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는 행동가였지만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엥겔스는 카를 마르크스가 세 권의 《자본론》을 집필하는 데 필요한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신이 증오하는 공장주 일을 했다.

1848년 독일 쾰른 혁명 속에서 〈신라인 신문〉을 발행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렇듯 50년 동안 지속된 혁명적 사회주의와 노동자 투쟁에 대한 헌신, 마르크스에 대한 엄청난 개인적 헌신, 이 두 가지가 엥겔스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러나 엥겔스는 결코 마르크스에 의존적이지 않았다. 최초의 노동자 정부인 파리코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던 1871년에 엥겔스는 자기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제 생각이 거의 30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아실 테고, 그 사실이 당신에게 놀랄 일도 아닐 것입니다. … 마르크스가 여기에 없었더라도, 그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별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계급을 배신한 혁명가

엥겔스는 1820년 11월 28일 독일 라인란트의 소도시 바르멘(오늘날 부퍼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장주 집안의 장남이었다. 젊은 엥겔스는 정치와 무신론 때문에 아버지와 계속 불화를 빚었다.

엥겔스는 공장 지대로 바뀌고 있는 지역에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엥겔스는 어릴 때부터 공장 시스템의 실체를 보며 자랐다.

엥겔스의 청년 시절 독일에서는 프로이센의 독재에 맞서는 운동들이 태동하고 있었다. 엥겔스도 그 운동과 사상의 지지자였고, 자유주의적인 독일 민족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이 무렵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1830년 7월 입헌 군주제를 수립한 프랑스 혁명에 고무돼 있었다. 1830년 혁명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아주 흐릿한 그림자였다. 그럼에도 독일의 청년들은 1830년 혁명을 보고 알게 된 자유를 찾고자 했다. 이런 열망이 종종 철학적 용어로 표현됐다. 마르크스는 철학 사상의 우위를 독일의 경제적 후진성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여겼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엥겔스도 이런 지적 환경의 산물이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철학자 헤겔의 사상에 끌렸다. 헤겔은 우주가 끊임없는 발전과 변화의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많은 헤겔 지지자들은 기성 제도, 즉 프로이센 국가와 군주에 맞선 투쟁이 사회 발전의 불가피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엥겔스는 청년 헤겔학파에 참여했고, 그 뒤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노동계급 중심성을 이해하다

1842년 11월에 가족 회사인 ‘에르멘 앤드 엥겔스’ 사의 영국 지사에서 일하러 맨체스터에 갔을 때, 엥겔스는 이미 좌파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공업 경제이자 산업혁명의 무대였다. 영국 노동계급도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고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조직돼 있었다. 엥겔스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차티스트 총파업이 벌어진 직후였다. 차티스트들은 임금 삭감에 반대하고 남성 보통선거권을 요구했다. 이 총파업은 최종 패배했지만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맨체스터는 랭카셔·체셔와 함께 파업의 중심지였다. 엥겔스는 차티스트들을 만났다. 또, 메리 번스라는 아일랜드 여성을 만나 그녀가 1863년에 죽을 때까지 사랑하게 된다. 메리는 노동계급이었으며 차티스트 운동에 참여했다. 19세기 당시 두 사람의 엄청난 계급적 차이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다. 엥겔스는 메리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메리가 41살의 나이에 죽었을 때 엥겔스는 “내 젊음의 마지막 흔적을 그녀와 함께 묻은 것 같다”고 마르크스에게 편지를 썼다. 메리가 죽은 뒤 엥겔스는 메리의 동생 리지와 사귀었다. 부인이 죽으면 ‘혼기’가 지난 여동생과 살림을 합치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에 꽤 흔한 관행이었다. 리지는 정치적이었고 공산주의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대의에 동의했다. 엥겔스는 1878년 리지의 임종 자리에서 그녀와 결혼했다.

청년 엥겔스
엥겔스는 영국을 여행하며 노동자들과 대화하고 공식 통계를 조사해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을 썼다. 엥겔스의 첫 번째 책으로 대단한 책이다. 엥겔스는 이 책을 “영국 노동계급”에게 바쳤다. 혁명적 변화의 주체인 노동계급에 대한 평생의 헌신이 시작됐다.

엥겔스는 자신과 마르크스의 정치적·지적 관계를 말하면서 “[자신의] 운명은 부차적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부차적 위치”가 아니었다. 그는 독자적인 혁명적 사상가였다. 1844년에 마르크스와 친교를 나누기 시작하던 때 엥겔스는 이미 자신의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인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을 쓰고 있었다.

