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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붉은 2년’(1919~1920)과 공장 점거 운동

1920년 9월, 이탈리아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러시아 혁명을 상징하는 적기와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흑기를 내걸었다. 특히 군대에 무기를 공급하던 금속 노동자들이 도처에서 공장을 점거하자 지배자들은 공포에 질렸다.

토리노의 '붉은 군대' 토리노 공장을 점거한 무장 노동자들. 러시아 혁명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그 상징인 망치와 낫을 그려 넣었다

“점거자들이 기관총을 확보한 것 같다. 그들은 [자동차 기업] 피아트가 군 납품을 위해 만든 탱크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 공장 내 더 급진적 일파는 자신들의 사상이 승리할 때가 가까워졌다고 보고, 노동자들이 막강한 무장력을 앞세워 도시를 침공해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실질적인 공포가 있다.”

지배자들이 말한 ‘더 많은 범죄’는 사회 혁명을 뜻했다. 아닌 게 아니라, 대공장이 밀집한 도시 토리노에서 노동자들은 점거 중 생산한 공산품을 판매하자는 일각의 제안을 뿌리치며 “모든 이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급단위가 이를 관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이 노동자들은 2년여 전 러시아에서 성공한 노동자 혁명에 고무돼 있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직접 교역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쟁취한 것을 더 공고히 할” 수 있다고 봤다.

1919~1920년 ‘붉은 2년’의 배경에는 전년에야 끝난 제1차세계대전이 낳은 심각한 사회 위기와 러시아 혁명이 있었다.

전쟁 후 이탈리아의 위기

전쟁으로 이탈리아인 60만여 명이 목숨을 잃고 50만 명이 영구적 장애를 입었다. 후방도 치솟는 물가와 국가의 가혹한 통제로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고 극도로 빈궁했다. 군납 수요 덕분에 임금이 비교적 높았던 토리노에서도 사망률이 49퍼센트 증가하고 출산율은 29퍼센트나 줄었다.

종전으로 이 고통이 끝나리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물가는 더 올랐고, 생산이 줄어 실업이 늘었다. 식량 수입이 무역 적자의 4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국민 경제는 엉망이었고 많은 이들이 식량난에 허덕였다. 수입에 의존하는 석탄과 선철의 가격도 전쟁 전에 비해 10배 이상 폭등했고 그마저도 부족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고통을 분담한 것은 아니었다. 자본가들은 전쟁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전쟁을 거치며 금속과 제조업 부문 자본들은 덩치가 2.5배로 커졌고 자동차 기업 피아트는 13배나 커졌다! 전쟁이 끝났지만 자본가들은 이윤 감소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행 인수 등 금융 투기에 열을 올려 경제 위기를 더 악화시켰다. 이탈리아 국가는 이런 자본가들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사회 세력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위기를 해결하려고 나섰다. 극우와 제국주의자들은 이탈리아가 승전국임에도 제대로 전리품을 얻지 못했다며 불만이었고 스스로 민병대를 꾸려 군사적 행동에 나섰다. 농촌에서는 정부가 징병 당시 약속한 토지를 제공하지 않은 데 따른 불만이 고조됐고, 노동조건과 식량 부족은 갈수록 악화했다. 이에 항의해서 농업노동자와 농민이 토지를 점거했다. 도시 중간계급도 치솟는 물가와 사회 혼란을 보며 불안해 했다.

식량을 요구하는 상이용사들

그러나 종전 직후 가장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노동계급이었다.

토리노의 혁명적 공장위원회 운동

종전과 함께 노동 규율이 일부 완화되자 파업이 분출했다.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에 고무받아 사회 변화 열망도 엄청났고, 1919년 7월에는 혁명 러시아와 헝가리에 연대하는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토리노의 금속 노동자들이 선봉에 있었다. 노동력 부족 탓에 이 노동자들의 임금은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잘 조직돼 있던 토리노 금속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 요구를 종전 후 가장 먼저 쟁취했다. 그것도 임금 삭감 없이 말이다. 이를 선례 삼아 다른 금속 노동자들과 제지, 인쇄, 화학, 철도 노동자들도 ‘8시간 노동’을 쟁취했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토리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공장위원회 운동이었다.

