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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①: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코로나19 위기와 경제 위기에 대응해 각국 정부가 개입을 늘리고 국유화를 거론하면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의문시되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주목 받은 버니 샌더스의 도전도 대안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 줬다.

이에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연재를 게재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국가가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구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인수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이것이 사회주의에 노동자 혁명이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다. 노동자 혁명은 옛 (자본주의) 국가를 해체하고 그 대신에 노동자 국가를 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 국가는 무엇인가? 노동자 국가는 무엇에서 생겨나는가?

다행히도 우리는 역사(주로 국제적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 과거 투쟁들에서 노동자 국가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한 시도는 대개 옛 질서에 맞서기 위해 구축된 조직들로부터 시작됐고, 그러한 조직들은 옛 질서가 위태로울 때 그 전복을 계획했다. 그러한 조직들은 혁명 후에 더 나아가, 사회를 운영하는 과업을 떠맡았다. 그래서 노동자 혁명은 단순히 개벽 같은 것이 아니다. 혁명은 무장 봉기의 순간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일종의 과정, 곧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조직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1905년 러시아 혁명 동안 인쇄업 사용자들에 맞서 조직되기 시작한 파업 위원회는 더 보편적인 저항들을 촉발하고 다른 노동계급 부분들을 두루 포괄하는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로 발전했다. 그 후 노동자 평의회는 사회를 운영하기 위한 권력을 갖기 위해 정부에 도전했다.

1871년 파리 코뮌도 노동자 국가를 세우려는 비슷한 시도였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어떻게 운영됐는지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이 코뮌은 파리의 여러 구에서 보통선거로 선출된 자치 위원회로 이뤄졌다. 이 위원회는 책임을 졌고, 특히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었다. 그 위원회의 성원들 대부분은 당연히 노동자 아니면 노동계급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자신의 정치적 성격을 박탈당했고, 책임을 졌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는 코뮌의 도구로 변모했다. … 코뮌의 공무원은 모두 노동계급의 평균 임금만을 받았다. 국가 고위층이 가졌던 특권과 재량은 그러한 고위층의 소멸과 함께 사라졌다. … 상비군과 경찰 그리고 옛 정부의 무장 기구들을 완전히 없애버린 후 코뮌은 곧장 정신적 억압 기구였던 성직자들의 권력을 깨부쉈다. … 사법 기구들은 기만적인 독립성을 상실했고 … 이들도 선출되고, 책임을 지고, 소환될 수 있게 됐다.

1917년 러시아에서 다시 나타난 노동자 평의회는 코뮌보다 훨씬 진보한 형태의 노동계급 조직이었다. 그러나 일상생활 전반에서의 완전한 민주주의, 법관부터 군장교에 이르는 모든 대표자들의 특별대우 폐지, 대표자들이 자기를 선출한 사람들의 염원을 실행하지 않았을 경우 즉시 소환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평의회는 코뮌과 본질이 같았다.

1920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토론하고 결정하는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 ⓒ출처 빅토르 불라

노동자 민주주의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점이다. 극소수 부자들이 다수를 억압하기 위해 운영하는 기구와 달리, 노동자 평의회는 다수의 민주적 조직(옛 지배계급이 권력을 도로 찬탈하려는 기도를 막기 위해 구축한)이었지만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이 국가도 반혁명 위협을 격퇴하고 옛 지배계급의 권력을 깨부수면 더는 필요 없어질 것이다. 엥겔스는 아래와 같이 썼다.

더는 억압할 계급이 없고, 지금까지 있었던 무계획적 생산에 기반한 개인적 생존을 위한 투쟁과 계급 지배가 사라지자마자 … 더는 억압할 계급이 없다면 특별한 무장력인 국가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 사회관계에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불필요한 것이 돼 갈 것이며 서서히 소멸해 갈 것이다. …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소멸한다.