이 책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죽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이런 비참한 상황이 어떻게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했다.

엥겔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서 출발했다. 산업혁명이 어떻게 낡은 노동 방식을 바꿔 임금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을 창출하는지를 고찰했다. 기계를 도입해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로 발전한 영국에서 새로운 노동계급이 인구의 거대한 부분이 됐다.

엥겔스는 이 도시들에서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했다. 당대 언론 보도, 공식 조사, 심지어 초기 맨체스터 빈민촌의 도표를 이용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식습관도 서술했다.

엥겔스가 서술한 이런 비참함의 근저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 있다.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되도록 적게 임금을 주려고 하는 반면, 노동자들을 더 일하도록 쥐어짠다. 엥겔스는 공장 소유주 계급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나는 영국 부르주아지처럼 몹시 타락하고 이기적이며 구제불능의 저질이며 그 내부가 썩어 진보가 불가능한 계급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은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위대한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싸우며 자신들의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을 지키고자 했다. 이 운동 덕분에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들 간 경쟁을 낳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이 고용주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하고 결집하기도 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1844년 여름 파리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만났다. 두 해 전에도 둘은 잠깐 만난 적이 있었지만, 두 사람의 평생 협력이 시작된 것은 1844년부터였다. 이때 엥겔스는 이미 마르크스보다 경제학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고, 철학과 공산주의 정치에 대해서도 상당한 배경 지식을 갖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전기 작가 프란츠 메링은 경제학을 “처음 제공한 쪽은 엥겔스이고, 받은 쪽은 마르크스”였다고 썼다.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에 바탕을 두고 투쟁과 시대의 요구를 이해하게 됐다면, 엥겔스는 영국 산업에 바탕을 두고 그렇게 했다.

마르크스와 협력해 역사유물론의 기초를 놓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첫 공저는 1844년에 쓴 《신성가족》이었다. 엥겔스의 세계관을 경제결정론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곡해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둘 다 정치나 이데올로기가 역사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엥겔스는 《신성가족》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막대한 부를 소유하지도, 투쟁을 벌이지도 않는다. 부를 소유하고 투쟁을 벌이는 것은 현실의 인간이다. ⋯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 엥겔스는 생애 마지막까지 이런 세계관을 유지했다.(더 자세한 것은 이원웅, ‘변혁당 이재유 씨의 엥겔스 곡해에 대한 반박’, 〈노동자 연대〉 314호를 보시오.)

1846년에 두 사람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가장 폭넓게 설명한 책이었다. 그 책은 비록 완성되지도 않았고 두 사람의 생전에 출판되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당시 철학을 어떻게 생각하고 다뤘는지를 보여 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특정한 역사적 시대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관념이 아니라 이런 관념들이 생겨나게 한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출발점은 계급 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고 이런 사회 변화 과정에서 사람들의 관념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역사의 진보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인간이 실제로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만큼 인간도 환경을 만든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계급 사회에서 부를 소유한 계급 — 지배계급 — 이 그 사회의 사상도 통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부를 생산하는 수단과 그런 부의 통제를 정당화하는 사상의 생산도 통제한다. 반대로, 노동계급은 재산이 없다. 자신의 노동으로부터도 소외됐다. 노동계급이 혁명을 만들어 생산수단을 집단적으로 통제할 때만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적 계급이지만, 자신이 생산하는 부를 통제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혁명을 만들어야 한다. 혁명을 만드는 과정에서만 프롤레타리아는 온전히 혁명적이 되거나 ‘공산주의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

1848년 혁명에 참여하다

공산주의 사상을 토론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사상에 기반한 조직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들은 1846년에 ‘공산주의자통신위원회’를 만들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엥겔스는 1846년 8월 파리로 가서(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추방됐다) 의인동맹 내 독일 장인들을 조직하고 프랑스 노동자 운동과 얼마간 접점을 만들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노동자들 속에서 조직을 건설하려면 운동 내 다른 사회주의 경향들과 예리하게 논쟁해야 했다. 두 사람은 카를 그륀의 추종자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을 공산주의 사상의 경쟁자로 보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말은 급진적으로 하지만, 자본주의 내의 두 주요 계급 간 근본적 적대를 경시하고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선언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을 독일의 지체된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산물로 봤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사회주의가 실질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7년 6월 의인동맹 런던 대회에서 단체명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꾸고, 슬로건도 ‘모든 사람들은 형제이다’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런던 대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강령 초안을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가장 유명한 공동 작품이자 그들의 정치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진술 중 하나로 남게 된 《공산당 선언》이다. 그 초안은 엥겔스가 쓴 “공산주의의 원리”였다. “공산주의의 원리”는 문답 형태로 쓰인 아주 짧고 간결한 소책자로, 엥겔스의 명쾌한 문체를 보여 준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원리”에 기초해 1848년 초 독일어로 출판된 최종 문서를 작성했다.

