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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당 이재유 씨의 엥겔스 곡해에 대한 반박 2: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무엇에서 비롯했는가?

독일사민당의 개혁주의는 엥겔스 사상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엥겔스(왼쪽)와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오른쪽)

변혁당원 이재유 씨(이하 존칭 생략)가 그 당의 기관지 〈변혁정치〉에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를 연재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글들에서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엥겔스를 일종의 개혁주의자로 왜곡한다는 점이다.(이에 대한 비판은 필자의 “변혁당 이재유 씨의 엥겔스 곡해에 대한 반박”을 보시오.) 이번에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엥겔스의 유물론 중 합리론 측면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론의 폐기와 개량주의로 가는 길”, 116호, 11월 2일 자.)

그 글에서 이재유는 엥겔스 사후에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수정주의 논쟁을 다룬다.

1890년대 후반부에 벌어진 수정주의 논쟁은 독일사민당의 이론가 베른슈타인이 혁명적 전망을 비롯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요소들을 폐기하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베른슈타인은 금융과 독점의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는 경향을 극복해 더는 심각한 경제 위기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가치 개념을 기각하고,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착취로 돌아가는 체제임을 부정하고, 개혁을 통해 ‘착취’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조합이 성장하고 민주주의가 진척됐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혁명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지엽적인 ‘수정’이 아니라 본질적인 변형이었다.

이재유는 베른슈타인의 이러한 수정주의가 엥겔스 사상의 기본적 결함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엥겔스의 사상을 기계적 유물론과 목적론적 합리론의 엉성한 결합으로 본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자동·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제2인터내셔널의 숙명론이 엥겔스 이론의 “합리론적” 측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합리론은 논리에만 기대고 경험적 현실을 무시하는 독단적인 이론인 반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현실의 변화를 더 중시해서 “이론을 폐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이것은 엥겔스 유물론의 또 다른 측면인 “경험론”(기계적 유물론)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엥겔스의 사상이 기계적 유물론이나 결정론이 아니고, 독단적인 이론 체계도 아니라는 점은 이미 필자가 지난 글에서 살펴봤다. 특히, 말년의 엥겔스가 개혁주의로 기울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왜곡이다.

이 점을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수정주의 논쟁을 엥겔스 사상의 기본적 결함에서 찾으려 하는 이재유 주장의 접근법을 비판하고자 한다.

관념론

이재유는 19세기 말 독일 자본주의의 확장과 노동조합의 성장, 독일사민당의 의회적 성과 등 수정주의 논쟁이 벌어진 “시대적 배경”을 짤막하게 서술한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 조건의 변화가 독일사민당의 실천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사실 당의 기존 실천에 맞게 이론을 수정하려는 것이었음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재유는 기본적으로 엥겔스 인식론의 결함이 베른슈타인주의를 낳은 것으로 본다. 유물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관념론(구체적으로 이데올로기 중심성)이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이재유의 설명은 순전히 사변적이 된다. 이재유는 베른슈타인이 신칸트주의적 인식론을 받아들였다면서, 그런 인식론이 어떻게 “국가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이어지는지 서술한다.

대표적 신칸트주의 철학자 헤르만 코엔과 또 다른 대표적 신칸트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가 국가 절대성론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로 이러한 이재유 주장을 반증할 수도 있음은 일단 제쳐 두기로 하고, 신칸트주의가 수정주의자들의 사고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에 따르면, 당시 신칸트주의의 유행은 제2인터내셔널의 숙명론적·기계적 이론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났다. 사회주의의 도래가 필연적인가,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는 무슨 구실을 해야 하는가? 제2인터내셔널의 기계적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문제에 대답하지 못한다고 여긴 이들 중 일부가 칸트로 눈을 돌렸다.(반면,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50년에 제시한 연속혁명 이론을 창의적으로 확장해 제2인터내셔널의 진화론적 사회 변화 입장을 혁명적으로 전복했다.)

그러나 국가에 관한 태도가 신칸트주의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관념론적 주장이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들이 칸트의 사상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파하긴 했지만 그 자신이 칸트의 인식론을 제대로 다룬 적은 없다. 칸트의 철학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현실에서 아무 구체적 지침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칸트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꼭 동일한 입장으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제1차세계대전 때 제국의회 의원으로서 혼자서 용감하게 독일의 참전에 반대표를 던지고 혁명적 입장을 취한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칸트의 윤리학에 우호적이었다.

수정주의를 낳은 요인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견지한 당 개념의 불명료함이 베른슈타인에게 틈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광범한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정치 조직을 건설하면 그것이 혁명적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 당은 노동계급을 대표할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확장기에 노동계급 대중은 개혁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고 당은 그런 개혁주의적 의식도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적 상황이 되면 개혁주의 의식이 간단히 혁명적 의식으로 전환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혁명의 중요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내다보지 못했다.

