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읽기 전에 “대선 이후 바이든 앞에 놓인 암초들”을 읽으시오.

“민주주의면 민주주의답게 굴어라” 11월 4일 워싱턴DC에서 벌어진 반(反)트럼프 시위 ⓒ출처 Geoff Livingston(플리커)

이번 미국 대선이 시작도 하기 전부터,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난맥상을 거듭하자, “미국식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나온다.

사실, 수백만 표나 적게 득표하고도 대통령에 당선할 수 있는 비민주적 선거 제도를 가진 국가가 민주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했던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선거 보름 후에 미개표 투표용지가 수천 표씩 무더기로 쏟아지면서 말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런 비민주적이고 허술해 보이는 선거 제도는, 미국 지배자들이 권력을 쥔 채 벌인 부르주아 혁명(독립전쟁) 때부터 대중의 정치 참여를 체계적으로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주의 깊게 구축된 것이다.(관련 글 《마르크스21》 14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그러나 바로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체제가 지금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거 부정”을 둘러싼 논란이 종종 터진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지금 미국과 세계는 경제·전염병·기후 등 온갖 위기들이 중첩돼 있다. 지배자들은 짧게 봐도 10년 넘게, 길게 보면 40여 년 동안 위기의 대가를 대중에 떠넘면서 부와 권력을 누려 왔다. 

2011년 분출한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은 이에 대한 분노를 집약해 크게 주목받았다. “1퍼센트만 구제하는 것이 민주주의냐!”

사람들은 이 체제의 위기가 낳은 여러 병폐에 신음하면서, 사회가 이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런 의문들은 대개는 모호하거나, 체제 자체의 원리보다는 이런저런 현상들에 집중하곤 했지만, 깊이 고인 불신과 쓰라림을 먹고 자라났다. ‘나를 위험에서 지켜주지 않고 내 의사에 귀 기울이지도 않는다면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인가?’

쓰라림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분출했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병폐에 맞선 주목할 만한 대중 저항으로 드러났다. 2019년의 세계적 반란 물결에서 2020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그 두드러진 사례다.

반대편에서는 불만을 가장 반동적으로 결집한 극우가 부상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프랑스·독일·스페인·영국·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 모두에서 신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환멸에 힘입어 극우가 성장했다.

트럼프가 미국과 세계에서 한 구실도 이런 것이다. 트럼프는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불신을 오른쪽에서 대변해 성장했고, 이를 이용해 (대개는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해서였지만) 미국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인자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 일반을 부정하는 파시스트들이 자랄 토양을 닦고 있다.

즉 체제 자체의 위기와 체제에 대한 좌우 양쪽의 불신, 즉 정치 양극화가 소위 “미국식 민주주의의 위기”의 핵심이다. 그에 견주면 미국 선거 제도의 후진성은 중요하지만 보조적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