“공산주의의 원리”와 《공산당 선언》은 임박한 혁명을 기대하면서 쓰였다. 경제 상황과 정치적 불만이 심각해지는 조짐들이 나타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발전시킨 자본주의 분석 덕분에 혁명의 발생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1847년에 경제 위기가 식량 폭동으로 이어졌고, 1848년 2월 파리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는 권좌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도망쳤고 제헌의회가 소집됐다.

혁명은 유럽 대륙으로 확산됐다. 헝가리에서는 러요시 코슈트가 이끄는 민족주의자들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맞서 독립 전쟁을 벌여 민주적 의회를 수립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오늘날의 유럽 10개국 국토의 전부나 일부가 포함되는 지역에서 쓰러지지 않은 정부는 단 하나도 없었다고 썼다. 엥겔스는 이런 사건들의 목격자이자 참가자였다.

1848년 6월 파리 봉기

프랑스에서는 6월에 급진적 노동자들과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두 세력은 2월 혁명 때는 같은 편이었다. 파리 노동자 6만 명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의회에 맞섰다. 과거의 부르주아 혁명들과 달리 이제는 노동계급이 상당한 세력을 이뤄, 흔히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뛰어넘는 독자적 요구를 제기하며 경제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위는 진압당했고 약 3000명이 살해됐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독일 부르주아지의 소심함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4월에 독일 라인란트의 쾰른으로 돌아왔다. 쾰른은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두 사람 모두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쾰른 공안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됐다. 엥겔스는 프로이센의 침공에 맞선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1849년 혁명이 패배해 스위스로 피신하기 전까지 네 번의 전투에 참가한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 뒤에도 엥겔스는 군사 전략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련 글도 많이 썼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6월부터 〈신라인 신문〉을 발행했다. 신문의 부제가 ‘민주주의의 기관지’였다. 쾰른은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지만,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그곳을 점령했을 때부터 내려 온 언론 자유법들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을 민주주의 운동의 극좌파로 여겼다. 그들은 주된 대립이 반동적 봉건 세력과 새로운 민주주의 세력 사이에 존재한다고 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래 전부터 독일 부르주아지를 경멸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재산이나 삶을 위태롭게 할 태세가 돼 있지 않은 채 혁명의 열매만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혁명이 벌어지자 독일 부르주아지가 옛 질서보다 신흥 노동계급을 더 두려워한다는 점이 점점 분명해졌다. 그들은 소심했고,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파리의 사태는 유럽 전역에 혁명을 고무했지만, 그중에서도 독일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혁명적 열정이 고양됐다. 독일의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프랑스 2월 혁명의 혜택을 봤다. 왜냐하면 독일 지배자들이 중대한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도 두려움에 떨며 베를린 의회 신설, 검열 폐지, 독일 통일 약속 등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파리의 6월 사태를 보며 소심함을 드러냈는데, 대중에게 너무 많이 양보하면 ‘무정부’ 상태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독일의 안정과 질서를 원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6월 봉기 앞에서 독일 운동은 분열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신라인 신문〉은 노동계급 투사들을 전적으로 지지한 반면, ‘온건한’ 민주주의자들은 노동계급 투사들을 반대하고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했다.

9월에 프로이센이 쾰른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저명한 연설가들과 조직자들 여러 명이 체포됐다. 엥겔스는 경찰 소환을 피해 고향 바르멘을 떠나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갔다. 엥겔스 지명 수배 전단이 붙었다. 1849년 1월 말에 엥겔스는 자신이 불기소됐다는 얘기를 듣고 독일로 돌아갔다. 혁명의 여파는 끝나지 않았지만 현저히 약해지고 있었다. 1849년 5월 초 봉기가 일어났지만 결국 패배했다. 〈신라인 신문〉은 폐간됐고 독일 혁명의 종말이 다가왔다. 이때 엥겔스는 혁명의 최후 보루인 팔츠에 있었다.

