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트럼프의 경제번영네트워크 제안과 격화되는 미·중 갈등

미국과 중국의 경쟁과 갈등이 악화되는 가운데, 미국 트럼프 정부가 중국을 배제한 새로운 경제 블록 구상을 내놓았다. 이른바 “경제 번영 네트워크(EPN)”다.

5월 20일 아시아 지역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미국 국무부 경제차관 키스 크라크는 중국 중심의 국제 공급망을 재조정하고 “자유 세계 안에서 공급망을 다각화하고 확대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리고 트럼프 정부는 신뢰하는 국가들과 경제 번영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하며, 이 구상을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문재인 정부와도 논의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수개월 전부터 새 경제 블록에 참여하라고 한국에 촉구해 왔음이 미국 정부 고위 관리의 발언으로 확인된 것이다.

2019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에서 미국은 EPN 참가를 한국에 제안했다 ⓒ출처 주한미군대사관

공급망 재조정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가파르게 악화돼 왔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중국과의 관계를 전면 중단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고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놓고 고심해 왔다. 중국 경제는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 질서 속에서 성장해 부상했는데, 이제는 이 때문에 오랫동안 미국이 주도해 온 기존의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중국이 미국의 부를 빼내간다고 주장하며 대중국 무역전쟁 의지를 밝혔다. 백악관에 들어간 트럼프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관계를 부분적으로 약화시키는 시도를 해 왔다. 중국의 대미 수출품에 관세를 매겼고, 미국의 중요 산업 분야에 대한 중국의 투자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최근 들어 트럼프 정부는 첨단 기술 분야의 대중국 수출 제한을 강화했다. 예컨대, 미국 상무부는 수출 규정을 개정해 미국 소프트웨어와 기술을 활용하는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 중국 기업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트럼프 정부는 미국의 공적 연금들이 중국 기업 주식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했다.

5월 20일 미국 상원은 ‘외국기업책임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미국 회계 기준에 맞지 않는 중국 기업을 상장 폐지하거나 미국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조달하는 행위를 막는 법안이다. 중국을 견제하는 데서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들의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5월 4일 〈로이터〉는 미국의 전·현직 정부 고위 관리들을 취재한 후, 코로나19와 경제 추락이라는 복합적인 위기를 계기로 트럼프 정부가 생산과 공급 사슬을 중국 의존에서 탈피하게 하려는 움직임에 박차를 가한다고 했다.

코로나19 대유행은 서방의 일부 자본가들에게 중국 중심의 공급망이 주는 위험성을 깨닫게 한 듯하다. 중국의 생산이 일시 멈추자 자신들의 공장도 멈췄던 것이다. 유럽부흥개발은행의 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우려했다. “중국의 한 성(省)에 외출제한령이 지속되면, 전 세계 공장들에서 급격히 [부품] 재고가 떨어진다.”

그래서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트럼프의 무역 정책이 옳음이 입증됐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가 제약, 의료 기구, 개인 보호 장구 같은 중요한 자원을 다른 나라들에 과잉 의존했음을 보여 줬다.”

이런 맥락 속에서 트럼프 정부가 ‘경제 번영 네트워크’를 제안한 것이다. 《포린 폴리시》는 트럼프 정부가 경제 번영 네트워크를 통해 기업들이 중국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돌아오는 게 제일 좋지만) 적어도 베트남 같은 미국의 우방국으로 생산 기반을 이전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중국 포위

이미 트럼프 정부의 무역전쟁 때문에 서방의 일부 기업들은 중국에서 베트남 같은 곳으로 생산 기반을 옮겼다. 그리고 코로나19 대유행은 그런 경향을 더 강화시킬 것이다.

물론 수십 년 동안 형성된 다국적 생산 네트워크가 쉽사리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기업들에 주는 이익이 여전히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럼프 정부가 관세 부과, 생산 시설 본국 이전시 인센티브 지급 등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동원하는데도, 여전히 많은 미국 기업들이 중국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경제 위기 속에 ‘탈세계화’ 목소리는 각국에서 더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주요 강대국 간 이해 충돌도 더 첨예해지고 서로 위기의 부담을 상대방에 전가하려고 애쓸 것이다. 트럼프의 이번 조처는 그 과정이 블록화 경쟁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미·중 간 지리전략적 대립”이 2020년대를 “더 큰 대불황”의 시대로 만들 여러 요인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미·중 갈등으로 환율 전쟁이 벌어질 조짐이 있다는 점이 그 한 사례일 수 있다. 중국 인민은행은 5월 25일~26일 이틀 연속 위안화 기준환율을 올렸다. 금융 위기 때인 2008년 2월 이후로 달러 대비 위안화 기준환율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 것이다. 중국 경제의 불안한 상황 때문에 환율이 오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중국 당국이 미국의 공세에 대응하려고 환율 상승을 용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리 되면,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다시 지정하는 등 환율 전쟁이 본격화될 수 있다.

경제 번영 네트워크 외에도 최근 트럼프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고 포위하는 새로운 구상들을 내놓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큰 틀 안에서 말이다. 예컨대, 중국의 유라시아 개발 구상인 일대일로에 대항해, 지난해 11월 미국·일본·호주는 ‘블루 닷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를 공표했다. 4월 29일 미국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화웨이와 ZTE 같은 중국 5G 업체를 배제한 ‘5G 클린 패스’ 구상도 제안했다.

미국의 이런 시도들은 중국의 강한 반작용과 만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더욱더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진퇴양난 한국 정부

5월 22일 루비니 교수는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상당수 아시아 국가가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한 쪽을 택하도록 강요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기서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앞서 미국 국무장관 키스 크라크는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에서 문재인 정부와 경제 번영 네트워크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그 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는 이런 제안을 받았다고 밝히지 않았다. 키스 크라크의 발언 이후에도 그것이 사실임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말을 아끼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지배자들은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 때문에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커질수록 큰 딜레마에 빠진다.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이 미국에 생산시설을 확대하기로 추진하면서, 바로 중국 현지 공장을 찾은 까닭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이후 중국을 방문한 세계적 기업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미국은 경제 번영 네트워크 외에도 화웨이 제재를 비롯한 5G 동맹 동참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5G 가입자의 30퍼센트가 이용하는 LG유플러스가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등 100여개 기업이 화웨이와 거래한다.

그러나 한국 지배자들이 중국을 의식하면서도 미국과 타협을 모색할 공산이 있다. 키스 크라크가 언급한 바로 그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에서 한국과 미국은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간 연계 방안을 논의했다고 발표했다. 최근 백악관이 미국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을 보면, 한국의 신남방 정책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공조할 수 있는 정책의 하나로 거론됐다.

동남아시아 등지로 시장을 다변화하자는 한국의 전략이 미국의 대중국 봉쇄 전략의 일부로 연결되고 포섭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의 제국주의적 갈등의 한복판에 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은 남중국해, 동중국해, 대만해협, 중국-인도 국경과 더불어 서해를 중국과의 주요 지정학적 충돌 가능 지점으로 꼽았다.

그리고 한국 지배자들은 세계 제국주의 질서 안에서 자체 이해관계(즉, 국익)에 근거해 행동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딜레마에 처해서 난처해 하면서도 한국 지배자들은 여전히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는 길을 선택해 왔다. 그 결과는 한국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 줄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문재인 정부의 대외 정책을 경계하고 위험성을 경고해야 하는 까닭이다.

트럼프 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협력을 한국에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출처 청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