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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 직무급제 도입:
정부의 임금 억제 정당화하는 기만

11월 25일 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가 “공공기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합의”를 발표했다. 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는 정부, 노동계, 공익위원이 참가하고, 노동계 대표로 한국노총 공공노련·공공연맹·금융노조가 참가하고 있다.

이 합의의 핵심 내용은 노동이사제 법제화(공공기관의운영에관한법률 개정안 통과)를 국회에 건의하고 직무급제 도입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가 지난 25일 ‘공공기관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합의’를 발표했다 ⓒ출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는 노조 지도자들의 오랜 요구 중 하나이고, 직무급제는 문재인 정부가 공들여 온 임금체계 개편 방안이다. 공공기관위원회 이병훈 위원장은 이번 합의가 “역사적 대타협”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노사가 양측이 서로 주고 받은 타협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조건 악화를 수용한 나쁜 합의다.

직무급제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직무에 따른 임금 차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각 직무에 등급을 매겨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업무를 하는 노동자는 낮은 임금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평생을 일해도 최저임금 수준에 만족하고, 정규직은 근속이 길다고 자동으로 임금·승급이 오르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결국 직무급제 도입이 노리는 것은 임금 차별 정당화와 임금 인상 억제다.

문재인 정부는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시간과 임금 ‘경직성’을 깨는 데 집중하고 있다. 탄력근로제 확대 개악만큼은 올해 국회에서 반드시 통과시켜려 하고, 공공부문 직무급제 도입을 통해 전반적인 임금 억제 효과를 내려 한다.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직무급제 도입을 평가 항목에 포함하고 최근에는 배점까지 높였다.

그러나 직무급제가 도입된 공공부문 비정규직에서 임금 불만이 커지고 있다. 가뜩이나 저임금인데다 직무급제 때문에 근속 기간이 길어져도 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기관 정규직 중에는 직무급제가 도입된 곳이 극소수지만, 호봉제와 비교해 임금 인상이 어렵다는 점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 반감이 상당한 상황이다.

반발

정부는 이런 반발을 무릅쓰면서도 임금체계 개편을 더는 늦추지 않으려 한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보건의료노조가 ‘반쪽 합의’라고 반발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버젓이 경사노위 합의를 발표한 것도 강하게 밀어붙이겠다는 뜻이다.

합의문에 명시된 조건, 즉 직무급제를 “개별 공공기관의 노사 합의를 통해 자율적·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정부의 일방 추진을 제어할 안전판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직무급제 도입과 안착화 여부로 기관 경영평가에 불이익을 주는 상황에서 ‘노사 합의’, ‘자율적 추진’이 실질적이기는 어렵다. 박근혜 정부도 경영평가를 이용해 임금피크제 도입 ‘노사 합의’를 받아 낸 바 있다.

이번 합의에는 “후속 논의를 위한 노‧정 대화를 지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정부로서는 직무급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노조 지도자들을 협상 테이블에 계속 앉혀 둘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속 논의는 직무급제 도입을 전제하면서 그 세부 내용을 다루는 것이다. 이미 정부가 임금 저하 방지, 성과급 확대 반대 등 노조 측이 제시한 요구를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속 논의는 노조들이 투쟁에 나서지 못하게 붙잡아 두는 구실만 할 공산이 크다.

노동이사제

한편, 노동이사제는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에 참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노동이사가 상임인지 비상임인지, 전체 이사회에서의 비중은 얼마인지, 권한이 무엇인지 등의 세부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 현재 국회에는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발의한 ‘500인 이상 기관에는 2인 이상의 상임이사를 노동이사로 둔다’는 내용의 법안이 제출돼 있다.

물론 사용자 단체들은 노동이사제가 ‘경영권 침해’라며 질색을 한다. 이런 반발 때문에 관련 법안이 통과될지도 불투명하다.

설사 노동이사제가 시행되더라도 노동자들의 조건을 악화를 막아 주는 수단이 되긴 어려울 것이다. 노동이사는 전체 이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 이런 결정을 좌우할 수 없다. 예컨대, 노동이사제가 가장 발전한 독일에서도 감독이사회가 노사 동수로 구성되지만 캐스팅보트는 주주 대표인 의장에게 있다.

또 노동 이사도 기업의 경영에 책임을 져야 하므로 노동자들의 이해만 대변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압력이 상당하다. 이런 압력은 노동이사를 통해 노조에도 가해지기 십상이다. ILO나 법안 발의자 박주민 의원 등은 노동이사제가 기업 효율성 제고에 도움이 되고 노사 갈등을 줄이는 효과를 낸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번 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 합의는 노동자들의 생계에 중요한 조건인 임금체계 개악을 수용한 잘못된 합의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보건의료노조가 이 합의에 반대하며 정부의 일방적 임금체계 개편에 맞서겠다고 입장을 밝힌 것은 옳다.

다만, 그동안 정부의 임금체계 개악에 분명히 반대하며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발전시키기보다 정부와 교섭을 통해 괜찮은 임금체계 개선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시간을 까먹은 점은 되돌아봐야 한다. 경제 침체가 계속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조건 악화를 막으려면, 정부나 사용자들과의 교섭이 아니라 이를 강제할 기층 노동자들의 만만찮은 투쟁에 기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