공장위원회는 현장노동자들의 대표가 관리자들의 일상적 횡포에 맞서는 내부위원회라는 전통에서 시작됐다. 전쟁 이전까지 금속노조는 전체 조합원이 1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다. 그러나 내부위원회는 조합원 여부를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또한 토리노에는 강력한 좌파적 전통도 있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17년 8월 러시아 임시정부 자격으로 토리노를 방문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대표단은 자신을 환영하는 4만 군중이 “레닌 만세!”를 외치는 것을 보고 질겁했다.

종전 후 토리노의 많은 노동자들은 사장들의 탐욕에 맞서고, 치솟는 물가가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들은 공장에서 싸우는 것이 사회주의 운동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사회주의란 ‘사회주의 정당’들이 “정치권”에서 해결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토니오 그람시(우측 사진)와 그 동료들이 1919년에 만든 주간지 〈새 질서〉는 “공장의 내부위원회에 이미 사회주의 사회의 맹아적 형태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현장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의지를 ‘공장위원회’로 결집해 생산을 통제하는 운동으로 발전시키자고 했다.

안토니오 그람시

당시 그람시는 갓 28세로 사회당의 토리노 청년조직의 지도자였지만 그의 주장은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의 주요 결정 사항, 영국과 독일의 노동자 운동의 경험을 진지하게 깊이 탐구한 결과였다. 관련 자료들이 대부분 이탈리아어로 번역이 안 된 때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새 질서〉의 주장은 당시 선진 노동자들의 염원과 공명했고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19년 늦여름부터 피아트 공장들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우후죽순처럼 공장위원회들이 생겨나서 토리노 공장 노동자들을 대부분 포괄했다(15만 명). 공장 노동자들은 그람시와 〈새 질서〉 편집부를 직접 초대해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이 직종 단위로 사용자와 노동력 판매 조건을 놓고 씨름했다면 이제 공장위원회는 전체 공장 경영에 공공연하게 간섭했다. 해당 공장의 노조 지도부도 공장위원회 통제 아래 있었고 노조는 협상 결과를 공장위원회에 보고해야 했다. 공장위원들은 매일 모여 공장 내 사안을 검토하고 필요한 일을 즉시 집행했다.

혁명적 지도력, 개혁주의, 중간주의

그러나 공장위원회는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는 아니었다. 공장위원회는 공장 내부 일을 담당하는 기구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1920년 1월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신, 전화,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지만 공장위원회들은 각자 공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만 몰두했을 뿐 연대 행동에는 노력을 쏟지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위기 수준과 취약한 국가를 고려하면, 노동자들의 염원이 실현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권력 장악에 성공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현장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 활력과 급진화는, 공장을 뛰어넘는 정세를 분석하고 그에 부합하는 요구와 전략, 전술을 제시하는 정치적 지도력과 결합돼야 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공연하게 표방했다. 사회당은 크게 세 경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각 개혁주의, 초좌파주의, 중간주의였다.

개혁주의 경향은 대놓고 혁명을 거부했고 의원단과 핵심적으로 이탈리아 노총(CGL)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토리노의 공장위원회 운동이 노동운동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아나키스트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토리노와 같은 현장노동자들의 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번지지 않도록 애썼다. 토리노 바깥에서 공장 점거가 벌어지면 점거를 풀도록 압력을 넣거나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것을 좌시했다.

그람시는 사회주의자들이 전국의 모든 노조에서 토리노와 비슷한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심적으로, 국가가 공장위원회 운동을 결코 오랫동안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전국적 운동으로 토리노를 방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당 안에는 그람시 외에도 개혁주의 경향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많았다.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이끈 초좌파 경향은 혁명 정당을 말했지만 아래로부터의 투쟁에는 열의 있게 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토리노 공장위원회 운동을 주도한 이들 상당수가 보르디가의 지지자들이었는데도 그는 그 운동을 “경제주의”라고 폄하했다. 이에 그람시는 토리노 공장위원회 운동은 전국적인 위기의 산물이고 이곳의 경제적 투쟁이 정치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반박했다.

