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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결정부터 타결까지 4년 반을 돌아본다

이 글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앞두고 의미·전개·영향을 다룬 두 차례 연재 기사를 합치고 시점에 맞게 약간 교정·교열한 것이다. 각각의 글은 본지 341호344호에 실렸다.

12월 31일이면 4년간 이어 온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일명 ‘브렉시트’ 과정이 마무리된다. 영국은 올해 1월 31일자로 더는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니게 됐지만, 영국과 유럽연합은 올해 말까지 과도기를 두고 미래 관계 설정을 위한 협상을 하기로 했다. 이제 그 과도기가 끝나는 것이다.

지난 4년 동안 영국과 유럽연합이 ‘이혼 협상’을 하는 동안, 탈퇴 유예와 협상 기간 연장이 여러 차례 있었다. 무역 등에서 아무런 합의가 없는 브렉시트, 즉 ‘노딜 브렉시트’ 상황이 몰고 올 혼란을 영국 지배계급이든 유럽 지배계급이든 둘 다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코로나19로 확진자가 치솟고 있다. 각국 지배자들은 이에 대처하기도 빠듯한 상황이다.

영국 현 총리 보리스 존슨은 브렉시트를 완수하겠다는 약속을 앞세워 2019년 12월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고, 보수당에서 브렉시트 반대파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보수당은, 우익 포퓰리즘 정당들에 뺏겼던 유권자들을 탈환했다.

12월 31일을 코앞에 두고 합의가 맺어졌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정치 불안정이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이 불안정과 그것이 낳을 변화는 유럽연합을 매개로 세계 다른 지역으로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브렉시트: 세계사적 전환

브렉시트를 둘러싼 협상의 난맥상을 두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장인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유럽연합은 자신의 단일 시장(세계 최대 규모다)을 다스리기 위해 복잡한 제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이 시장에 접근하려고 유럽연합의 규제를 받아들인다. 영국이 이런 규범을 계속 따를 것이냐가 영국과 유럽연합 간 분쟁의 진정한 핵심이다.”

유럽연합이 상징하는 ‘유럽 통합 프로젝트’는 1950년에 시작했다. 즉, “유럽연합[이] 자신의 단일 시장을 … 다스리기 위해 복잡한 제도를 구축”해 온 역사가 70년이나 됐다는 것이다. 영국이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 동참한 1973년부터만 따져도 반백 년 세월이다.

그 과정에서 유럽은 세계 최대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현재 유럽연합은 미국과 중국과 함께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3대 경제 블록 중 하나다.

브렉시트는 유럽 지배자들이 70년 동안 공들여 구축해 온 유럽의 생산·교역 네트워크와 그 네트워크를 조율하는 각종 기구·제도를 교란하는 일이다. 즉 유럽연합이라는 세계경제의 기둥 하나를 흔듦으로써 세계 질서를 흔드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캘리니코스는 브렉시트를 일컬어 “세계사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세계 지배자들은 브렉시트 여부를 두고 벌어진 2016년 6월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파가 승리하지 않기를 바라며 온갖 협박을 했다. 그러나 지배자들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세상사가 그들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52 대 48로, 1740만 명의 찬성으로 브렉시트가 결정됐다.

자본가 정당과 자본가 계급의 불협화음

영국 자본주의는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그 이전의 부진에서 벗어나 상당히 성공적으로 재건됐다. 특히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며 성장한 영국 금융가, 일명 ‘시티오브런던’은 유럽 금융의 최대 중심지가 됐다. 런던 금융가는 유로화로 이뤄지는 거래를 도맡아 처리한다. 그뿐 아니라 유럽의 자본시장과 투자은행 수익의 4분의 3이 영국에서 거래된다.

영국 자본가들은 브렉시트를 반대했고, 국민투표 이후에는 그 결정을 뒤집으려 애썼다. 이들은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한 지금도 이전과 별다르지 않은 관계가 수립되기를 바란다.

한편, 브렉시트 과정에서 영국 자본주의에는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바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문제다.