연속혁명

이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과 그 혁명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1848년 혁명은 노동자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 독일 같은 나라들에서 자유주의적 자본가와 의사·변호사 같은 중간계급이 혁명의 과정을 결정했다는 뜻이다. 물론 가난한 농민 계급, 장인, 신흥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1848년 혁명과 초창기 부르주아 혁명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처음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노동계급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848년에 노동계급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성장하는 중요한 세력이었고, 독일에서도 점차 그러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원했지만, 노동계급이 정치 무대에서 능동적 세력이 되자 매우 겁을 먹고 진지하게 투쟁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민주주의자들과 부르주아지 내 다양한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뜨뜻미지근한 혁명가들이었고, 최종 대결에서 발을 빼고 옛 질서와 타협하는 편을 택했다고 봤다.

엥겔스는 16세기 독일 농민들의 무장봉기를 분석한 《독일 농민 전쟁》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엥겔스는 1525년의 사건들과 1848∼1849년 혁명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엥겔스는 마르틴 루터가 1848년 혁명 때 부르주아지와 비슷한 구실을 했다고 썼다. 반면, 농민들의 지도자 토마스 뮌처는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했지만 농민군의 무기가 형편없어 패배했다. 엥겔스는 전쟁의 양편이 외견상 종교적 관념 때문에 싸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계급들이 형성되고 있었고 그들이 서로 싸운 데에는 물질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 농민 전쟁》은 역사유물론을 체계적으로 적용한 역사서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의 뒤를 이어야 하고, 노동자 권력을 쟁취할 때까지 ‘연속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 세기 뒤에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이 분석을 확장했다. 트로츠키는 반(半)봉건적인 후진적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혁명을 만들려면 유약하고 동요하는 부르주아지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생 이어지는 망명 생활을 시작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평생 이어질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1850년 엥겔스는 자신에게 엄청난 개인적 희생을 요구하게 될 결심을 했다. 맨체스터에 있는 가족 회사 에르멘 앤드 엥겔스 사에서 다시 일하기로 한 것이다. 엥겔스가 번 수입의 대부분은 마르크스와 그 가족의 부양에 쓰였다. 1850년부터 33년 뒤에 마르크스가 죽을 때까지 엥겔스가 스스로 짊어진 과제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개인적·정치적 애정에 더해, 그의 가족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난을 겪고 있어서 엥겔스는 그런 결심을 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가족을 극빈 상태에서 구하고, 마르크스가 이론적 연구를 발전시키도록 했다. 엥겔스 덕분에 마르크스 가족은 런던 북부로 이사 갔고,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게 됐으며, 딸들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엥겔스는 에르멘 앤드 엥겔스 사에서 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마르크스 후원을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1850년대 혁명적 물결이 끝난 뒤, 자본주의는 정치적으로 안정화되고 거대한 경제 팽창으로 이전에는 미치지 못했던 세계의 구석구석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반동이 유럽의 대부분에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나폴레옹 3세가 독재를 수립했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 군주와 정치인 비스마르크(반동적인 귀족 융커 계급의 대표)의 동맹이 중앙집권적이고 공업화된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며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독일 통일로 나아갔다. 영국과 그 제국은 국내외적으로 유례없이 팽창했다. 한때 전투적이었던 노동계급은 긴 사회적 평화와 상대적 번영의 시기로 들어갔다. 반동과 노동계급 패배의 시기에 종종 그렇듯이, 좌파는 내향적이고 종파적인 다툼으로 날을 지샜다. 이런 시기는 정치 선동을 하기가 꽤 어려웠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연구에 몰두했다. 1867년 《자본론》 1권이 출간됐다.

영국의 계급투쟁이 썰물 상태였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60년대 초 벌어진 두 가지 중요한 사건에 주목했다 — 1861년 러시아의 농노 해방과 미국의 남북 전쟁.