가장 강력하고 당 지도부를 구성한 경향은 자친토 세라티가 이끄는 중간주의였다. 이들은 입으로는 개혁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1919년 10월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 강령에 명시했지만 정작 그 강령을 실현할 잠재력이 바로 그 순간에 토리노의 공장위원회 운동에서 움트고 있다는 사실에는 무관심했다. 세라티에게 좌파적 원칙은 투쟁에 개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아래로부터 투쟁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아나키즘적 착각”이라고 봤다.

세라티의 진정한 관심은 당 내 개혁주의 경향과 혁명적 경향을 모두 사회당에 묶어 두는 것이었다. 그는 좌파적 언사로 보르디가나 그람시 지지자들의 탈당을 지연시켰고, 실천 문제에 대한 그의 무능함은 당 내 개혁주의자들이 이를 도맡도록 뒷문을 열어 줬다. 중간주의의 전형적 모습이다.

코민테른은 사회당 지도부에게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출당시키고 당시 이탈리아 남부를 뜨겁게 달구던 농민과의 연대를 진지하게 조직하라고 촉구했지만 세라티는 이를 거절한다.

9월의 전국적 공장 점거 물결

사회당의 이런 무능함 덕분에 노총 지도부 등 개혁주의자들은 토리노 공장위원회 운동과 〈새 질서〉의 영향력이 다른 대도시들로 확대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다.

한편 사용자들은 1920년 3월, 경총을 결성하고 반격을 준비한다. 경총은 결성 대회에서 이런 결의를 밝혔다. “능동적인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유익한 구실을 확신해야 하고, 이것이 흔들리거나 사기저하된 구성원들을 적극 단속할 조직을 갖춰야 한다.”

경총은 개별 사업장 위주의 기존 대응 방식을 뛰어넘고자 중앙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요청하고 첫 공격 대상으로 토리노를 지목한다. 4월에 이탈리아 정부는 병력 5만 명을 동원해서 토리노 노동자들을 포위했다.

토리노와 그 일대 피에몬테주에서는 금속 노동자뿐 아니라 사실상 전 주민들이 참가해서 50만 명이 한 달 가까이 파업 등으로 항의했다. 하지만 군대를 물리치려면 다른 지역들에서 토리노와 같은 수준으로 투쟁이 분출하는 것이 필요했다.

노총 지도부는 끝까지 노동자들을 동원하길 거부했다. 그람시는 토리노의 사회당 좌파를 소집해 밀라노 등지로 소수 사람들을 파견해 연대를 조직하려 했지만 노총 지도부의 통제력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는 노동자 혁명 즈음에 이미 주요 도시들에 도합 25만 당원들이 존재한 덕분에 개혁주의자들의 방해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럴 만한 세력이 없었다.

결국 토리노의 공장위원회 운동은 패배하고 〈새 질서〉 편집부도 분열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 위기는 그해 여름 더 심각해졌다. 금속노조가 몇 달간 벌인 임금 협상이 8월에 최종 결렬됐다. 사용자 측 협상 대표단은 노조를 향해 “전쟁 이후 우리는 내내 당해 왔다. 이제는 당신들이 망신당할 차례다” 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선봉인 토리노에서, 그것도 독보적인 공장위원회 운동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에 의기양양해진 것이다. 노조 지도자들도 더는 임금 인상이 문제가 아니라 노조가 협상 상대로 인정받느냐 마느냐가 걸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태업 지침을 내렸다.

역사를 보면 특정 행동이 애초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있는데 1920년 여름 경총과 노총의 행동도 그랬다.

경총은 노동자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노총 역시 사용자들을 잠시 괴롭혀 협상에서 유리해질 생각으로 태업 지침을 내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관리자들의 노동 규율을 거스르라는 지침 때문에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측·경찰과 충돌했다.

