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의 회고록이 미국에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출간됐다. 존 볼턴은 북·미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굵직한 외교·안보 현안들이 백악관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결정됐는지를 회고록에 썼고, 특히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정조준했다.

트럼프 정부는 책 출판을 막으려다 실패하자 볼턴에게 회고록에서 400여 곳을 수정하라고 요구했으나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출판 후에도 회고록을 둘러싼 백악관과 볼턴 사이의 공방은 지속될 듯하다.

존 볼턴의 회고록은 한국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볼턴이 북·미 정상회담 막전 막후를 다루는 데 회고록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볼턴은 문재인 정부의 관여를 문제삼았다. ‘북·미 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한 쪽이 북한이 아니라 청와대(안보실장 정의용)였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이 원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CVID) 비핵화’를 북한에 동의하도록 밀어붙였다고 했지만 실제로 북한이 CVID에 동의한 게 아니었다’ 등등. 즉,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일종의 이중 플레이를 했다는 비난이다.

문재인 정부는 볼턴의 회고록이 사실이 아니고 왜곡투성이라고 반발했는데, 이 논란에 우파 정당인 미래통합당도 끼어들었다. 볼턴의 회고록 내용을 놓고 국회에서 국정조사를 하자는 것이다. 

볼턴은 오래 전부터 북한, 이란 등 “불량 국가들”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온 자다. 북한 정권 교체나 대북 선제 공격을 공공연히 떠들어 왔고, 회고록에서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볼턴이 2018~19년 남·북/북·미 대화를 공정하게 증언하리라 여길 수는 없다.

또, 볼턴의 평가 중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게 분명 있다. 예컨대 북·미 정상 간 만남을 처음 제안한 게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냐, 문재인 정부냐가 그렇게 중요한가? 당시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은 각자의 정치적 계산을 가지고 싱가포르에서 서로 만나기로 동의했다. 비록 그 만남이 나중에 동상이몽의 결과였음이 드러났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북·미 외교 무대에 관여한 자의 기록이기에 존 볼턴의 회고록을 그저 무시할 수는 없다.

하노이 노딜

볼턴의 회고록에서 남·북/북·미 정상회담의 한계가 다시 확인된다.

한국의 여권 인사들은 볼턴, 국무장관 폼페이오 같은 트럼프 정부 내 인사들과 일본 아베 정부 등이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한 북·미 대화에서 매우 부정적 구실을 했음에 주목한다. 실제로 볼턴은 자신이 하노이 정상회담이 아무런 결실 없이 끝나도록 얼마나 애썼는지를 회고록에 자세히 썼다. 사실 볼턴만이 아니라,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 같은 군부 인사들도 북·미 대화가 미국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예컨대 한미연합훈련 실시)에 부정적 효과를 미칠까 봐 눈에 불을 켰다.

볼턴의 회고록은 트럼프가 주로 미국 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북·미 정상회담에 나섰음을 보여 줬다.(이미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던 바다.) 트럼프는 북·미 대화로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이루는 데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볼턴은 트럼프가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홍보 활동”으로 치부했다고 썼다. 회담을 앞둔 브리핑 자리에서, 트럼프는 이 정상회담이 언론에 보여 주기 위한 일이고, 자신은 알맹이가 빠진 공동성명에 서명할 수 있고, 그다음에 기자회견에서 승리를 선언하고 바로 떠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정상회담 현장에서도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득실을 먼저 따지며 거기에 회담 결과를 꿰맞추고자 했다. 정상회담 기간에 한때 트럼프의 ‘해결사’였던 변호사 마이클 코언이 미국 하원 청문회에 참석해 트럼프를 폭로하고 있었다. 그래서 트럼프는 회담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볼턴 등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몰 딜과 [아무 합의 없이] 우리가 걸어 나오는 것 중 뭐가 더 큰 얘기거리일까?”

회담장에서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 해체와 2016년 이후 실시된 유엔 제재의 해제를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리고 북한이 더 많은 양보를 할 수는 없는지 재차 물었다. 트럼프의 이런 입장 덕분에 볼턴은 북한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담은 문서를 북한 측에 건넬 수 있었다.

김정은은 추가 양보를 할 수 없음을 밝히며 단계적 접근을 계속 제안했다. 그리고 일방으로 핵무장을 해제할 수 없는 북한의 처지를 말했다. 즉, 북한은 안보에 대한 모종의 법률적 보장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지 못했고, 70년 동안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미군 전함이 북한 영해로 들어오면 어찌되겠는가?”

그러나 트럼프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가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미국에서 정치적 파장이 클 것이고 나는 선거에서 질 수 있다.”

트럼프 정부는 북·미 정상회담 개최라는 다소 파격적인 선택을 해 주목받았지만, 트럼프와 그의 각료들에게는 북·미 대화 과정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을 희생시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런 트럼프를 두고 문재인은 “한반도 피스메이커”라며 추켜세웠다. 그러나 지난 2년의 경험과 볼턴의 회고록이 확인시켜 준 것은 트럼프를 통한 평화 실현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고군분투?

한편, 국내에서 여권 인사들은 볼턴의 회고록을 통해 오히려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했음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트럼프 정부와 보조를 맞추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려고 한 문재인 정부의 구상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공정한 중재자가 아니었다. 북한 당국이 미국에 협력하는 문재인 정부의 약속 위반에 크게 반발해 온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2018년 4월 판문점 회담에서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에 CVID를 촉구했다는 점은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다. CVID는 북한 당국이 완강하게 거부해 온 미국의 비핵화 기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남북 정상 간 협력으로 한반도 평화가 진전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볼턴의 회고록에 드러난 내용들 중에는 이런 기대와 사뭇 상반되는 대목들이 나온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에 조선로동당 부위원장 김영철이 김정은의 친서를 들고 백악관에 갔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싱가포르에서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이 열리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김영철은 싱가포르에서 3자 정상회담을 하는 데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으로선 미국과의 직접 거래가 성사되는 게 중요했다. 

하노이 노딜 이후에는 남북관계도 삐걱거렸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에는 남북 당국들 간에도 접촉이 없게 된 것이다. 문재인은 트럼프에게 자신과 김정은 사이의 핫라인이 있지만 김정은이 핫라인이 개설된 곳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볼턴의 회고록에는 한·일 관계에 대한 서술도 있다. 한·일 갈등 당시 미국 트럼프 정부가 일본을 두둔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 많다. 

그런데 2019년 4월 트럼프와 문재인의 대화에서 눈에 띄는 서술이 있다. 트럼프가 문재인에게 만약 북한과 싸우게 된다면 일본의 참전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묻자, 문재인은 일본 병력이 한국 땅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면 한국과 일본은 하나가 돼 싸울 것이라고 답했다. 문재인 정부가 일본과의 군사 협력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이고, 이후 한·일 갈등 과정에서 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끝내 파기하지 않았는지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한편,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거나 축소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북한 내 강경파”의 존재를 언급했다고 볼턴은 썼다. 김정은이 “고백”하기를, 미국처럼 북한에도 강경파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극복하기 쉽지 않은 정치적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다. ‘당 중앙(김정은)을 중심으로 일심단결’을 강조해 온 북한에서 대외 정책 등을 놓고 권력층 내에 균열이 존재함을 짐작케 한다.

존 볼턴의 회고록은 대부분 그의 우파적 편견, 자기 변명으로 가득 찬 책이지만, 자본주의 정부들 간의 평화 협상으로 안정적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