미국 내전에서 영국 지배계급은 남부 연합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국 경제에 매우 중요했던 면화를 남부 주들에서 사들였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자들은 압도적으로 노예제에 반대했고, 북부의 승리를 지지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열렬하게 북부 편을 들었다. 북부의 승리가 더 산업화되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사회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내전과 북부의 승리는 1776년 영국 식민주의에 반대하며 시작된 부르주아 혁명을 마침내 완성했다. 한편,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북부가 승리할지 어떨지를 두고 논쟁했다. 리 장군이 지휘하는 남부군의 우월한 군사 전술 때문에 엥겔스는 때때로 북부의 패배를 예측했다. 반면, 마르크스는 북부군의 승리를 예측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과 파리코뮌의 교훈

1860년대 들어 영국 노동계급 사이에서 국제주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영국 노동자들은 미국 내전에서 북부 편을 들고, 1861년 가리발디가 이끄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지지하고, 폴란드의 민주주의 투쟁을 지지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 처음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 조직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다.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가 1864년에 창립되고, 1865년에 첫 대회가 열렸다. 제1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발전과 존속에서 마르크스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인터내셔널은 매우 다른 정치 경향들의 짬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운동이 주축이었다. 영국인 지지자들은 주로 런던노동조합회의 쪽이었다. 그 지도자들의 정치는 마르크스의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인터내셔널을 만든 주된 목적 하나는 영국에서 노동조합을 약화시키는 외국인의 파업 파괴 활동을 막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 운동에 열심히 연대했다. 프랑스인들은 프루동 추종자들이었고, 장인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이들은 소생산으로 돌아가자는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그래서 국가에 적대적이었지만, 파업과 혁명에도 반대했다.

프루동

마르크스는 런던에 본부를 둔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개막 연설문과 규약을 작성했다. 이때 엥겔스는 맨체스터에 있었는데, 인터내셔널 활동에 일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어도 정치와 국제 상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전쟁을 벌이자 엥겔스는 그 전쟁에 관해 글을 여러 편 썼다. 이상하게도 프로이센이 패배할 것이라고 잘못 예측했지만 말이다.

또, 엥겔스는 아일랜드 상황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1860년대 후반에 아일랜드는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페니안 운동)이 영국 국가에 대항해 무장 저항을 벌였고, 이 투쟁이 영국 국내로 번져 영국 지배계급에 반대하는 투쟁이 벌어졌다. 맨체스터와 런던 같은 도시들에 거주하던 많은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그 투쟁을 지지했다. 엥겔스는 아일랜드의 역사를 쓰고 싶어했고, 1869년에 리지와 엘리너 마르크스와 함께 그 나라를 방문했다. 그가 마침내 에르멘 앤드 엥겔스 사를 그만둔 뒤였다. 그는 귀국길에 마르크스에게 편지를 보내, “아일랜드의 역사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 종속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 줬다네” 하고 썼다. 그러나 이 책은 완성되지 못했다. 일부가 엥겔스 사후에 그의 서류더미 속에서 발견됐다.

당시 유럽의 정치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유럽 대륙의 두 강국인 프랑스와 독일이 1870년 가을에 전쟁을 벌였다. 엥겔스는 처음에 독일 편을 들었다. 독일의 팽창이 프랑스 황제를 패퇴시키고 반동적 러시아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배한 직후 엥겔스는 유럽 노동자들의 주된 위협이 독일의 팽창주의라고 생각했다.

1870∼1871년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건들 때문에 인터내셔널 내부의 정치적 차이가 벌어졌다.

1870년 9월 프랑스 군대가 패배하고 나폴레옹 3세가 타도되면서 프랑스는 정치적 격변기로 들어갔다. 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어떤 공화국이냐가 문제가 됐다. 제2공화국처럼 대자본의 이해에 근거한 지배가 계속되는 공화국인가? 아니면 노동자와 소상인들을 대표하는 정부인가? 다양한 지역 봉기들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혁명적 정부의 가능성이 의제에 올랐다.

10월부터 파리는 프로이센 점령군에게 포위돼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도시에서 급진화가 있었다. 새해 들어 급진화가 더 거세졌다. 프랑스 정부가 프로이센과 평화 조약을 맺은 뒤 포위가 풀렸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로 복귀하기를 거부하며 전투적인 대중이 무장해제를 할 때까지 베르사유에 머물렀다.

최초의 노동자 국가

3월 18일 혁명이 일어났고, 파리코뮌이 수립됐다. 파리코뮌은 최초로 수립된 노동계급의 혁명적 정부였다. 여성들도 파리코뮌을 군사적으로 방어하는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코뮌을 노동자 국가의 모델로 봤다. 모든 대표들이 선출되고 언제든지 소환이 가능했다. 모든 노동 인구가 정치에 참가해 결정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옛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와 경찰을 해체하고 무장한 대중이 이를 대체했다는 점일 것이다.

