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이 폭로된 지 한달 반이 지나면서, 지배자들이 한발 물러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6일 검찰은 X파일의 내용 수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초조해진 이건희는 여차하면 처남을 희생시킬 생각까지 하는 듯하다. "비공식적으로 홍석현 대사를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러줄 테니까 이건희 회장을 포기하라는 제안도 있었다."(노회찬 의원) 또, 이건희 자신은 지난 5일 경 몰래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건희를 살리기 위한 노무현과 우파 언론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56.8퍼센트는 "최고 책임자" 이건희를 수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시사저널〉 830  831호 추석 합병호). 84.9퍼센트는 삼성이 "여러 가지 잘못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배자들은 이러한 분노를 깡그리 무시한다면 기성 체제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 9일 삼성 본관 앞 집회를 전후한 운동의 양상은 우리 운동의 상황 또한 여의치 만은 않음을 보여 준다.

9일 집회의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X파일 공대위'가 처음으로 주최한 집회의 규모치고는 참가자들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적어도 1천여 명으로 예상됐던 참가자 수는 실제 4백여 명에 불과했다. 7백여 명이 참가했던 지난 1일 집회 때보다 줄어든 규모였다.

몇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직 노동자들의 참가가 저조했다. 1일 집회 때 5백여 명이 참가했던 기아차 노동자들이 임단협 관련 문제로 집회에 참가하지 못한 탓이 컸다.

민주노동당 대열 역시 1일 집회 때보다 줄었고, 급진 좌파는 〈다함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학생 운동은 두 달 내내 전혀 의미있는 동원을 하지 못했다.

물론, 문제를 운동 참가자들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예컨대, 삼성의 지배적 영향력이 대중 의식에 미치는 모순적 효과 ― '괘씸하지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는 식의 생각 ― 를 고려해야 하고, 경제 위기라는 상황 역시 의식의 급진화를 낳는 한편 사람들의 자신감을 제약하기도 한다. 우파 언론들은 이러한 모순을 매우 집요하게 이용했다.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사의 진전과 운동의 성장 모두가 지지부진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멀어지기 시작했고, 6일 경 검찰이 X파일 내용 수사에 착수하자 어느 정도 관망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점도 집회 규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객관적 상황 탓으로만 돌리는 것 역시 일면적이다. X파일의 폭로가 낳은 기회에 운동과 좌파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응했는지도 따질 필요가 있다.

'X파일 공대위'의 건설 ― 더 광범한 단결을 이루려는 시도 ― 은 분명 운동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공대위'는 X파일 국면 초기의 높은 관심과 분노를 대중 행동으로 연결하는 데 매우 더뎠고, 이 때문에 운동 건설에 가장 효과적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9일 집회 전까지 '공대위' 활동의 초점은 1인 시위와 토론회, 기자 회견, 정당 대표 면담 등이었다. 특히 노회찬 의원의 '떡값 검사' 폭로 직후의 호기를 놓친 것은 아쉽다.

또, '공대위'의 정당 배제 결정은 정작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일부인 민주노동당을 배제함으로써 힘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특별법과 특검법을 둘러싸고 기성 정당 간의 합의를 '중재'하는 데 중심을 둔 일부 시민단체 지도자들은 독자적인 안을 지닌 민주노동당의 참가가 부담스러웠던 듯하다. '공대위'는 9일 집회를 공동주최하자는 민주노동당의 제안마저 거부했다.

정당 배제 결정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항의는 완전히 정당하다. 그러나, 그 실천적 대응은 아쉬움이 남는다. 예컨대, "X파일 문제는 … 시민단체들의 독자성을 보장해 주고, 당이 독자적인 대응을 전개"(〈54차 최고위원회 회의 결과〉)하기로 한 것은 사실상 '공대위'를 주요 시민단체들이 주도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뜻했다.

공동 행동을 하면서도, '공대위' 참가를 위한 '우회로' ― 예컨대, '프런트'를 통한 개입 ― 를 모색해, '공대위'의 이데올로기에 적극 개입하며 적절한 좌파적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또, 현 단계에서는 '독자적인 대응'보다 '공대위'에 대한 개입과 공동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사실, 당 자체의 집중점도 분산돼 있었다. 분명 일부 의원들의 활동은 매우 훌륭했고, 쟁점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당 내 연합 계열 활동가들 ― 더불어 운동 내 민족주의 좌파의 다수 ― 은 X파일 쟁점보다 9월 11일 인천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에 집중했다.

이것은 구체적 정세에서 지배자들의 약한 고리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기계적 태도다. 이 때문에 냉전 우익만이 아니라 지배자 전체를 궁지로 몰 수 있는 사안이 실천에서는 훨씬 더 부차적인 쟁점으로 취급됐다. 당 내 소위 '좌파' 역시 1일 집회 이후 9일 집회에는 사실상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1일 집회에 참가한 기아차 노동자 대열은 전체 집회 참가자들을 크게 고무했고,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충분히 지속?확대되지는 못했다. 거대 기업 삼성에 대한 도전이 삼성 노동자들의 조직화 시도는 물론, 더 광범한 노동자들의 사기와 의식 발전을 고무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활동가들 ― 노조 지도자와 현장 활동가 모두 ― 은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 운동 내 급진 좌파의 태도는 재앙적이었다. 이들은 어이없는 추상적 태도 ― 예컨대, 사회진보연대는 X파일 국면이 "구래의 특권세력"과 다른 "지배세력" 간의 다툼이라며, 'X파일 공대위'를 지지하지 않았다 ― 를 취하며 운동에 기권했다.

조직 노동자 운동과 정치 좌파, 특히 급진 좌파의 수동적 태도는 '공대위' 내에서 주요 시민단체들이 대변하는 우파 개량주의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대중 행동을 부차적 문제로 여기게 만들고, 또 '공대위'가 독립적 운동 건설보다 열우당과의 타협이나 견인에 집중할 위험성을 증대시킨다.

더 일반적으로는 노무현 정부의 위기가 운동에 미치는 효과가 있다. 노무현 정부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심지어 ?우파에게 권력을 양도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운동 내의 많은 이들이 모종의 위기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예컨대, 노회찬 의원은 지난 6일 경남 노사모 초청 창원대 강연에서 한껏 노무현을 비판한 뒤 "노무현 정부는 성공해야 한다"는 모순적 말로 결론을 맺었다. "노무현 정부의 성공은 진보에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이러한 태도로는 노무현 정부에 맞서는 진정한 도전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12~13면 관련 기사 참조.)

노무현의 위기 의식을 좌파가 공유한다면 그 이득은 우파에게 돌아갈 것이다. 또, 운동 내 좌파의 독립성이 동요하면 운동 내 우파의 입지가 강화되기 마련이다.

물러서고 있는 지배자들을 더욱 압박할 수 있는 호기임에도,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당분간 운동이 기대하는 수준의 대중 행동에 이르기는 어려울 듯하다. 9일 집회에서 발표된 '공대위'의 이후 계획 역시 대중 행동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삼성에 맞선 운동이 끝났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또 운동이 이제까지 거둔 성과를 가벼이 여겨서도 안 된다. 상황에 따라 ― 예컨대 X파일 내용의 추가 폭로나 형편없는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한 분노 등 ― 운동은 언제든 다시 부상할 수 있다. 지배자들의 위기와 이전투구 역시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지금이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공대위'에 개입해 이후 상황 변화에 신속히 대응할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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