8월 30일, 밀라노에서 직장폐쇄에 대응하며 시작된 공장 점거가 그간의 물가 인상, 사장들을 향한 분노와 결합하면서 불과 며칠 만에 전국적으로 번졌다. 이런 사태는 경총은 물론 노총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금속 부문에서 시작된 공장 점거는 화학, 섬유 부문으로까지 확대돼 9월 10일이 되면 공장 점거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50만 명에 달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 운동을 더는 금속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투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모든 산업 도시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자 정부는 감히 군대를 투입하지 못했다. 게다가 전국에서 금속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자체적으로 생산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곳에서 무기가 노동자들 수중에 쥐어졌다.

반면 정부는 휴전 지대에 군대를 배치해야 했던 탓에 근위병 2만 5000명과 경찰 병력 6만 명이 전부였다. 이 글 도입부에서 소개한 지배자들의 우려는 과장이 아니었다.

누가 봉기를 선동, 조직, 이끌 것인가?

당시 경제 위기의 심각함과 자본가들의 비타협적인 완고함, 이미 임금 인상 요구를 넘어선 노동자들의 요구와 허약한 국가. 당시의 이런 요소들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구체적 목적은 제각각이었다. 분명 토리노에서는 노동자 권력을 요구했고 군사위원회도 결성됐다. 반면,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라 불리는 밀라노의 노동자들은 연대를 나타내는 것에 만족할 뿐 수중에 무기가 얼마나 있는지 파악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 점거 노동자들의 협조 속에 폭약을 회수해 가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열망을 정치적 요구로 정식화하고 그에 맞게 전국 운동을 조율할 조직이 없는 게 문제였다. 토리노에서는 1년 가까이 혁명적 정치로 단련된 공장위원회 운동 경험과 군대에 의한 패배에서 교훈을 이끌어 낸 모종의 지도력이 존재했다. 토리노 노동자들은 군대가 공장으로 쳐들어오면 기꺼이 무기를 들고 방어에 나설 태세가 돼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단지 방어만으로는 불가능하다.밀라노, 제노바의 노동자들은 내부적으로도 정치가 크게 이질적이었고 마땅한 구심도 없었다. 이들 지역의 공장위원회들은 사실상 노조 산하 기구 성격이 더 강했고 그날그날 생산 담당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련한 총리 조반니 졸리티는 사회당이 결코 혁명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봤다. 사장들의 압력이 있었지만, 졸리티는 군대가 먼저 노동자들을 도발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총 지도부는 혁명을 이끌 생각이 없다며 자신들은 물러날 테니 사회당 지도부더러 대신 혁명 운동을 이끌라고 했다. 그러자 사회당을 이끌던 중간주의자들은 그것이 “너무 무거운 책임”이라면서 꽁무니를 뺐다. 혁명을 지도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결국 9월 10일 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노조 지도자들이 노동자 대표 몫으로 공장 경영에 참가한다’는 안과 ‘사회당 지도부에게 사회주의라는 최대강령 실현, 즉 생산수단 사회화를 위해 운동을 이끌도록 요청한다’는 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서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고자 치러진 이 투표는 코미디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둘째 안에 투표한 한 노동자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혁명은 물 건너갔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혁명이란 대의원 대회를 소집해서 할지 말지 먼저 묻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앞세웠지만 진정한 내용은 혁명을 이끌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은 노총 CGL의 대의원대회 이후에도 투쟁을 이어가길 원했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정리했다. “프롤레타리아 지도부도, 부르주아 지도부도 사태를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상대방이 먼저 한 발짝 걸음을 뗄까 봐 겁에 질려 있었다. 둘 다 그러지 않았다.”

전국에 몰아쳤던 공장 점거 운동은 결국 알량한 경영 참여 약속을 받고서 끝났다. 광범한 노동자들은 이것이 패배라는 것을 몇 달 후 사용자들이 다시금 공격에 나섰을 때야 깨달았지만 전국적인 공장 점거 물결은 이미 잦아든 뒤였다. 한편, 자본가들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시스트당을 본격 지원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력이 미미했던 파시스트당은 이후 집권해서 노동자 운동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다.

이탈리아 ‘붉은 2년’은 사회 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에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꿀 잠재력이 있다는 것과, 더 광범한 정세에 조응하면서 개입하는 혁명적 조직의 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또한 혁명적 위기에 부합하지 못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다는 교훈도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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