파리 코뮌을 군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여성 참가자들

그러나 파리코뮌은 단명했다. 두 달 만에 파리코뮌은 다시 포위됐다. 이번에는 베르사유 정부의 군대가 포위했다. 파리코뮌은 일주일 동안 유혈낭자한 전투를 치른 뒤 붕괴했다. 3만 명이 군대의 총검에 살해됐다. 파리코뮌은 재산을 소유한 남성(과 여성)에 의해 가장 끔찍하게 파괴됐다. 파리코뮌이 몰락한 뒤 부유층 여성들이 즐겼던 습관 하나는 코뮌 지지자들 처형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파리코뮌의 마지막 순간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위임을 받아 《프랑스 내전》을 썼다. 5월 30일 총평의회 회의에서 한 연설을 소책자로 출판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견해를 밝혔고, 파리코뮌의 분쇄가 보여 준 프랑스 부르주아지뿐 아니라 다른 나라 부르주아지의 근본적인 계급 본능을 폭로했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이 질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였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이 교육 기회를 보장받고 교육은 종교와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웠다. 공무원들이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을 받았다. (치안)판사가 선출되고 소환됐다. 군대와 징병제가 폐지되고 모든 시민들로 이뤄진 국민위병으로 대체됐다. 남성 보통선거가 실시됐다.

마르크스에게 파리코뮌의 결정적 교훈은 ‘노동계급이 기존 국가기구를 장악해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혁명가들은 낡은 자본주의 국가를 해체할 태세가 돼 있어야 하고, 그 자리에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와 새로운 권력 형태에 기반한 노동자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 엥겔스는 이것이 자신과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의미라고 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엥겔스의 사상에 의지해서 《국가와 혁명》이라는 중요한 책을 썼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들의 파리코뮌 경험, 그들이 다른 좌파들(개혁주의자들이나 바쿠닌 같은 아나키스트들)과 주고받은 논쟁이 레닌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국가의 필요성은 파리코뮌의 끔찍한 종말로 그 올바름이 비극적으로 입증됐다. 유럽 도처에서 자본주의 권력의 지배자들은 파리코뮌 분쇄에서 자신감을 얻었고, 인터내셔널을 마녀사냥하기 시작했다. 1872년 프랑스에서는 인터내셔널 회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받게 됐다. 비스마르크는 반(反)인터내셔널 유럽 동맹을 제안했다.

반동으로 인터내셔널이 파열했다. 영국의 개혁주의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코뮌이 너무 혁명적이라며 지지하지 않았다. 다른 편에는 러시아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71년의 나머지 시간과 1872년의 대부분을 파리코뮌 망명자들(대부분이 영국으로 망명했다)을 지원하고 연대를 조직하는 한편, 인터내셔널 내부에서는 바쿠닌과 그 추종자들의 영향력에 맞서 싸우는 데 보냈다.

엥겔스는 인터내셔널에서 이탈리아·스페인 등의 지부 담당 연락 간사였는데, 이 나라들에서는 바쿠닌과 그 지지자들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중앙집중화된 조직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탈집중화를 원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더 많은 권한과 영향력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노조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을 지지했다.

바쿠닌이 사실상 인터내셔널 안에 비밀 조직을 만들려 했다. 이것은 인터내셔널의 이익과 정신에 크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엥겔스는 바쿠닌의 비밀 조직 문제를 소위원회에 회부했고, 바쿠닌과 그의 동맹자 기욤을 제명했다. 그리고 총평의회를 뉴욕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미국에서는 총평의회가 유럽의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데다 내부 모의에 먹잇감이 되기가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터내셔널을 구할 방도는 없었다. 파리코뮌의 패배로 혁명가들은 1848년 직후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좌파 서클들은 내부 투쟁에 골몰했고, 현실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1인터내셔널을 자연사시키고, 국제 사회주의 조직을 재건할 수 있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부상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거의 20년이 걸렸고, 엥겔스는 마르크스 없이 새 세대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그 과제에 착수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기회주의와 투쟁하다

엥겔스는 1873년에 《자연변증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이 책을 위한 노트들을 썼는데, 완성하지 못했다. 이것은 과학 연구를 철학 사상에 적용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엥겔스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 점차 영향력을 늘려가던 사상과 벌인 논쟁과 관련돼 있었다.

