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 엑스: 인종차별에 맞선 혁명가
〈노동자 연대〉 구독
맬컴 엑스는 ‘블랙 파워’ 운동의 거대한 상징 같은 인물이다. 맬컴 엑스는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인종차별에 저항하도록 한 세대를 고무했다. 맬컴 엑스는 평생에 걸쳐 사상적 변화를 겪었는데, 제도화된 인종차별과 인종 분리 정책에 대응한 그의 전략은 흑인 평등권 운동의 성장과 함께 진화했다. 살해되기 한 달 전인 1965년 1월 한 연설에서 맬컴 엑스는 다가올 사회적 격변과 국제 혁명을 경고했다.
“나는 궁극적으로는 억압받는 자들과 억압하는 자들 간의 격돌이 벌어질 거라 믿는다. 모두의 자유와 정의, 평등을 바라는 사람들과 착취 체제가 계속되기를 원하는 자들 사이에 격돌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흑인들의 반란을 단순히 백인에 맞선 흑인의 인종 대립으로, 혹은 순전히 미국만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은 맞지 않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억압자들에 맞서 피억압자들이, 착취자들에 맞서 피착취자들이 벌이는 국제적 반란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그의 능력 때문에 맬컴은 연설가이자 활동가이며 또 혁명가로 여겨졌다. 맬컴은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타협하지 않았으며 이런 이유로 반
“흑인 무슬림 운동”
1925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맬컴 리틀
‘네이션오브이슬람’은 주류 이슬람교와는 연계가 없는 흑인 분리주의 조직으로, 백인은 유전자 실험으로
맬컴 엑스는 14년 동안 ‘네이션오브이슬람’에서 활동했다. 매서운 지성과 날카로운 정치적 사고의 소유자인 맬컴은 조직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63년에는 최고성직자 자리에 올랐다. 맬컴이 “흑인 무슬림 운동”이라 칭했던 조직 안에서 파장을 일으키는 동안, 미국 사회 내부에서는 더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1953년 6월 베턴 루지
짐 크로법 아래서 남부의 흑인들은 정치로부터 소외됐으며 경제적으로 차별받았다. 흑인들은 일자리와 주거, 투표권이 없었으며 “똑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 패거리들의 집단 구타를 받기 일쑤였다. 남부 전역에서 KKK처럼 인종 간 통합을 극렬히 반대한 백인 우월주의 집단들은 흑인들을 공포에 떨게 할 목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1863년 노예해방선언으로 노예제가 폐지되고 공식적으로 인종 분리가 철폐된 북부 지역에서 흑인들의 삶은 그나마 나았다. 1910년과 1970년 사이 흑인 660만 명이 일자리와 인종차별적 괴롭힘이 없는 삶을 위해 남부를 떠나 산업화된 북부로 이주했다. 하지만 인종 분리와 다를 바 없이 게토
1955년 12월, 앨라배마주
흑인 평등권 운동에서 남부지역 흑인 교회들과 마틴 루서 킹 같은 목사들이 핵심적 구실을 했다. 목사들은 교회 연단에서 오랜 고난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인용했고, 이런 구절들은 인종 분리 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내어주라’는 기독교 교리와 간디를 포함한 해방 투사들이 준 영감이 비폭력 전략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비폭력 전술은 운동의 외연을 가장 광범하게 확장시킬 수단이자, 변화로 가는 좀 더 ‘합법적’ 경로로 여겨졌다.
폭력을 거부하는 방식은 남부 대다수 지역에서 평등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백인 우월주의 집단 KKK, 인종차별적 경찰, 린치를 가하는 무리들에게 시달리는 흑인들이 부당함에 그나마 안전하게 항의할 수 있는 방식이었고, 끔찍한 앙갚음을 하겠다는 위협도 줄었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행진하는 시위대를 남부 경찰들이 잔인하게 진압하는 장면은 평등권 활동가들의 용기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법률 개정이라는 장기적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이룬 작은 승리들이 이 운동의 특징이었다. 1964년 미국 의회는 평등권보장법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법에 따라 인종차별과 인종 분리를 조장하는 짐 크로법은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여전히 대다수 흑인들의 삶을 괴롭히는 일상적 인종차별을 말끔히 없애지는 못했다.
비폭력 전술 논쟁
이런 답보 상태 때문에 전략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흑인 평등권 운동의 학생 부문인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맬컴 엑스는 이런 입장을 가장 설득력 있게 주장한 대변인이었다. 1959년 TV 다큐멘터리 《혐오가 낳은 혐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내 등에 칼을 9인치 꽂았다가 6인치 빼 줬다고 고마워해야 하는가. 애초에 내 등에 칼을 찔러 넣은 것이 누구인가. … 노예제 시절 우리의 영혼을 부수고 우리의 의지를 꺾기 위해 그들은 온갖 무자비하고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 310년 동안 이런 만행을 저지른 후에 그들은 소위 노예 해방 선언이란 것을 들고나왔다 … 오늘날 백인들은 자신들이 흑인들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맬컴 엑스는 비폭력 전술에 비판적이었고 자기방어권을 지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평화롭고, 공손하고, 법을 준수하고, 모두를 존중하자.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나는 그 자를 묘지로 보낼 것이다. … 우리가 백인의 인종차별에 폭력적으로 대응한 것이 흑인의 인종차별일 수 없다. 당신이 내 목에 줄을 감으려 한다면 나는 당신의 목을 매달 것이다. 그것이 인종차별일 수 없다. 당신의 행동이 인종차별이지 내 대응이 인종차별인 것이 아니다.”
