158쪽)할 뿐이다. 마치 여러 사회운동들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가 끝장날 수 있을 듯한 인상을 풍긴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저항 운동을 지지하며 운동을 연결시키려 노력해야 하지만, 이런 투쟁만으로 자본주의가 종식되지는 않는다. 이윤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를 끝장내려면 노동계급이 혁명적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권력을 잡아야 한다. 이런 핵심적인 문제를 회피한다면 ‘반자본주의 혁명’은 공허한 선언에 그치게 된다. 

이 책은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를 노동계급이 체제에서 겪는 피해 정도로만 인식할 뿐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하는 힘의 원천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저자들이 ‘여성 파업’이라는 개념을 “현 운동의 주요 혁신”으로 가장 강조하는 것과도 연관 있다. ‘여성 파업’ 개념이 노조가 벌이는 파업의 한계를 넘어서며 파업을 ‘민주화’한다고 주장하지만, 임금 노동 철회부터 시위, 소규모 폐업, 봉쇄, 불매운동 등 상이한 투쟁 형태들을 다 포괄하며 매우 모호하게 사용된다.

2017년과 2018년에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3월 8일 시위는 분명 인상적이지만 이런 시위가 노동계급 운동의 역사에서 새로운 투쟁 형태인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이 교육, 보건, 복지 등을 위해 일터 밖에서 싸운 지는 오래됐다.

‘여성 파업’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노동계급 여성들이 다수 참가한 거리 항의 시위 형태인데, 저자들이 이를 ‘여성 파업’이라 부르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임금 노동과 무보수 노동을 통틀어 여성 노동의 중요성을 부각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노동의 범주를 임금 노동에만 두는 것을 거부”하고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 역할로 고정된 무상 노동의 필수적인 역할을 드러내며, 자본이 유용하되 보상하지 않는 활동들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임금 노동에 대해서도, 노동 문제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해 포괄적인 관점을 취한다.”(34쪽).

‘여성 파업’

여성의 무보수 가사 노동이 자본주의 노동력 재생산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과 학교, 병원, 요양기관 등 ‘사회적 재생산’ 영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중요한 계급투쟁이라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런 영역에서의 투쟁을 제조업 부문의 작업장 투쟁과 부적절하게 대비시킨다.

또, 임금 노동과 무상 노동의 차이점을 흐리는 방식으로 ‘여성 파업’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런 용어법이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는 무임금 노동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를 낼지는 몰라도, 여성해방을 위한 효과적인 투쟁 전술이나 전략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노동계급 여성이 임금 노동자로서 파업하는 것과 무보수 재생산 노동을 거부하는 것의 효과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할 수 없다. 전자는 기업주나 국가관료가 표적이 되고 실제 파업은 자본가들의 이윤에 타격을 가하거나 국가에 정치적 압력을 형성하지만, 여성이 가정에서 돌봄 제공을 거부하는 것은 표적이 분명치 않고 이윤에 타격을 주지도 않는다. 노동계급 여성이 가정 내 무상 노동을 거부하면 그 피해가 자신의 아이나 노부모 등에게 돌아간다는 난점도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지하며 직장 밖에서 일어나는 투쟁에 당연히 관여해야 하지만, 이것이 생산 현장에서의 투쟁이 지니는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 직장은 단지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지배계급의 이윤이 만들어지는 핵심 장소이다.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은 생산 현장에서 자본가들과 맺는 착취적 관계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 종식이라는 목표를 성취하려면 다른 사회집단과 구별되는 노동계급 고유의 힘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자체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