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5월 29일 세계보건기구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7월 7일 탈퇴 의사를 공식 통보했다. 이 기사는 공식 통보 전인 6월 10일에 작성된 것이다. 


트럼프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중국 편을 든다며 5월 29일 탈퇴를 선언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지원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탈퇴했다. 

미국은 WHO의 예산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지원해 왔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다소 어이없는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WHO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들이 ‘중립적’이라는 신화와 달리 제국주의 열강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구실을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또 미·중 갈등이라는 현상뿐 아니라 그런 갈등이 심화하게 된 근본 원인을 알 필요가 있다.

사실 트럼프는 코로나19 사태로 WHO와 갈등을 벌이기 전인 2월에 이미 WHO 지원금을 절반으로 삭감했다. 트럼프뿐 아니라 역대 미국 정부는 WHO에 대한 투자를 줄여 그 기구의 국제적 보건 대응 조율 기능을 약화시켜 왔다. 

이 점에서 WHO가 중국 편을 들어서 탈퇴한다는 트럼프의 말은 순전히 책임 전가용일 뿐이다. 트럼프는 코로나 대응 실패와 그것이 연말 미국 대선에 끼칠 영향을 우려해 WHO와 중국을 제물로 삼아 위기를 돌파하려 하는 듯하다.

그런데 만일 WHO가 조기에 경고를 보냈다면 트럼프가 이에 따랐을까?

사실 WHO가 취할 수 있는 조처가 별 게 없는 데다, 그 기구의 취약한 위상을 고려했을 때 미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정부들조차 WHO의 권고를 신속하게 이행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트럼프라는 인물이 이번 코로나19 대유행에서 한 말과 행동을 보면 전혀 그랬을 것 같지 않다. 

트럼프가 취임 이후에 취한 조처들은 이참에 ‘불필요한’ 국제기구에서 발을 빼 재정 지출을 줄이려는 의도를 보여 준다. 트럼프가 국제기구 탈퇴를 선언한 것이 처음도 아니다. 트럼프는 유네스코가 팔레스타인 편을 든다며 2019년 1월 1일 이스라엘과 함께 공식 탈퇴했다. 탈퇴 직전인 2017년 미국은 유네스코 전체 예산의 8퍼센트를 부담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서도 탈퇴했다.

미국이 유엔과 그 산하기구에 지원하는 금액은 연간 100억 달러에 이르는데 세계식량계획(25억 달러), 평화유지군(22억 달러), 유엔난민기구(14억 달러), 유엔아동기금(8억 달러) 등이다. WHO는 여섯 번째로 많은 지원금을 받고 있다. 

장기화된 경제 위기와 미국의 상대적인 경제적 지위 하락 때문에 트럼프와 미국의 지배자들은 이런 비용이 예전처럼 큰 형님 노릇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지출인지 따져보고 있다. 핵심 경쟁자인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동시에 경쟁자들에게 무임승차 혜택이나 줄 국제 환경·보건 등에 대한 지출을 줄이려 하는 듯하다. 그 결과 세계인들의 삶에 필수적인 보건·환경·안전·교육 등이 가차없이 무시되고 있다.

미국의 보건 예산 삭감은 국제기구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예산도 10년 전에 비하면 절반밖에 안 된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부시·오바마·트럼프 정부를 거치며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국제적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질병 대부분을 감지하는 구실을 해 온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또한 와해됐다. … CDC는 우파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주는 자금에 의존하며 도널드 트럼프는 CDC 예산을 무참히 삭감해 버렸다. 이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가장 먼저 취한 조처 중 하나였다.”(마이크 데이비스, ‘자본주의가 전염병 시대를 만들어 냈다’, 〈노동자 연대〉 320호)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과학자들은 앞으로 신종 감염병이 더 자주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적 농축산업과 환경 파괴, 기후변화 때문이다. 미국의 WHO 탈퇴 선언은 향후 보건 위기 대처가 더 형편없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끝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는 현생 인류의 존속 자체가 걸린 일이다. 

신자유주의로 더 취약해진 국제 보건 기구들

미국이 주도해 만든 WHO는 처음부터 미국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처지였다. 예컨대 WHO는 1959년 5월 28일 미국이 발의해 설립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협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WHO가 핵과 관련된 내용을 발표하려면 IAEA의 사전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WHO는 방사능이 건강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 한 번도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WHO의 능력과 위상을 크게 떨어뜨려 왔다.

세계의 보건을 책임진다는 WHO의 2018~2019년 예산은(WHO는 2년 단위로 예산을 짠다) 5조 원 정도로 미국의 대형 종합병원 1년 예산과 비슷한 수준이다. 6조 원을 조금 넘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1년치 예산보다도 적다(2019년).