모든 백인이 “악마” 같은 존재라는 생각과 전투적 성향 때문에 맬컴 엑스는 평등권 운동 초반에는 그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후 새 세대 급진파들이 비폭력 입장을 고수하는 지도부와 결별하면서 맬컴 엑스는 운동 안에서 자신의 사상에 귀 기울일 청중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남부지역에서 벌어지는 제도적 인종차별과 북부지역의 경찰 폭력, 빈민가 임대업 및 사업가들에 맞선 운동의 급진적 목소리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수많은 모임과 인터뷰를 통해 그는 흑인들이 느끼는 분노와 소외를 탁월하게 표현했다.
흑인 평등권 운동이 백인들 사이에서도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기 시작하자 인종차별의 본질과 누가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수많은 젊은 백인 활동가들이 평등권 운동에 참여하자 네이션오브이슬람이 내세운 전략에 근본적 물음이 제기됐다. 분리주의 정치는 억압이 권력 관계로 규정된다는 이해에 바탕을 두었고 이는 모든 백인을 인종차별 가해자로 규정했다. 길거리에서 내뱉는 인종차별 언사든, 백인 판사들과 백인 경찰들이 모든 흑인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든, 개인이 저지르는 인종차별적 학대와 폭력이든, 조직된 백인 권력집단이든 구분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은 이해할 만했지만 인종차별로부터 이득을 얻는 집단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했다. 물론 백인 노동자들은 자신이 흑인 동료 노동자들보다 백인 고용주들과 더 공통점이 더 많다는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에 속아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모든 인종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굴러간다. 노동자들은 생산을 멈추고 고용주들을 무릎 꿇릴 수 있다. 동시에 노동계급은 단결을 깨뜨리고 억압적 분열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지배계급이 가하는 매우 광범한 이데올로기 공격에 노출된다.
많은 흑인 평등권 활동가들은 흑인 무슬림들이 저항에 관한 급진적 언사와 달리 흑인 권리 쟁취를 위해 실제로 벌어지는 투쟁을 외면한다고 생각했고, 맬컴 엑스는 나중에 이 사실을 깨달았다. 1963년 그는 네이션오브이슬람과 갈라서기 시작했다. 그가 존 F. 케네디 암살에 관해 조직 지도부의 뜻을 거슬러 논평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맬컴 엑스는 이렇게 말했다. “닭이 둥지를 틀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혁명의 필요성
1964년 3월 맬컴 엑스는 네이션오브이슬람 공식 탈퇴를 발표하고 평등권 운동에 뛰어들어 그 운동의 가장 급진적 부위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평등권 운동이 단순한 법률 개정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의 ‘흑인 혁명’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맬컴 엑스의 사상은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날 즈음에는 더한층 변화했다. 이 경험은 “백인은 악마적 존재”라는 그의 오랜 신념을 뒤흔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제리 대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매우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인물이었다. … 그는 아프리카인이지만 알제리인이기에 겉모습은 영락없이 백인 같았다.” 이 여행을 통해 맬컴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민족해방을 내걸고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혁명가들을 만났다. 가나의
당시 전 세계적으로 폭발하던 민족해방운동은 독립 쟁취와 식민지 지배 종식을 목표로 삼은 중간계급의 지도 하에 벌어지는 대중 항쟁과 게릴라 전쟁이 특징이었다. 이 모든 투쟁 과정에서 다른 사회가 필요하다는 점이 항쟁의 규모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신생 독립국가들의 운영 체계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맬컴 엑스는 국가란 무엇이고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더 발전시키지 못했다.
맬컴 엑스는 모든 사회 계급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단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 경험 때문에 그가 아프리카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근본적 변화를 추진할 잠재력을 지닌 세력이 누구인지를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프리카계미국인단결기구
비극적이게도 맬컴 엑스는 혁명에 관한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기 전에 살해당했다. 그의 암살 이후 몇 년은 일련의 혁명과 반란이 도래한 시기였다. 그는 미국 북부지역 빈민가 게토에서 벌어진 항쟁을 포함해 반란의 물결이 나타날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마틴 루서 킹 또한 암살 직전 사상적 변화를 겪었고 이 반란을 “외면받은 사람들의 목소리”라 불렀다.
맬컴 엑스 암살 이후 50년이 흐른 오늘날,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은 인종차별을 낳는 체제에 맞선 투쟁이 돼야 함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