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공기관들에 직무급제 도입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정부는 이미 2020년 공공기관 경영평가 편람에 ‘직무급제 추진’을 평가 항목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최근 이를 더 구체화하고 평가 비중도 높이도록 수정했다.

수정된 경영평가 편람에는 직무급제 도입에 필수적인 사전 절차로 꼽히는 직무 분석, 직무가치 평가 여부 등 세부 내용을 평가의 척도로 제시했다. 기본급에 직무급제가 반영됐는지, 직무급의 운영 대상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지속적인 운영을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보수 규정을 개정했는지 등 추진 상황을 꼼꼼히 따져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공공기관들은 내년 3월 하순까지 2020년 경영평가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해야 하는데, 이때 직무급제 추진 실적을 보고해야 한다. 경영평가 결과는 기관장의 실적 평가와 기관의 예산 등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부의 공공기관 정책 관철의 핵심 수단이 돼 왔다.

그동안 정부는 무기계약직과 자회사로 전환된 노동자들, 신규 공공기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직무급제 도입을 추진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기존의 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는 것이다.

임금 차별 정당화

문재인 정부는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정책을 추구해 왔는데, 이는 온갖 규제 완화와 같은 친기업 정책과 임금·노동시간 유연화와 같은 노동자들을 더 쥐어짜는 정책으로 기업들의 수익성을 지켜주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로 경제 상황이 더 악화된 터라 그 필요성은 더 커졌다. 국회에서 노동개악 추진을 서두르고 공공기관에서 직무급제 확대를 압박하고 나선 이유이다.

임금 체계 개악 자체가 문제다 한편에서 대화 테이블 만들고서 다른 한편에서 개악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 7월 28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정 협약식 ⓒ출처 청와대

정부는 직무급제 추진에 ‘동일임금 동일노동’이라는 진보적 색칠을 해 가며 정당화하지만, 실제 의도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직무에 따른 임금 차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각 직무에 등급을 매겨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업무를 하는 노동자는 낮은 임금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평생을 일해도 최저임금 수준인 직무급제가 대거 도입됐다.

정규직도 근속이 길다고 자동으로 임금·승급이 오르는 게 아니라, 맡은 직무 가치에 따라 임금 수준이 결정된다. 노동자가 자신의 직무 등급을 높여 직무 가치가 높은 일을 맡지 못한다면 임금을 올려 주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무의 차이, 가치의 높고 낮음을 정하는 평가 기준은 사용자들이 좌우하고, 기존에 형성된 임금 차별(고용형태, 성별, 인종 등)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직무급제가 공정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직무급제 도입이 노리는 것은 임금 차별 정당화와 임금 인상 억제다.

경사노위 합의 추진

정부는 공공기관들에 직무급제 도입을 압박하는 것과 함께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노사정 합의도 이끌어내려 하고 있다.

그동안 직무급제로의 임금체계 개편 논의를 진행해 온 경사노위 산하 공공기관위원회는 11월 21일 운영 기간 만료를 앞두고 최근 합의문 도출을 위한 막판 논의가 한창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도 비공개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문재인 정부가 이전에도 번번이 그래 왔듯, 한편에서는 노사정 대화 테이블에 노조 지도자들을 앉혀 놓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악을 이미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추진 시한을 정해 놓고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무기로 직무급제 도입을 압박하고 있다.

결국 사회적 대화는 그것이 내세우는 대의명분과 달리,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압박하기 위한 장이다. 합의를 성사시키면 임금체계 개편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고, 직무급제에 의구심과 불신이 적잖은 노동자들의 수용도를 높이는 데도 유용할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대화 테이블에 노조 지도자들을 끌어들인다.

6월 12일 공무직위원회 2차 회의장 앞에서 팻말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 ⓒ출처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그 점에서 그동안 한국노총 소속 공공부문 노조 지도자들이 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에 직접 참여해 온 것은 문제이다.

이 노조 지도자들은 직무급제 추진 과정과 내용을 둘러싸고 정부와 견해 차이가 있으나, 직무급제 도입 자체를 원천 반대하지 않는다. 생애임금 불변, 임금체계 개편 과정에서 노조 참여 보장, 성과주의 보상체계 확대 배제 등 몇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하며 협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제 조건들은 직무급제 도입에 따르는 문제점을 막아 주는 안전판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노조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요구해 온 정부의 일방 추진 반대가 전혀 수용되지 않고 있는 것을 봐도, 정부가 동등한 파트너십을 이룰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정부가 직무급제를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상황에서는 노동조합의 참여를 보장한다 해도 개악을 전제한 수세적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노조가 직무 분석을 비롯한 직무급제 설계에 관여할 수 있다 해도, 주도권 자체는 사용자에게 있어 노조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직무 평가 결과를 놓고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제기될 것이 뻔하고, 이는 노동자들 사이에 분열을 키우기 십상이다.

단호한 반대 필요

민주노총 소속의 공공운수노조와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는 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공공기관위원회 논의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 추상적 수준이더라도 경사노위에서 직무급제 도입에 대한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음을 경계하며 비판을 강화해야 한다. 노사정 합의 추진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게 맞을 것이다.

노동운동은 정부의 일방적 추진 비판에만 초점을 두거나 직무급제의 일부 내용에만 반대할 것이 아니라,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 의도를 폭로하면서 임금체계 개악 그 자체에 반대해야 한다.

요즘 노동운동 안에서는 ‘개악 저지를 주장하는 것은 수세적 태도’라는 말도 흔히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당면한 개악을 막아내야 개선을 도모할 동력이 나오기 마련이다.

한편, 양대노총 공공부문 노조들은 직무급제를 보완할 대안으로 몇몇 방안들도 내놓았다. 예컨대, 직무급제를 도입하되 정규직의 초임 임금 수준을 높이고 말년 임금 수준은 낮추자고 하거나, 공공기관 중 고임금 기관들의 인상률을 낮추고 저임금 부분을 더 올리자는 식의 제안이 나온다. 임금체계 개편에 따른 피해를 줄이거나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 올리려는 취지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임금체계 개편을 추진하는 목적 자체가 전반적인 노동자들의 임금 억제를 위한 것인 만큼, 이런 방안들은 시행이 되기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시행된다 하더라도 비정규직·저임금층의 임금 수준을 실질적으로 개선하지도 못하면서 정규직·장기근속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끌어내리는 데만 이용되기 십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