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중대재해(이천 화재) 책임자 처벌 촉구 및 규탄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미진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가 벌어진 지 한 달째다. 38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한 끔찍한 참사였지만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진척이 없다.

참사 직후, 많은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찾았던 합동 분향소는 이제는 발걸음이 잦아들었다. 유가족들은 “잊혀질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사고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대책회의를 주재하고, 건설 현장 화재 안전 범정부 태스크포스(범정부TF)를 출범시키며 총력을 다할 것 같은 모양새를 보였다. 경찰은 성역 없는 수사를 약속했다.

하지만 수사 상황은 깜깜이고 아직도 원청 발주처, 시공사, 하청업체 책임자 중 아무도 구속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발주처, 시공사, 협력업체들은 책임 회피를 위해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이천 화재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 약 100명이 모였다. 유가족들은 고인들의 영정사진을 목에 걸고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민주노총 건설 노동자들, 김용균 재단 등 산재 피해자들도 참가했다.

영정 사진 속에는 누군가의 아빠, 아들, 남편이었던 고인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망자들은 대부분 일용직 건설 노동자들로, 살기 위해 나갔던 일터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한 유가족은 영정 사진 속 얼굴을 기자회견 내내 어루만지며 눈물 지었다.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중대재해 유가족이 희생자의 영정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미진
“참사 한달째인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중대재해 유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미진

유가족들은 발주처인 한익스프레스에 책임 물으며, 반복되는 중대 재해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고 주장했다.

유가족 공동대표 박강재 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어디서부터 불이 시작됐는지가 아니라 왜 이번에도 똑같은 화재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지, 왜 노동자들이 똑같은 참사를 당해야 했는지입니다.

총리 님께서 분향소를 다녀간 후 다시는 대형사고가 반복하지 않도록 실질적 처방이 절실하다며 특단의 대책을 주문했다 합니다. 그 특단의 대책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참사 생존자 민경원 씨는 참혹했던 현장 상황을 증언했다. 민경원 씨는 그날 함께 현장에서 일하던 동생을 화마로 잃었다.

“비상벨, 피난유도선, 피난유도등, 비상구와 같은 기본적인 것들만 준비돼 있었다면 지하 1, 2층 희생자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지상층에서 일하셨던 30여 명의 희생은 없었을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 여러 고인들이 정말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제 동생은 한 쪽 손목은 탈구돼 귀 밑에 붙어있었고 발목은 3개가 됐습니다. 현장은 이렇게 비참했습니다.”

유가족들은 “사고 때마다 반복되는 수많은 약속들이 이번에는 꼭 약속으로 끝나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조사 과정에 유가족 참가 보장, 발주처 한익스프레스의 사과와 책임,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 외주화 금지 등을 요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유가족들의 애끓는 호소에 응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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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대형 화재, 반복되는 기업주 봐주기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12년 전 이천 냉동창고 화재, 그 이후 다수의 화재 사건들. 그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쏟아냈던 수많은 대책과 개선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제천, 밀양 화재 등 유사한 대형 화재들이 반복됐고, 비슷한 대책들이 제시됐다. 하지만 정부의 기업주 봐주기로 규제 강화가 무산되거나 책임자 처벌이 흐지부지돼 왔다.

이천 화재도 마찬가지였다. 건설 기업주들이 이윤을 위해 안전에 투자하지 않은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발주처 한익스프레스는 한화 김승연 회장의 조카가 대표이사이고, 한화 계열사를 주된 고객으로 두고 있는 물류기업이다.

한익스프레스로부터 이천 물류창고 시공을 맡은 건우는 환산 재해율(노동자 100명 중 산재를 당한 사람 비율)이 무려 4.58퍼센트로 건설업 평균(0.75퍼센트)에 비해 월등히 높은 안전 낙제 기업이다. 이런 업체와 계약을 맺은 이유는 가장 싸게 입찰했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화재 원인으로 지적된 우레탄 폼, 샌드위치 패널 등은 화재에 취약하지만 값이 싸서 건설업자들이 애용하는 자재다.

게다가 준공을 앞두고 사측이 공정을 재촉하면서 시차를 두고 해야 할 작업들을 동시에 강행하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생존한 노동자들에 따르면 도색이 필요한 곳마다 시너통이 놓여 있었고 여기저기서 용접 작업이 이뤄졌다. 가연성 물질이 있는 지하에서 용접 작업을 해서는 안 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사고 현장에는 대피로, 비상유도등 등 기본적인 대피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대부분 하청업체 일용직이다 보니 안전 수칙이나 전체적인 현장에 대한 이해 없이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고 당일은 한익스프레스 상무, 시공사 건우의 사장, 시행사 임원이 참가하는 공정 회의가 있는 날이었고, 이들은 모두 사고 현장에 있었지만, 누구도 노동자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반복되는 참사에도 안전 규제를 강화하기보다는 보여 주기 식으로만 대처했다. 안전 규제를 대폭 강화하면 기업주들이 이윤을 줄이고 안전에 상당히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는 그렇게 하도록 압박할 생각이 없다.

과거에도 정부는 제천, 밀양 화재 직후 불법으로 저가 단열재를 사용하는 건설 현장 38곳을 적발했지만 보여 주기 식에 그쳤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 직후, 정부는 가연성 샌드위치 패널 사용을 전면 제한하는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 규제를 강화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미 2018년 1월 밀양 세종병원 화재 때도 대책 기구가 만들어져서 샌드위치 패널의 난연 성능 시험 기준을 강화하는 방안이 제시됐지만 무산됐다. 국토부가 기업주들의 반발에 물러섰기 때문이다.

경찰이 사고 한 달 동안 누구도 구속 수사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