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삼성 총수 일가는 상속세로 12조 원 이상을 납부하고, 이건희 소유의 미술품 2만 3000여 점과 1조 원을 기부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보수·중도 언론들과 주류 정치인들은 이건희의 ‘사회 환원’ 정신을 칭찬하고 나섰다. 이재용 사면을 위한 밑밥을 주는 것일 테다. 실제 경제 단체들은 이재용 사면을 건의했다.
그러나 상속세는 법적으로 당연히 내야 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동안 총수 일가가 탈법‧불법으로 넘겨 받은 주식으로 막대한 배당을 받아 온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헐값으로 경영권을 넘기고 있는 게 진실이다. 또한 사회로 환원한다는 고가 미술품들도 부유층이 탈세와 비자금 세탁에 유용하게 사용해 온 품목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이 차명계좌의 비자금으로 고가의 미술품들을 사들여 자금을 세탁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들의 ‘환원’ 쇼를 보고 있으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누가 번다는 속담이 절로 떠오른다.

10월 25일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가 사망하자, 우파들과 그 언론들은 이건희에 대해 낯간지러운 찬사를 늘어놓았다. “시대를 앞서 간 혁신가”, “한국 위상 높이는 데 기여한 분”, “반도체 신화” 등등을 운운하며 말이다.

재벌 개혁을 내세우고 있는 문재인과 정부·여당 인사들도 이건희를 조문하며 찬양 대열에 합류했다. 삼성을 비판하는 데 앞장선다는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도 “한국 경제를 오늘날의 수준과 경쟁력으로까지 끌어올린 데는 이 회장의 공로가 컸다”며 이건희의 공을 말했다. 비록 이건희에게 부패, 정경유착, 노동자 탄압 등의 과도 있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파‧중도 세력들은 삼성과 이건희가 한국 경제에 기여한 공이 있다고 평가한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이 이건희의 공 운운하는 것은 그들도 삼성이 제공하는 광고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한몫할 것이다. 실제로 2010년 〈경향신문〉은 전남대 김상봉 교수의 이건희 비판 칼럼을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라며 게재를 거부한 바 있다.

한국 사회 부패의 상징 2015년 삼성노동자 결의대회 참가자가 불법·비리를 저지르고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이건희 일가에게 분노를 표하고 있다 ⓒ이윤선

그러나 오히려 진실은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만들어 낸 부를 이건희 일가가 친일과 독재정권과의 정경유착, 부패로 독식한 것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일제와 유착해 중일전쟁 때 일본군에게 군량미와 청과물 등을 팔아 돈을 벌어들였다. 해방 후에는 적산(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재산)과 미국의 원조 자금이 이병철의 사업 밑천이 됐다. 적산의 상환 기간은 10년 이상이었는데, 당시 물가인상률을 고려하면 이것은 공짜나 다름없었다.

이병철은 자신을 후원하는 독재 정권에 두둑하게 보상했다.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에 자금을 제공했다. 그래서 4·19 혁명에서 부정 축재자 이병철 처단 요구가 울려퍼졌다. 5·16 군부 쿠데타 이후 이병철은 박정희와 유착했고, 박정희는 이병철에게 면죄부를 줬다. 1970년대에 삼성은 박정희 정권과 유착해 중화학공업, 기계, 화학, 전자, 호텔 등으로 크게 사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대된 자본금을 바탕으로 이건희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우파 세력들은 이건희를 반도체 산업을 키운 “선각자”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희가 삼성 회장으로 취임한 1980년대에 앞으로 반도체‧컴퓨터 산업이 확대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삼성뿐 아니라 일본‧대만‧미국 등의 많은 기업이 당시에 반도체‧컴퓨터 산업에 뛰어들었다.

일제, 이승만, 박정희

삼성반도체가 성장한 데는 독재정권의 지원도 한몫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앞세웠던 박정희 정권과 차별화를 하면서, 반도체‧컴퓨터‧통신기‧전자 산업을 중점 육성하는 계획을 짰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재벌들은 과잉‧중복 투자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위기에 빠진 반도체 산업을 구한다며 온갖 특혜를 제공했다. 게다가 운 좋게도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일본 엔화가 초강세가 되자 삼성반도체는 일본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세계적인 개인용컴퓨터(PC) 판매 확대 덕에 사업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과의 유착, 부패는 계속됐다. 이건희는 아홉 차례에 걸쳐 모두 250억 원을 노태우 정권에 헌납했다. 2002년 대선에서 삼성이 대선 후보들에게 뿌린 돈만 380억 원이 넘는다.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에 340억 원을 제공한 것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당시 민주당 노무현 선본에도 30억 원이 흘러 들어갔다.

