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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반대한다

문재인 정부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오는 11월 9일까지가 의견 수렴 기간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란 죄질이 특별히 나쁜 반사회적 범죄를 저질렀거나 다수의 약자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 또는 가해 기업이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다.(현재 하도급법, 제조물 책임법, 독점규제법 등 약 20개 법률에 도입돼 있다.)

흔히 환경 파괴나 산업재해, 대형 참사 예방 대책의 하나로 다뤄진다. 미국의 담배회사들이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은 것 때문에 수십조 원 규모의 천문학적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던 것이 그 사례다. 21대 국회에서는 정의당이 대표 발의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항의 속에서 이 제도에 대한 관심과 지지도 커졌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이 있는 대상을 상거래 활동 전반으로 확대하고 최대 5배의 손배액을 물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다른 법률의 손해배상 책임 조항보다 우선 적용된다.

언론 개혁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대상에 상법상 회사인 언론사의 고의 또는 중과실(부주의)에 의한 허위보도(가짜뉴스)를 포함하기로 해 논란을 낳고 있다. “최근 범람하는 가짜뉴스, 허위정보 등을 이용하여 사익을 추구하는 위법행위에 대한 현실적인 책임추궁 절차나 억제책이 미비”하기 때문에 언론에게도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도 언론의 자유가 일부 침해되는 부작용이 있더라도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자체는 도입되는 게 맞다는 주장이 나온다. ‘아님 말고’식 보도를 일삼는 언론에 사회적 책임을 물을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언론 개혁은 수십 년 동안 범진보 진영의 요구였다. 사람들 사이에는 이제껏 언론이 보여 온 무책임성, 편파성, 부패상 때문에 깊디 깊은 불신이 있다. 그래서 진보진영에서도 눈에 띄는 반대는 없다.

그런데 당사자인 언론 3단체(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신문협회)는 강하게 반발한다. 권력층에 대한 보도가 위축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악의적 허위보도라는 모호한 잣대... 판단 주체가 얼마든지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 비판적인 보도를 악의적 보도로 규정한 후 언론 탄압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매우 크다.”

〈미디어오늘〉과 리서치뷰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대중의 반응도 갈린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찬성 답변은 51퍼센트이지만, 이 제도가 ‘언론의 권력 비판·감시 기능을 제약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가 36퍼센트, ‘동의한다’가 34퍼센트로 팽팽했다. ‘모르겠다’는 반응도 30퍼센트였다.

문재인이 언론 개혁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런데 사용자가 안전이나 환경을 해치거나 사기를 저지른 경우와 달리, 언론에 대한 ‘악의적 허위 보도’(가짜뉴스) 규정은 그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이전 정부는 물론이고, 특히 민주당이 권력층 부패 의혹 보도 자체를 가짜뉴스라는 식으로 공격을 해놓은 탓에 더욱 그렇다.

실제로 언론에 대한 법적 절차나 명예훼손 고소는 권력자들이 자신에 대한 의혹 보도를 상대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주류 언론에서 흔히 왜곡·비방의 대상의 되는 것은 노동자들이나 성소수자, 이주민, 좌파 정치인이나 활동가들인데 말이다. 막강한 권력자가 명예훼손 피해를 호소하는 당사자일 경우 관련 기관이나 재판부의 판단 과정에 유·무형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컨대, 2014년 박근혜는 세계일보 기자가 청와대 비선 실세 동향에 관한 감찰 보고서(일명 ‘정윤회 문건’)를 단독 입수해 폭로하자 “찌라시에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며 기자를 고소해 수천만 원의 배상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 일본의 한국 주재 특파원까지 고소했다. 검찰이 이같은 공격에 앞장섰다.

그러나 의혹 보도 내용이 사실과 가깝다는 것이 갈수록 확인됐고, 2016년 정권 퇴진 대중 운동이 분출하자 박근혜·최순실은 옥살이를 하게 됐다. 결국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고소당한 기자를 무혐의 처분하며 “공익에 관한 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2019년 4월 주요 언론단체장들과 환담하는 문재인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인들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청와대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다른가? 올해 추미애 아들의 군 탈영 무마 특혜 문제는 엄청나게 많은 의혹 보도가 나왔고, 그에 대한 의문들이 제대로 해소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검찰은 정권 눈치를 보고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윤미향 전 의원과 정의연도 검찰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몇몇 오보를 찍어서 고소했다. 그리고는 의혹 보도 전체가 오보인 듯 언론플레이를 했다. 검찰의 축소 기소만으로도 혐의가 중대한데 말이다. 실은 둘 모두 조국 사태에서 조국과 친문진영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아예 기소를 면한 추미애의 경우에 검찰이 공식적으로 불기소했기 때문에 그간 나온 의혹 보도는 모두 ‘악의적 허위 보도’로 보고 처벌해야 할까? 검찰총장을 부하라고 부르는 법무부장관 아래서 검찰의 불기소를 비판하는 보도는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판·검사들도 자신들의 권력이 어느 정도는 공명정대하게 보여야 더 안정적으로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러려고 하지만 결국은 체제의 질서를 지키는 기관의 일원이다. 그들도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중립적이지 않다.

물론 필요한 경우에 피억압자들도 언론에 대해 사법적 절차를 이용할 수 있다. 예컨대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를 모독했을 때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법에 호소했다. 박유하는 제국주의 편에서 활개치고 주류 언론들을 더 잘 이용할 수 있었던 반면, 피해자들은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언론 일반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화하는 것으로는 언론을 더 ‘중립적’으로 또는 피억압 대중에 유리하게 개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압도 다수 언론은 기업 광고에 의존하는 또 하나의 기업이다. 주류 지향 언론사들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제도이자 기관이다. 그래서 비록 언론마다 정치적 논조가 다르고 때때로 정의감 있는 일부 개별 기자들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권력자들의 비리를 캐내기도 하지만, 근본에선 어디까지나 자본가들의 관심사에 더 큰 관심을 쏟는 친자본주의 매체의 틀 안에 있게 된다.

따라서 체제 수호자인 국가기관에게 형제 격인 주류 언론을 개혁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국가는 그 통제권을 체제·정부 비판적인 좌파 매체들을 향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 사례들을 보면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해야 한다

그동안 진보 진영은 산업재해 피해 구제나 재벌개혁 요구의 일환 등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지지해 왔기 때문에, 이번 상법 개정안에 대해 우선 환영하는 분위기가 우세한 듯하다. 그러면서 정부가 정면 겨냥하고 있는 언론 문제는 슬쩍 침묵하는 듯하다.

예컨대 정의당 김종철 대표는 선임대변인이던 시절에 언론의 부적절한 보도들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하면서 언론에 추가적 징벌을 도입하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표했지만 이번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아직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이유로 언론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론에 대한 부분은 삭제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특히, 지금 이 개정안이 추진되는 맥락을 봐야 한다. 정부를 향한 의혹 보도가 쏟아지는 와중에 문재인 정부와 추미애가 추진하는 언론 처벌 강화는 옵티머스·라임펀드 등 청와대 연루 부패 의혹 보도를 위축시키거나 통제하는 것으로 이어져, 개혁은커녕 또 다른 적폐가 될 공산이 매우 크다.

자본주의 언론의 힘과 영향력에 맞서는 싸움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의 일부가 돼야 한다. 그런 투쟁은 체제의 핵심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의 힘과 판단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아래로부터 건설돼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