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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정당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활동가 피트 굿윈이 1983년에 쓴 ‘Is there a Future for the Labour Left?’을 김준효 기자가 편집·번안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역사 속에서 왜 그토록 보수적 면모를 거듭 보였을까? 사민주의 정당을 좌파적, 심지어 혁명적으로 바꾸려 했던 당내 좌파들은 왜 거듭 실패했을까?

흔한 답은 국회의원 수를 늘리거나 집권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실제로 있다. 20세기 영국 노동당 정치인들의 회고록을 보노라면, 공직에서 있을 수 있는 유혹과 부패를 집대성한 카탈로그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사민주의 정당에서 의원단이 당의 전부는 아니다. 이런 정당에는 당과 연계된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많이 가입해 있고, 노동조합원이 아닌 당원도 숫자가 상당하다. 그런데도 당내 좌파들이 이런 당원 대중을 이용해 의원단을 통제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노동조합

먼저 노동조합 문제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듯해도 사민주의 정당에서 노동조합은 핵심 세력 중 하나이고, 어떤 면에서는 의원 개개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세력이다.

노동조합은 사민주의 정당을 직접 창당하거나 창당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초기 의원단도 노동조합에서 배출되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은 사민주의 정당 재정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고 당대회에서 많은 대의원들의 표를 좌지우지한다. 대부분의 시기 노동조합은 당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당내 격변이 있을 때는 노동조합이 한복판으로 직접 발길을 들이밀기도 한다.

노동조합이 사민주의 정당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논할 때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

첫째, 노동조합이 당 내에서 발휘하는 강력한 힘은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나온다. 노동조합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노동조합이 당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할 때 이는 평조합원들이 직접 사민주의 정당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니다. 노동조합 관료 및 상근 활동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조합원들의 의사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존재가 전혀 아니다. 노동조합 관료의 사회적 지위는 노동자들과 뚜렷이 다르다. 이들은 ‘상근’이라는 말 그대로 작업장을 떠나 있고, 조합원들보다 사회적 지위도 더 높고 소득도 더 많기 일쑤다. 이들은 모두 전문 협상가들인데, 미국의 급진적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그런 점을 꼬집어 노동조합 관료를 “불만 담당 관리자들”이라고 불렀다. 노동조합 관료와 상근 활동가들은 모두 기성 사회 유지에 이해관계를 갖지만, 그 이해관계는 그들이 조합원들의 불만을 대변할 수 있는지, 노동조합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런 특성은 산업 투쟁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가장 우파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도 때로 파업을 지지한다. 그러지 않으면 조합원들에 대한 통제력을 모조리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좌파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도 노동자 투쟁이 ‘너무 멀리 나아가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의 기초인) 노동조합 조직을 위험에 빠뜨릴까 걱정한다.

이 때문에 노동조합 관료들이 노동운동에서 하는 구실은 근본에서 보수적이다. 이는 그들의 정당인 사민주의 정당에서도 마찬가지다.

보수적 영향

그러나 세 가지 점 때문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당에 보수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가려지곤 한다.

첫째, 때로 노동조합 관료들이 집단적으로 의원단과 대립한다. 예전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배타적 지지(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의원단의 사회연대전략(노동자 양보론) 방침이나 정당 지도부의 친노 세력과의 통합 추진을 비판하며 대립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단 목적을 달성하면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본래의 보수적 방침으로 되돌아가, 상황이 ‘너무 멀리 나아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자신들이 보유한 당 대의원 표를 이용해 당내 좌파를 단속한다.

둘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조합원들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조합원들이 지도부를 거슬러 좌파적 투표를 조직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언제나 노조 활동가들 수준에서 벌어진 반란으로, 나머지 조합원들의 광범한 정서는 그에 미치지 못하고 그래서 노조 지도부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다시 고삐를 쥘 수 있다.