삼성과 주류 정당들, 검찰이 유착돼 있음은 2005년 이른바 ‘삼성 X파일’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이건희는 무혐의로 풀려났고, 오히려 이를 폭로한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했다. 또, 삼성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이 오랫동안 법원과 검찰 등에 자금을 뿌리면서 “장학생”을 키워 왔음을 폭로했다.

이렇게 쌓아올린 부와 권력은 불법·탈법을 동원해 헐값으로 자식들에게 세습됐다. 이건희가 삼성을 물려받을 때 낸 상속세는 150억 원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건희는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인수 등을 통해 몇 푼 들이지 않고 삼성그룹의 지배권을 이재용에게 넘겼다.

이건희가 죽자 이재용 등이 낼 상속세가 10조 원이 넘는다는 보도들이 나오고 있다. 우파 세력 일각에서는 상속세를 감면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한다. 그러나 2014년 이건희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만도 이재용을 비롯한 삼성 사주 일가가 받은 배당금이 2조 8000억 원에 이른다는 점을 보면, 오히려 탈법‧불법으로 삼성 경영권을 헐값으로 넘기고 있는 게 진실이다. 게다가 이재용은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더 손쉽게 하려고 박근혜·최순실 등에게 뇌물을 줬고, 이와 관련된 증거를 조작·은폐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이 ‘무노조 경영’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쥐어짜 온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재용이 ‘무노조 경영’ 포기를 얘기하자 이게 기사화됐을 정도다. 그러나 삼성전자서비스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는 여전히 열악하다. 또, 일흔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 뇌종양 등을 얻어 목숨을 잃었는데도 삼성은 책임 회피에 급급해 왔다.

요컨대, 이건희 일가의 막대한 부에는 정경유착과 노동자 착취·억압이 아로새겨져 있다.

재벌 개혁은 공상이고 아래로부터 투쟁과 생산수단 접수만이 현실적이다

이건희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이 기회에 재벌 개혁의 고삐를 조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정부‧여당은 ‘공정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 개정, 금융그룹통합감독법 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공정경제 3법은 재벌 총수 일가의 권한을 일부 제한하고 재벌 그룹의 소유 구조를 개편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진보적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 재벌개혁론자들은 여러 주주들이 지분을 나눠 갖는 KT를 모범적인 지배 구조라며 추켜세웠다. 그러나 KT는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동자 수만 명을 해고했고,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실적 압박으로 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졌다. 재벌 개혁은 수만 명의 금융 자산가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노동자들의 처지라는 면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의 재벌 개혁이 매우 미미할 것이라는 점은 정부가 이재용을 구속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를 계속 내보내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말로는 ‘적폐 청산’, ‘재벌 개혁’을 내세웠지만 말이다. 삼성 이재용, 롯데 신동빈 등은 모두 문재인 정부 하에서 풀려났고, 정부가 기업주들을 초청할 때마다 초청받는 등 오히려 국정 동반자 대접을 받고 있다.

사실 재벌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과제가 공상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더 소수에게 자본이 집중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성과 같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의 근본 동력이 “자본의 집중과 집적”을 낳는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역대 정부들이 이러저러한 재벌 개혁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사소한 재벌 개혁에도 실패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도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에 재벌을 해체했지만 곧 새로운 형태의 기업 집단이 등장했다.

정의당‧진보당‧민주노총 등도 이건희 사망 논평에서 또다시 재벌 개혁을 주장했다. 물론 재벌들이 매년 수십조 원씩 쌓고 있는 사내유보금을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임금을 지키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정당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이 재벌 개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표적을 설정하는 것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재벌뿐 아니라 중소기업들과도 협력해 기업 살리기에 수백조 원을 투입하면서도, 노동자들에게는 해고, 임금 삭감 등 노동조건 후퇴를 압박하고 있다. 당장 민주노총이 요구하고 있는 전국민고용보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전태일 3법 제·개정 등을 달성하려면 재벌뿐 아니라 중소기업과도 맞서 싸우며 체제 자체를 공격해야 한다.

지금 같은 경제 대침체기에는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혁명적 또는 혁명에 조금 못 미치는 거대한 노동자 투쟁으로 지배계급을 압박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재벌에 고용된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해서 자신의 사용자에 맞서고, 다른 기업과 산업의 수많은 노동자들도 그들에게 연대하는 식으로 노동자들이 부문을 초월해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이를 통해 과감하게 자본주의 국가 및 시스템과 대결해야 한다.

이 점에서 진보당‧민주노총이 이번 논평에서 이건희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성장시킨 공을 인정한 것이나, 정의당‧민주노총이 이재용의 삼성이 재벌개혁을 자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삼성을 비롯한 기업주들에 맞서 노동자 계급의식을 고무하는 데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재벌 표적론을 내세워, 체제 자체에 대한 공격을 회피하고 특히 노동계급의 고유한 투쟁 방법(특히, 점거 파업)을 사용하는 데 소극적이어서는 재벌들로부터 양보를 얻는 것도 어렵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