노동자 혁명은 또한 경제를 변모시키는 과정에 착수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를 지배하는 사상은 여전히 신자유주의로, 경제적 자유와 자유 시장을 지지하는 형태의 자유주의이다. 자유 시장 사상에 따르면, 무엇을 언제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기업들이고 그들의 목표는 오직 이윤 획득이다. 치명률이나 감염률이 높은 감염병을 막기 위한 백신을 만드는 것보다 고급 승용차를 만드는 것이 이윤을 더 많이 얻게 해 준다면, 기업은 고급 승용차를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이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품목을 만들어도 기업은 그것이 잘 팔리리라는 확신을 갖기가 힘들다. 다른 경쟁사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급 승용차를 만드는 데 낭비되는 것 외에도, 고급 승용차가 팔리지 않고 그냥 창고에 남아 있게 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상당히 보편화되면(과잉 생산이라고 한다) 일자리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지출할 수 있는 돈이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려면 생산은 계획돼야 한다.

경제를 계획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별로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계획 하면 옛 소련이나 현 북한의 획일성과 우중충함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국가들은 계획 경제의 캐리커처(희화)에 불과하다. 서구처럼 그곳 노동자들도 전혀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지 못했(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필수적이고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도 말이다.

민주적 계획

어떤 사람들은 경제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경제의 대부분이 매우 면밀하게 계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슈퍼마켓에서 산 식료품 꾸러미가 바코드 스캐너를 통과할 때 그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 보자. 어떤 내용의 정보가 창고 컴퓨터로 보내져 재고가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 알려진다. 그 정보는 팔려나간 제품을 대체할 물품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창고로 보내지는 것이다. 창고로 보내진 수치들은 회사 기획실로 수합되고, 기획실은 도매업자들에게 그 정보를 알리고, 도매업자들은 얼마만큼을 구입하고 얼마만큼을 수입할 건지 계획을 세운다. 농민의 농장에서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까지 이 모든 과정은 집단적 결정과 계획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는 이미 존재하는 계획으로, 사회주의적 시스템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계획이 제구실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는 계획이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마트도 계획을 가지고 있고, 홈플러스도, 롯데마트도, GS슈퍼마켓도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계획들은 모두 서로의 시장을 잠식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경쟁적 계획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은 다양성과 선택을 침해하는 게 결코 아니다.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같은 상품들이 이 모든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것이다. 이 다섯 개 슈퍼마켓에서 쓸데없이 중복돼 낭비되는 자원을 사용하면 오히려 진정한 재화 선택 기회를 늘릴 수 있다.

사회주의 시스템 하에서 어떤 상표의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살지를 소비자가 결정하는 데에 가격은 영향을 미치므로 중요하지만, 소비자 구매의 다른 모든 사항을 세세히 계획하는 것은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분야의 지출을 우선해야 하는지, 또 얼마만한 규모여야 하는지를 놓고 토론하고 투표로 결정할 수 있다. 우리가 병원을 더 지을 것인가, 아니면 집을 더 지을 것인가, 아니면 학교를 더 지을 것인가? 이러한 선택은 쉽지 않을 것이다. 분명 많은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어쨌든 인간 행위자들의 선택이지, 이윤을 위해 시장이 강요하는 우선 순위에 따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낭비와 착취를 없애면 기존 사회에서 가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을 가용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가장 오래된 주장 하나는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경영인과 언론이 퍼뜨리며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상투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사회가 실제로 운영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그런 주장만큼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만약 경영인(특히, 전문 경영인)들이 없다면 모든 것이 이내 멈춰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어떤 경영자들보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집단적으로는 생산 과정 전체를 안다. 그래서 기업들은 생산 라인에 설치된 건의함에 넣어진 의견들을 통해 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래서 특히 품질관리부를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지식이 제품의 품질 향상에 기여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노동자들은 어느 경영자들보다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잘 안다 ⓒ이윤선

일부 경영자들과 중·하급 관리자들은 승진하기 전에 노동자들이었다. 상품이 생산되는 방식에 관한 전문적 지식은 그들이 경영자가 된 후가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였을 때 얻은 것이다. 통상 이런 사람들이 경영자나 관리자가 되면, 이런 것과 다른 쓸모 없는 것들을 경영 학습 과정에서 배운다. 그래서 노동자들을 겁박해 임금을 삭감하거나, 노동강도를 높이거나, 더 오래 부려먹는 데 열의를 보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세상의 어떤 공장과 사무실도 거기 노동자들이 일을 멈춘다면 운영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할 때 어떤 경영자도 차를 생산해 내거나, 쓰레기를 치우거나, 지하철이 다니게 할 수 없다.