논쟁의 배경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코뮌의 몰락이었다. 독일은 이제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 대륙의 중심축이 됐다. 그러자 독일의 노동자 운동도 민족에 기반한 안정된 정당을 발전시키고 이제 막 등장한 의회 구조에 진출하고자 했다.

1870년대에 (엥겔스의 동료인 아우구스트 베벨이 이끄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세력과 라살의 사상에 영향받은 세력이 통합해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SAPD을 만들었다.(1890년 사회주의자탄압법이 폐지된 뒤 당명을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 바꿨다.) 이 정당은 독일 통일의 결과로 생겨난 새 의회에 처음부터 참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당의 통합 강령인 고타 강령을 비판했다. 비(非)마르크스주의적 개념들을 아주 많이 채택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고타 강령이 개혁주의와 독일 국가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봤다. 라살 지지자들은 부르주아 야당을 반대하고, 비스마르크 편의 군주와 동맹하는 것을 찬성했다.

엥겔스 사후 독일 사민당 지도부가 개혁주의로 기운 것이 엥겔스 탓이라는 주장은 틀린 주장이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을 써, 독일 당 안에서 영향력을 키우던 오이겐 뒤링 박사의 사상을 비판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뒤링이 청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당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에 극도로 심란해 했다. 뒤링의 사상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요소들이 있었다.

《반뒤링론》은 1877년 당 기관지 〈전진〉에 기고한 기사들에서 시작했다. 엥겔스 기사의 논조와 내용이 일부 사람들에게 “불쾌하게” 여겨졌고, 당 지도부는 그 기사들을 〈전진〉의 과학 섹션으로 보냈다.

그러나 엥겔스는 굴하지 않고 논쟁했다. 그 덕분에 새 세대의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 책은 독일에서 금방 판매 금지됐지만, 그 책의 일부분이 대중적인 소책자 《공상에서 과학으로 — 사회주의의 발전》으로 출판돼, 다양한 유럽 언어들로 번역되고 많이 팔렸다. 이 소책자는 (뒤링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장점과 한계를 다루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가장 잘 다룬, 가장 쉬운 입문서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다.

이 책의 놀라운 대목 중 하나는 엥겔스가 매우 빠르게 바뀌는 세계를 포착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엥겔스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국유화가 한 구실을 지적했다. 그는 철도, 우편 제도, 다른 통신 수단에 대한 국가 통제가 지배계급의 효율적인 자본 축적에서 필수적이라고 봤다. 그는 그런 국가 통제를 모종의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을 혹평했다.

‘수정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 — 사회주의의 발전》의 성공 덕분에 국제적으로 새 세대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당에서 맞닥뜨린 정치적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1879년 비스마르크가 당의 영향력 확대를 막으려고 사회주의자탄압법을 통과시켰다. 그 법은 사실 당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당 지도자들은 매우 타협적이고 자신의 정치를 숨기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당의 의원단은 말랑말랑한 정책들을 지지했고, 그 지도자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사회민주당이 법에 복종할 거라고 의회에서 선언했다.

엥겔스는 독일 당의 지도부에 화가 났다. 그는 《반뒤링론》이 부당하게 비판받았다고 생각했고, 자신과 마르크스가 한 충고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당 지도부가 사회주의자탄압법에 대해서조차 기회주의적이고 심지어 개혁주의적으로 대응한다고 봤다. 사회주의자탄압법이 폐지된 뒤 당 강령이 개정됐을 때에도 당 지도자들이 과거의 실수나 마르크스의 비판을 인정하지 않자 엥겔스는 더욱 격분했다. 독일 당은 엥겔스의 여생 동안 근심의 원천이 됐다.