미국이 투자를 줄여 온 결과다. 1948년에 설립된 WHO의 예산은 1980년대까지 각 회원국이 소득과 인구 규모에 따라 정해진 예산을 지출하는 의무분담금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1983년, 신자유주의가 부상하는 시기 미국은 ... 세계보건기구에 지출하는 의무분담금 동결안을 의결했다. 다른 국가들 역시 부의 증가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세계보건기구에 대한 분담금을 인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중국의 [2019년] 의무분담금은 오래된 배분 방식으로 인해 세계보건기구 전체 예산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미국의 세계보건기구 예산지원 중단에 대한 민중건강운동의 규탄 성명’)

WHO의 의무분담금은 유엔의 의무분담금 비율을 따르도록 돼 있는데, 2019년 중국의 유엔 의무분담금 비율은 12퍼센트로 일본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중국의 WHO 의무분담금은 2014년 이래로 52퍼센트나 늘었지만, 앞선 동결 조처 때문에 유엔 의무분담금만큼 늘지는 않았다. 트럼프는 중국이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다고 비난했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의 전임자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의무분담금 동결 때문에 전체 예산에서 ‘자발적 기여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늘었다. 이제 WHO는 예산의 4분의 3을 ‘자발적 기여금’에 의존하고 있다. 이 기여금들은 특정한 프로그램에 지출하도록 돼 있어 WHO가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없다.

“WHO는 사실상 와해됐다. 현재 이 기구가 하는 구실은 매우 미미하다. WHO는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 이 때문에 WHO는 미국, 중국, 자선사업가들한테 끊임없이 아부하고 간청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지난 4~5달 동안 이 점이 자못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명백히 드러났다.”(마이크 데이비스, 위의 글)

단위 : 백만 달러
단위 : 백만 달러

이쯤 되면 세계의 보건을 책임진다는 WHO의 유명세도 뻥튀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계 보건에 대한 미국의 투자가 급감하면서 WHO 같은 기구들의 능력이 크게 쇠퇴한 반면, 상대적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빠르게 성장한 중국의 영향력은 그 기구 내에서 상대적으로 커졌다.

영국의 일간지 〈옵서버〉는 WHO와 중국의 협력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중국의 ‘보건 실크로드’ 계획에 대한 WHO의 지원과, WHO 고위관료들이 장차 핵심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는 남반구의 보편적 건강 보장 계획에 대한 중국의 지원 등이 그 일환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이를 남반구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이용하려 할 것이다. 

WHO와 중국

WHO와 현 사무총장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가 대유행 초기에 중국 시진핑 정부를 편든 것은 사실이다. 

거브러여수스는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중국 정부의 대응이 적절했다고 지지를 표했다. WHO는 중국 정부가 WHO에 신종 감염병 의심 상황을 보고한(1월 3일) 뒤에도 “인간 대 인간 전염의 명확한 증거가 없다”(1월 5일)고 의미를 축소했다. 

거브러여수스는 중국에서 코로나19 감염이 절정이던 1월 말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을 만나기도 했다. 중국 안팎에서 시진핑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응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던 때 WHO 수장이 시진핑을 만나 지지를 표한 것은 보은 성격이 짙은 행동이었다.

WHO는 중국 정부가 해외 전파를 차단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않았다. 미국 같은 선진국들이 나중에 한 것처럼 국경과 공항을 모두 봉쇄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나라들 중에는 북한처럼 가난하고 보건 기반 시설이 취약한 나라들이 있다. 그런데 WHO는 이 점을 무시한 채 국경 봉쇄는 대책이 아니라며 여행과 교역을 중단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들 나라에 코로나19가 전파됐을 때 벌어질 재난보다 중국 경제를 더 걱정해 준 것이다. 

중국 정부는 감염이 크게 확산하자 우한 지역 전체를 봉쇄하는 권위주의적 조처를 시행했는데, 거브러여수스는 이 조처도 지지했다. 사건을 은폐하든 도시를 봉쇄하든 그저 시진핑이 옳다는 식이었다. 찬사도 잊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이 갖고 있는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과 그의 리더십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왜 이랬을까? 거브러여수스와 중국 정부의 밀월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거브러여수스는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귀국해 보건복지부 장관(2005~2012년)과 외무부 장관(2012~2017년)을 지냈다. 이 기간에 중국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리며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도 그중 하나였다. 중국은 2000~2017년 에티오피아에 137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거브러여수스는 이 돈으로 당시 에티오피아에 3곳밖에 없던 의과대학을 33곳으로 늘렸다. 보건과 위생, 영양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결핵·말라리아·에이즈 치명률이 90퍼센트나 줄었다. 

에티오피아의 영웅이 된 거브러여수스는 2017년 WHO의 첫 직선 사무총장으로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중국 정부는 거브러여수스를 지지하며 10조 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WHO의 2년 예산이 5조 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만만치 않은 액수다.

거브러여수스가 중국 독재자에게만 특별히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취임 직후인 2017년 10월 짐바브웨 독재자 무가베를 WHO의 아프리카 친선 대사로 임명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4일 만에 철회한 적도 있다. 국내 친정부 언론들은 거브러여수스의 문재인 칭찬에 좋아라 하지만, 거브러여수스는 중국과 짐바브웨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그 나라의 독재자들을 더 중요하게 여겨 온 인물이다.

4월 트럼프가 WHO 지원 중단을 선언하자 시진핑은 WHO에 500억 원가량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시진핑은 WHO가 코로나 대응을 위해 모금을 호소했을 때에도 200억 원을 내놨다.(반면 미국은 150억 원밖에 안 냈다.)

시진핑 정부도 평범한 사람들의 건강이 아니라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국제보건기구를 이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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