이런 불명료함은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 운동이 겨우 막 기지개를 켜던 시기에, 그리고 기구와 제도, 체계적 재정 수입원 등을 갖춘 현대적 의미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이 당내에서 얼마간 주목받은 것은 이론적 강점 때문이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이유에서였다. 수정주의의 등장은 첫째, 독일 자본주의와 노동운동에서 나타난 객관적 변화가 독일사민당에 미친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말 자본주의 경제는 성장하고 있었고, 특히 독일은 1890년대에 세계적인 산업 강국으로 부상했다.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이고 첨예한 위기와 투쟁의 결과로 노동계급이 자본가 계급과 그 국가를 전복한다는 전망은 요원한 일로 보였다.

둘째, 비스마르크가 노동자 운동을 통제하려고 도입한 ‘사회주의 활동 단속법’은 역설적 효과를 냈다. 1880년대 동안 불법 정당이 된 독일사민당은 급진적이 됐고 마르크스주의에 친화적이 됐다. 다른 한편, 독일사민당은 국가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국가가 허용한 모든 합법적 기회를 부지런히 활용하려 했다.

활동가들은 공직선거 참여는 물론 스포츠 클럽, 청년회, 오케스트라 등 각종 자조 모임 등을 통해 노동자들을 대거 끌어모으고 영향력을 키웠다. 다른 한편, 강력한 국가와 정면 충돌하는 투쟁은 쉽지 않았고 활동가들은 이를 되도록 피하려 했다. 갈수록 당 강령에 있는 혁명은 막연한 미래의 일로 여겨졌다. 언사는 급진적이었지만 실제 행동은 수동적이었다. 카를 카우츠키가 대변한 이러한 수동적 급진주의는 당시 당의 실제 정서를 나타낸 것이었다.

수정주의의 등장에 영향을 미친 셋째 요인은 노동조합 관료의 부상이었다. 독일사민당은 득표와 당원층을 노동조합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 관료는 당의 핵심 기반이었다. 노동조합의 본성상 이들은 즉각적이고 실리적인 성과를 얻는 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재유가 수정주의의 핵심 지지 기반인 것처럼 시사하는 “제국주의 본국 정부와 자본가들”에 “매수”된 고임금 숙련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관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이었다. 우선, 고임금 숙련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에 매수됐다는 서술부터가 부정확하다.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 과실은 노동자들에게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고,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서 획득했다. 그리고 그런 투쟁을 통해 특정 부문 노동자들만이 혜택을 얻기보다는 전체 노동자들의 처우가 개선되는 효과를 얻었다.

자본주의가 양보를 제공할 수 있는 동안 노동자들이 개혁주의적 의식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로부터 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숙련 노동자들은 제1차세계대전 동안 전쟁에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됐고, 그들의 투쟁은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1920년대에 혁명적인 공산당이 창당되는 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반면 노동조합 관료는 그런 양보를 협상하는 기구 자체가 유지되는 것에 존재 기반이 있었다. 그들의 개혁주의는 이런 물질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조직(특히 인적·재정적 자원) 자체의 보전을 투쟁보다 중시했다. 특히 당의 합법화 이후로 의회 활동과 선거 참여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 관료들이 늘어났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당의 이런 기반과 실천의 산물이었다. 베른슈타인은 혁명적인 내용이 포함된 당의 기존 강령을 당의 실제 실천과 부합하도록 수정하려 했다. 혁명적 전망을 폐기함으로써 말이다.

수정주의 논쟁에서 일견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수정주의에 반대했던 카를 카우츠키가 이끌던 당 중앙(실제로는 중간에서 동요하던 중간파였다)은 이재유의 지적처럼 “수정주의와 결국 같은 길을 걸었다.” 당 지도부는 독일의 권력의 중심부에서 바깥으로 밀려나 있는 처지 때문에 급진적 언사와 이론을 명시적으로 포기하지 않았지만 기존의 개혁주의적 실천을 계속 이어갔다.

심판의 시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이후 역사에서 현실의 시험대를 통과했는가? 자본주의는 논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위기에 빠졌다. 수정주의 논쟁 당시 베른슈타인을 철저하게 논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지적처럼 금융은 오히려 위기를 악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그리고 독점은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고, 독점체들 간의 경쟁은 국가 간 경쟁과 결합돼 끔찍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은 결국 러시아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중단됐고, 이후 6년간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었다.

그러나 “현실을 중시”한 베른슈타인은 이런 ‘경험적 현실’과 마주해 혁명적 입장으로 돌아서지 않았고, 수정주의에 회의를 품지도 않았다. 그래서 베른슈타인이 경험론적이고 실증주의적 접근을 취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수정주의를 어떤 인식론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수정주의는 자본주의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는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상층의 체제 내적 개혁 기구의 유지에 이해관계를 가진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실천을 표현한 이데올로기였다.

따라서 엥겔스의 사상을 개혁주의적으로 곡해하고 독일 당의 개혁주의가 그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보는 것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가 아니라 관념론적 이해의 소산이다. 뿐만 아니라 이재유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혁명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노동조합 관료의 개혁주의에 타협하지 않는 독립적인 혁명적 좌파의 중요성이라는 결론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와 변혁당의 실천 사이의 관계가 자못 궁금해진다. 〈변혁정치〉 편집자가 밝혀 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