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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탄생 150주년:
레닌은 독재자가 아니라 혁명적 민주주의자였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그의 핵심 사상을 개괄하고 자유주의적 논평가들과 우파의 비판에 맞서 레닌의 유산을 옹호한다.

통념과는 달리 레닌은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다. 참을성 있게 설득하고 필요할 때는 단호했다

레닌을 스탈린주의의 아버지로 취급하곤 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자유주의 우파 만큼이나 자유지상주의 좌파들도 그런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초기에 이 볼셰비키 지도자를 직접 만난 사람들의 묘사는 완전히 다르다.

프랑스의 신디컬리스트[사회변혁적 노동조합운동] 활동가 알프레드 로스메르도 그중 하나다. 로스메르는 레닌과 직접 만나 레닌의 사상을 접한 후 볼셰비키로 전향했고, 이후 평생 볼셰비즘을 고수했다. 로스메르는 1924년 이래로 스탈린주의를 비판했으며 러시아가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됐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로스메르가 저서 《레닌의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묘사한 대목이다. “레닌이 [혁명정부 청사가 있던] 크렘린궁으로 나를 불렀다. 레닌은 [코민테른 2차 대회에 참가하러 온] 각국 대표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과 친분을 쌓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대표단이 도착하자마자 레닌은 면담을 준비했다.

“첫 만남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대화 첫 마디가 자아낸 편안한 분위기였다. 이는 대화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레닌의 소탈함도 놀라웠다. 레닌은 거의 초면인 나에게 ‘제가 바보같은 글을 쓴 모양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0년 7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열기로 야심 차게 결정한 제2차 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해 달라고 ‘세계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에게’ 호소문을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를 둘러싼 국경은 여전히 봉쇄돼 있었고 모든 접경지는 만만찮은 장애물이었다.

“1920년 6월 모스크바의 분위기는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무장 혁명의 전율이 여전히 느껴졌다. 세계 각국에서 온 온갖 정치 경향의 대표들 중에는 서로 아는 사이도 있었지만 대개는 처음 만난 사이였다. 그들 사이에서 진정한 동지애가 저절로 피어났다. 토론은 열띠었다. 논쟁할 거리가 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혁명과 새롭게 태어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확고한 애착이 모든 것에 우선했다.

“크렘린궁이라는 유리한 고지에서 레닌은 대회 준비 작업을 예의 주시했다. 혁명 이후 처음으로 레닌은 유럽·아메리카·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레닌은 대표자들에게 서둘러 질문을 했다. 대표자들은 도착하자마자 크렘린궁에 있는 레닌의 집무실로 불려갔다.

“크렘린궁에 도착해 레닌의 집무실로 가다 보면, 어떤 사람을 곧 만나게 될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우리 일행은 레닌의 저술에 관해 (최신 저작 몇 개를 제외하면) 아는 것이 거의 없거나 피상적으로만 알았다. 과거에 레닌이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내 여러 경향들과 갈등을 벌였던 열띤 투쟁들에 관해서는 비교적 모호하게 알 뿐이었다.

“레닌의 글을 보면 레닌이 새로운 부류의 혁명가임을 알 수 있었다. ‘교조주의’(특정한 근본 원칙을 확고하게 고수하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와 극도의 현실주의의 놀라운 결합이 그 특징이었다.

“레닌은 전술, 부르주아지에 맞선 전투에서 ‘기동’(전형적인 레닌식 표현이다)을 매우 중시했다. 질문과 답변을 미리 준비해도, 어느 순간 아주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과 다정하고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도 말이다.”

이런 소박함과 환대는 각국에서 온 대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귀국한 다음에도 거기에 갔다온 얘기를 이런 인상에 대한 얘기로 시작하고 끝맺었을 테다.

레닌은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매우 박식했고, 서구 노동운동을 비범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태도 덕에 레닌은 현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따라잡고 그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고 정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레닌은 기회가 왔을 때 이해의 공백을 채울 수 있었고, “지도자”로서는 흔치 않게도 자신의 오류를 흔쾌히 인정할 수 있었다.

레닌이 필요할 때면 단호하고 인정사정 없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혁명의 미래를 좌우할 문제인 듯하면 레닌은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가차 없었다. 그런 경우 레닌은 주저 없이 가장 매서운 평가를 내렸고, 가장 혹독한 결정들을 주저 없이 옹호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레닌은 참을성 있게 설명하곤 했다. 그는 상대를 설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1920년에 레닌의 권위는 어마어마했다. 레닌이 가장 중대한 상황에서도 침착했음을 보여 준 일화가 많다. 누가 보기에도 레닌은 혁명의 가장 확실한 인도자였다. 그럼에도 레닌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소탈하고, 다정하며, 설득하기 위해 설명할 태세가 언제든 돼 있는 사람 말이다.

《국가와 혁명》

1919년 초 레닌의 책 《국가와 혁명》 몇 권이 프랑스에 도착했다. 《국가와 혁명》은 예사롭지 않은 책이었고 기이한 운명을 맞이했다. 명실상부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이단 취급을 받았다. 그 이론가들은 절규했다. “이건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아나키즘과 블랑키주의의 잡탕이다!”

반면 ‘정설’ 마르크스주의 주류 바깥에 있던 혁명가들, 신디컬리스트들, 아나키스트들에게 그런 자들이 붙인 “블랑키주의”라는 딱지는 반가운 것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알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에 대한 다소 낯선 이 해석을 읽고 또 읽었다.

마르크스·엥겔스의 글과 그에 대한 레닌의 논평을 실은 《국가와 혁명》에는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본질 그 자체가 담겨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레닌 자신에게도 놀라운 발견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이 글들은 모두 반세기도 안 된 것들인데도, 오늘날 왜곡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발굴하다시피 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국가가 필요하다.’ 모든 기회주의자들이 이 말을 되뇌인다. 이들은 그것이 마르크스의 가르침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멸하는 국가, 구성 즉시 사멸하기 시작하고, 사멸할 수밖에 없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덧붙이는 것은 ‘잊어버린다’.

“‘기생적 혹’인 ‘국가권력 분쇄’, 국가권력의 ‘제거’, ‘파괴’, ‘이제 무용지물이 된 국가권력’.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의 경험을 평가하고 분석하면서 국가에 관해 쓴 표현들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국가가 일시적으로만 필요하다. 국가 폐지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나키스트들과 의견을 같이 한다.”

따라서 레닌에게 사회주의 혁명은 먼 미래의 목표가 전혀 아니었고, 부르주아적 합법성의 굴레 안에서 단계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모호한 이상도 아니었다. 구체적이고 당면한 문제였다. 전쟁이 제기하고 노동계급이 해결할 문제였다. 특히 아나키즘·신디컬리즘 전통 출신 혁명가들은 레닌의 글들에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와 자신들과 닮은 사회주의 개념을 보고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