예컨대, 영국 노동당 1960년 당대회에서 좌파들은 일방적 핵무기 폐기를 통과시켰지만 바로 다음 해 당대회에서 노조 관료들은 이를 뒤집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1980년대 초 토니 벤이 영국 노동당의 좌파적 지도자로 급부상했지만 이듬해 당 대회에선 당내 좌파 경향인 밀리턴트에 대한 마녀사냥이 통과되기도 했다.

셋째, 노동조합 관료 중에 언제나 좌파 관료가 존재하고 이들이 우파 관료와 앙숙인 듯 보인다는 점 때문에 노동조합 지도자 일반이 당 내에서 오른쪽으로 압력을 가한다는 사실이 가려진다.

물론 노동조합 지도부 좌우파 사이의 차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되지 못한다. 결정적 순간에는 ‘좌파’ 지도부도 의원단을 확고히 지지한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산업 투쟁에서와 똑같은 구실을 사민주의 정당에서도 한다. 노동조합 관료라는 매우 특수한 사회 집단으로서, (개인 별로 성향이나 수사가 다를지언정) 정당에 대한 이들의 이해관계는 모두 동일하다. 바로 ‘책임성 있는’ 사민주의 정당이 성장하고 집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를 중재하는 자신들의 입지를 보존하고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좌파

사민주의 정당 내 좌파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도전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층위로 되어 있다. 첫째, 사민주의 정당 내 좌파 대부분이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통념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작업장에서나 노동조합에서 조직하는 것을 자신들의 역할로 여기지 않는다. 많은 당내 좌파 활동가들이 소속 노조에서 열성 조합원인 경우는 많지만,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당 활동에 견주면 부차적이다. 당내 좌파가 이끄는 지역위원회가 노동자 파업에 집단적으로 연대할 때도 있지만, 그 지역위의 핵심 활동은 따로 있다.

실례로, 영국 노동당 내 전통적 좌파의 간행물을 훑어 보면 그 긴 역사 속에서 파업 투쟁을 체계적으로 보도한 사례는 거의 없다. 영국 노동당의 좌파는 작업장과 노동조합에서의 조직화를 등한시했고 공산당 등 대개 다른 조직들이 그 일을 맡았다.

바로 이 점에서 둘째 이유가 나온다. 사민주의 정당 좌파들이 노동조합 활동에 힘을 기울일 때는 노동조합 좌파 관료에 의존한다. 한국에서는 정의당의 좌파도 대체로 첫째와 둘째 경향을 모두 보인다.

그런데 노조 좌파 관료의 문제는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예컨대 1971년에 영국 노동당 좌파는 노조 선거에서 우파 관료 대신 좌파 관료를 당선시키는 ‘범좌파’ 전략을 좇아 휴 스캔런을 금소노조 위원장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스캔런은 노동당 정부와의 “사회적 대화”에 앞장섰고 임금 인상 투쟁을 억제했다. 이 때문에 영국 노동운동이 재앙적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 노동당 좌파도 재앙적 타격을 입었다.

또 사민주의 정당에서 당내 좌파는 우파에 견줘 개별 당원들 수준에서 지지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지만, 개별 당원들은 당내 권력 구조에서 언제나 노동조합보다 부차적이다.

더욱이 사민주의 정당의 당원 다수는 수동적으로 당비만 납부할 뿐 다른 당 활동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열성 당원들이 모두 노동계급인 것도 아니다. 전문직·중간계급 당원이 노동자 당원보다 일과 후 지역위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기 쉬울 것이다. 결국 당내 좌파를 지지하는 적극적 기층 당원들은 숫자도 비교적 적고 노동계급에 깊이 뿌리 내리기 어려운 조건인 것이다.

선거를 위한 조직

사회주의자에게 진정 중요한 문제는 주변 세계와 어떻게 관계맺느냐다. 그런 점에서 사민주의 정당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까다로운 제약으로 작용한다.

사민주의 정당은 근본에서 선거를 위한 조직이다. 선거 승리가 이 당이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다. 당 지역위나 각종 기구가 모두 이 목적에 전념한다. 지역위는 아예 선거구를 기반으로 짜여져 있다.

