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장이다.


급진적 학자 노먼 브라운은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는 인류를 마침내 스스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했다.

“역사의 이 순간에 삶의 본능을 따르는 사람들은 죽음의 승리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음을 경고해야 마땅하다.”

브라운은 이 책을 1959년에 썼다. 그가 말한 “죽음의 승리”란 핵전쟁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선조들이 뼈저리게 깨달은 바를 다시 깨닫고 있다. 질병 덕에 죽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에 맞선 삶》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몇 주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은 어떤 추상이 아니다. 죽음은 14세기에 유럽 인구 3분의 1을 죽게 한 흑사병을 다룬 잉마르 베리만의 역작 〈제7의 봉인〉에 나오는 것 같은 어떤 신화적 인물도 아니다.

이 세계에 드리운 죽음은 계급적 죽음이다. 죽음은 밀라노·런던·뉴욕 등 세계 자본주의의 금융 중심지 몇몇을 휩쓸었다. 그러나 이 죽음은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수치는 끔찍하다. 뉴욕에서 흑인과 라틴계는 코로나19로 사망할 가능성이 백인보다 두 배나 높다.

시카고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사망자 72퍼센트가 흑인이다.

미국에서는 흑인ㆍ 라틴계가 코로나19 사망 가능성이 백인보다 훨씬 크다 ⓒ출처 Ronnie Pitman(플리커)

뉴올리언즈의 한 식료품점 주인이 〈워싱턴 포스트〉에 말했듯 “일은 힘들지, 오래 일하지, 받는 것은 쥐꼬리고, 보험도 없고, 돈도 없고, 몸에 나쁜 것밖에 못 먹고 ⋯ 이 동네 사람들은 삶이 기저질환”이었다.

노동빈곤층은 재택 근무도 못 하고 격리 공간도 없다. 이들은 외출 제한령으로 일자리를 대거 잃었고 가족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고 있다.

영국은 부족하게나마 사회안전망이 남아 있는 나라다. 그러나 4월 11일 〈파이낸셜 타임스〉는 식량 관련 싱크탱크인 푸드파운데이션의 발표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지난 3주 동안 식료품이 부족해 끼니를 거른 가족이 있다고 답한 성인이 6퍼센트에 달했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영국인 약 300만 명에 해당하는 수치다.”

압박

상황은 더 악화할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대기업과 우파 정치인들은 이동 제한령을 해제하라는 압박을 키우고 있다.

백신이 없는 상황에서 이동 제한령을 완화하면 십중팔구 재감염이 만연하고 피할 수도 있는 더 많은 죽음을 초래할 텐데 말이다.

우파 주간지 〈스펙테이터〉의 편집장 프레이저 넬슨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궤변을 늘어놓았다.

“코로나19가 초래한 죽음들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동 제한령의 효과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다. 한 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메시지는 계속 일하되 되도록 집에서 일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메시지는 실종됐다.’

“재무부는 휴직 수당 지원 신청자를 300만 명으로 예상했다. 이제는 900만 명으로 예상한다.

“원래 계획은 학생 약 5분의 1만 출석하게 하는 것이었다. 핵심 업종 노동자의 자녀뿐 아니라 취약 계층 학생, 특수 교육 학생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학생 중 겨우 2퍼센트만이 등교한 듯하다.”

그러니까 문제는 사람들이 물리적 거리두기 지침을 무시하거나 공원에 놀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너무 아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넬슨은 이동 제한령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과 이동 제한령이 초래하는 경제적 타격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역겨운 주장도 되풀이한다.

넬슨은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 15만 명이 더 목숨을 잃는다는 미심쩍은 추정치를 들이민다.

자유 시장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조차 이런 주장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경기 하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상세한 연구들은 그 영향이 흔히 짐작하는 것과 달리 부정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경제적 증거들은 사망률이 경제 성장기에 올라가고 경기 하강기에는 떨어짐을 시사한다.”

‘죽음에 맞선 삶’이란 이윤에 맞선 삶인 것이다. 살아생전 자본주의가 죽음을 거래하는 체제임을 이토록 생생하게 목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언제나 그랬다. 초기 자본주의는 노예 무역과 아동 노동에 의존하지 않았던가.

이제 이 체제는 이 세상에 남은 야생 생태계를 침범해서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창궐할 조건을 만들고 그 대가를 노동계급이, 많은 경우 목숨으로 치르게 하고 있다.

이에 맞선 투쟁은 삶의 투쟁이자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 스마트폰 앱으로 〈노동자 연대〉를 만나 보세요! 안드로이드 앱 다운로드 아이폰 앱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