전면적 노동자통제

일부 사람들은 여기까지는 모두 동의하더라도, 곧 설사 노동자들이 자신의 부분적인 일터를 사용자 없이 운영할 수는 있다 해도 전체 사회가 돌아가게 만드는 복잡한 일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어떻게 노동자들이 도로나 철도를 놓을 것인지 말지, 또 보건의료 분야와 교육 분야의 우선순위 사항들을 조정할 것인지, 식료품과 주택 중 어느 것을 더 많이 생산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그러한 커다란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인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경영자와 관리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실제로 결정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언제나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자신들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한편, 대통령과 정부 관리들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실패에 대해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은 시장 때문이라고 한다. 2005년에 당시 대통령 노무현이 말했듯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어찌 보면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모두 진실의 일면을 말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도 시장(시장경제)의 포로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약 시장이 적대적으로 돌아서도 자기들은 맨 나중에야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잘 안다. 언제나 노동자들의 임금과 일자리, 노동조건이 맨 먼저 타격을 받는다. 더구나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이렇게 되게 만든다.

그럼에도 시장 경쟁과 이윤 창출 체제에 속하게 되면 체제의 수혜자들도 그 체제의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립된 노동자 통제는 단명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완벽하게 기계·설비류를 가동할 수 있는데도, 가차없는 임금 삭감을 단행하고 있는 냉혹한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 때문에 노동자들은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경영자처럼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노동자 자주관리로 잘 알려진 청주 우진교통도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영난이 이어지자 “뼈를 깎는 자구책으로” 노동자 스스로 임금을 30퍼센트 삭감했다. 그러나 충청북도의 재정 지원 없이는 더는 운행이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하길 원한다면 그들은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단번에 장악해야 한다. 오직 사회 전반을 장악하는 것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은 기존의 기업 내부 체계나, 다른 기업들과의 관계를 제어할 수 있다. 만약 모든 것을 장악하지 않는다면 이내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이 우리를 회사 내에서 사장처럼 행동하도록 만들 것이다.

노동자 권력

만약 노동자들이 사회 전체를 장악한다면 수요와 공급에 따르는 시장보다 더 잘 조직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하에서보다 더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수백만 명이 실업수당을 받으려고 줄을 서거나, 보건의료와 교육은 형편없는데도 첨단 무기 구입에 해마다 몇 조 원을 낭비하거나, 빈곤선 이하에 사는 사람들이 300만 명이 넘는데도 광고에 11조 원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이 돈만으로도 빈곤층 사람 개개인에게 월 30만 원씩 지급할 수 있다.)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일을 우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직 이윤을 추출하고 그 이윤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경찰과 교도소, 군대를 갖는 데만 관심이 있는 지배계급에 맡겨져 있다. 사회주의 하에서는, 우선적으로 할 일이 민주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표자들로 이뤄진 노동자 평의회가 경제적으로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해 토의하고 투표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공장과 사무실과 병원과 학교 등을 통제하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이 실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노동자 권력은 이제 100년이 넘은 사회민주주의 정부 경험과 전혀 다르다.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집권 전에 했던 약속들이 기업과 국가 공직, 언론을 지배하며 의회를 무력화시키는 자들의 방해에 의해 좌절되는 일을 방관했다.

반면 노동자들이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결정 사항들을 실행하며 보완할 때, 또 사회의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을 때는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때에는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의 에너지와 사용되지 않았던 기술들 그리고 억압됐던 상상력이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그리고 착취와 차별과 극소수의 지배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집단적인 과업에 사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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