선거 조직이라는 이 당의 특성은 당 지역위 활동가들의 일상 활동을 결정짓는다. 이 활동가들은 당이 집권하거나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자를 배출했을 때 펴야 할 정책을 논의하고, 선거운동 방법과 모금 방법 등을 고민한다. 지역위 모임 중 출석률이 가장 높고 당원들의 관심도 가장 뜨거운 모임은 공직 후보를 선정하는 모임이다. 지역위 활동이 최고조에 이를 때는 선거운동 기간이다. 파업 지지, 일반적 정치 쟁점에 대한 토론 등 다른 모든 활동은 기껏해야 부차적이다.

사민주의 정당을 ‘대중적 투쟁 정당’으로 바꾸자는 논의는, 심지어 좌파가 장악한 지역위에서조차 기껏해야 설왕설래 수준에 머물 뿐이다.

이런 선거 지향성은 당내 좌파 활동가들에게 오른쪽 압력을 크게 가한다. 매사가 선거 승리라는 목표에 맞춰 돌아간다. 잠재적 지지 표를 떨어뜨리는 일은 삼가는 것이 불문율이다. 정치적 주장을 가장 활발히 펴는 때는 흔들리는 무당파를 잡으려 할 때다. 논란이 있는 쟁점에는 말을 삼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예컨대, 정의당이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 논란 등에서 말을 아낀 것을 떠올려 보라.

일단 선거를 우선시하게 되면 당면 선거 승리가 모든 것에 앞서는 가치가 된다. 결국 사민주의 정당 내 좌파의 구실이 중요해지는 선거에서 정작 좌파적 정치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다.

사민주의 좌파 활동가가 선거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제 생각에 우리당 지도부는 철저하게 계급연합적이고, 전쟁 문제에서 광적인 애국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며, 한미동맹에 대한 입장부터 이주민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틀려먹었습니다. … 다음주 선거에서 우리 당에 한 표 부탁 드립니다!”

오늘의 열렬한 좌익 투사가 내일의 의원‘님’이 되는 일이 끊이지 않는 데에도 비슷한 논리가 작용한다. 물론 개인의 야욕이나 부패도 영향이 있다. 개인의 영달 때문에 배신한 사람은 사민주의 정당 안에든 밖에든 넘쳐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상이다.

사민주의 정당의 선거 중심 사고 방식에 따르면 국회의원 배지나 장관직은 ‘사회주의를 실현할’ 핵심 도구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공직 자리를 부지하고 그 자리를 이용해 ‘사회를 조금씩 진보적으로 바꾸려 애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된다. 당내 좌파 활동가들은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좌파가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그 자리는 당내 우파에, 심지어 자본가 정당에 돌아갈 것이다.’

최선의 경우에도, 그 좌파는 ‘위로부터 운동을 건설’하는 것, 즉 원외 활동을 핵심 목표로 국회의원이 되려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민주의 정당 좌파가 공직 선거에 출마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당내 좌파 후보라서가 아니라 사민주의 정당 후보라서 표를 던지는 것이다. 꼭 이 후보의 ‘좌파적’ 주장에 동의해서, 혹은 이 후보가 선동하는 운동에 참가하겠다는 뜻에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좌파 국회의원들도 자신의 입장을 숨기고 이런저런 쟁점에서 타협을 하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의석을 잃고 자기가 가진 그나마의 영향력도 잃을 것이라 믿어서다.

사민주의 정당이 역사 속에서 보수적인 면모를 거듭 보이는 것, 당을 좌파적으로 바꾸려 했던 당내 좌파들이 거듭 실패한 것은 그저 과거의 단발적 실수가 아니다. 정당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한 문제고, 의원단만이 아니라 당 전체에 깊이 뿌리내린 문제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당내 좌파가 승리를 거두더라도 곧 그 의미가 퇴색됐다.

사민주의 정당은 노동조합 관료가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선거 승리를 위해 구성된 정당이다. 이것을 혁명적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것은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