엥겔스 사후에 벌어진 ‘수정주의’ 논쟁은 당의 이론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주도했다. 그는 체제가 모순 없이 그저 확장될 것이고 거의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엥겔스는 이런 생각이 이미 독일 당의 1891년 개정 강령(에르푸르트 강령)에 있다고 봤다. 엥겔스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을 출판하지 못하게 한 것에 언제나 격분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자신이 나서서 《고타 강령 비판》을 출판했다. 독일과 다른 나라들의 젊은 동지들이 마르크스주의가 실천에서 진정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독일 당의 기회주의적 경향을 비판했다. 기회주의는 훗날 독일 당 안에서 지배적 경향이 된다. 그만큼 엥겔스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엥겔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 지도부는 그의 글을 검열했다. 예컨대, 엥겔스가 사회의 폭력적 전복에 대해 쓴 것을 삭제했다. 따라서 엥겔스가 독일 사회민주당의 개혁주의의 씨앗을 뿌렸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 사후 새 세대 사회주의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하다

엥겔스의 연인 리지 번스가 1878년에 죽었다. 3년 후에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도 죽었고, 1년 뒤에 그녀의 큰 딸 예니가 죽었다. 마르크스는 오랫동안 아프다 폐종양이 악화돼 1883년 3월 14일에 죽었다. 큰 딸이 죽은 지 두 달 뒤였고 네 살짜리 손자 해리 롱게가 죽기 며칠 전이었다. 손자는 마르크스의 무덤에 묻혔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임종을 지켜 봤고, 다음 날 미국에 있는 오랜 친구 프레데릭 아돌프 조르게에게 편지를 썼다. “인류는 머리 하나를 잃었다. 그것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머리를.”

마르크스의 죽음에 엥겔스가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엥겔스가 활동을 멈출 사람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은 뒤에도 12년을 더 살았는데, 엥겔스의 말년은 젊은 시절만큼 일이 많았고 만족을 몰랐다.

그 시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옹호하고 설명하고 명확하게 하는 데 삶을 바쳤다. 《자본론》 2권과 3권을 작업했다. 엥겔스가 없었다면 이 책들은 아마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딸들인 로라와 엘리너를 돌봤다. 죽는 날까지 그는 그들에게 돈을 지원했고, 유언장을 통해 그들이 평생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돈을 남겨 줬다. 여러 나라들, 특히 독일과 영국에서 조직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에게 조언했다.

엥겔스의 이론적 생산 능력도 약화되지 않았다 1884년에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들 중 하나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출판했다. 여러 의미에서 선구적인 책이었다. 가족 형태와 구조의 발전을 사회의 특정 계급이 차지한 사유재산의 출현과 연결시키며 여성 차별이 계급사회의 산물임을 설명했고,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확고히 지지했다. 평생 동안 엥겔스는 여성 차별을 소유 관계의 비정상적 산물이고, 그런 소유 관계가 사라지면 없어질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자유주의적 논평가들보다 훨씬 더 진보한 관점을 발전시켰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너무나 자주 여성을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로 봤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핵심적 의의와 몇 가지 오류에 대해서는 정진희, ‘엥겔스와 여성 차별의 가원 다시 보기’, 〈노동자 연대〉 164호를 보시오.)

엥겔스의 마지막

188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적 연결망이 성장해 제2인터내셔널이 창립됐다. 첫 대회가 1889년 파리에서 개최됐는데, 바스티유 감옥 습격 100주년 기념을 겸했다. 엥겔스와 엘리너 마르크스가 아주 긴밀하게 개입해 그 조직에서 중심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 위험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의 성공이 오히려 이론적·정치적 문제들을 은폐할 수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그 당들이 적절한 대중적 노동자 정당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계급투쟁에 실질적 뿌리가 없는 종파를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아나키스트 경향에 극도로 비판적이었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편을 들었다. 노동조합과 의회 속에서 활동할 필요성, 대중적 기반을 구축할 필요성에 대한 엥겔스의 강조는 옳았다. 그러나 독일 당이 훗날 체제에 기회주의적으로 적응하면서 이런 강조를 왜곡하기도 쉬웠다. 그럼에도 독일 당 지도자들의 기회주의를 엥겔스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바로 그 지도자들이 엥겔스의 다른 혁명적 글들을 검열했다.

엥겔스는 1895년 8월 5일에 후두암으로 죽었다.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정당의 지도자들과 러시아 혁명가 베라 자술리치와 영국 가스 노동자 지도자 윌 손이 참석한 장례식에서, 유언에 따라 엥겔스는 화장됐다. 엘리너 마르크스가 그의 재를 이스트본 근처의 바다에 뿌렸다.

엥겔스의 활동은 차티스트 운동에서 현대 노동조합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시기에 걸쳐 있다. 그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가장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에 살았다. 독일이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지울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늘 겸손했지만, 엄청나게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논평가나 공론가가 아니었다. 언제나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활동과 투쟁에 고무되고 열광한 혁명가였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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