영국은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로 구성돼 있다. 영국 서쪽에 있는 섬 아일랜드의 남부는 독자적 국가이지만 북부는 영국에 속해 있다. 그래도 그동안 아일랜드 남부/북부 사이에는 관세 장벽이 없었다.

그런데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이탈하면 여기에 관세 장벽이 들어설 수 있었다. 아일랜드는 여전히 유럽연합 회원국이기 때문이다. 이를 막고자 유럽연합 측은 브렉시트 후에도 북아일랜드가 계속해서 유럽연합의 관세동맹에 남도록 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면 영국과 북아일랜드 사이에 관세 장벽이 들어서고,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다른 곳과 다른 특수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이는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을 자극할 것이다.

그래서 보리스 존슨의 전임자인 당시 보수당 총리 테리사 메이는 이 요구를 거절했었다. 존슨은 지난해에는 이 요구를 수용했지만, 올해 9월에는 태도를 싹 바꿔 이 합의를 거스르는 법(내부시장법)을 제정했다.

요컨대, 지난 4년 동안 영국의 정치 상황은 자본가들의 바람과는 어긋나게 전개돼 왔다. 브렉시트 결정이 내려진 것 자체가 그렇다. 이는 100년 동안 영국 자본가들을 대변해 온 보수당 안에서 보리스 존슨 같은 이질적 정치인이 부상해 당내 브렉시트 반대파를 밀어내고 총리가 된 데에 영향을 끼쳤다.

존슨의 전략은 영국 자본주의가 미국과 긴밀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어쩌면 영국은 꽤나 발전한 나라로 20세기를 시작했다가 줄곧 쇠락한 아르헨티나와 같은 길을 갈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수년째 영국을 격랑에 휘말리게 한 브렉시트는 2016년 6월 국민투표로 결정됐다. 당시 유럽연합 잔류 진영은, 유럽연합이라는 신자유주의·제국주의의 화신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 자본주의의 지배계급 핵심 부문이 주도했다. 탈퇴 진영에서는 이민자들을 혐오하고 인종차별적인 자들이 두드러졌다. 당시 여당 보수당은 양측으로 분열했다. 따라서 영국 노동계급과 좌파에게는 난처하게도, 어느 진영에 서든 보수당 일부와 함께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 유권자들 다수는 브렉시트를 선택했다. 두 가지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유럽연합은 40년간의 신자유주의 공격을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감이 막대했다. 둘째, 2007~2009년 경제 위기로 신자유주의의 정당성이 파산한 마당에도 영국과 유럽의 경제·정치 권력층은 신자유주의적 긴축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환멸이 거대했다. 즉, 이는 신자유주의와 긴축에 대한 정당한 항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물론 국민투표에서 강경 우익의 인종차별 선동에 영향받아 탈퇴표를 던진 사람이 적잖았으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거치며 영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더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에 더해 장기화하는 경제 위기 속에서 보호무역주의가 강해지고 있다. 이런 일들은 곳곳에서 애국주의와 인종차별을 첨예하게 하는 데 영향을 준다. 이에 저항해야 한다.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 핵심 기구인 유럽연합, 이를 지지하는 영국 지배계급 핵심부를 편드는 것은 한참 잘못된 선택이었다.

유럽연합은 국민투표 고작 1년 전인 2015년에 그리스의 좌파 정부를 굴복시켰고, 지금도 해마다 난민 수천 명이 지중해에 빠져 죽는데도 난민 유입을 강하게 틀어막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적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세운 연합체인 유럽연합을 개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공상이다. 그러므로 잔류 진영에 선 좌파들이 ‘유럽연합 안에서 개혁하자’는 단서를 단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2016년 국민투표에서 영국의 노동계 지도자 다수는 그런 선택을 했다. 이들은 ‘진보적 유럽연합’이라는 공상을 쫓으며 유럽연합 반대 진영을 송두리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넘기는 우를 범했다. 그것도 지독한 엘리트주의적 태도로 노동계급을 깔보면서 그랬다.

이와 달리 좌파적 관점에서 유럽연합을 반대하는 ‘렉시트’(좌파+브렉시트) 선동을 펼친 혁명적 좌파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비롯해 소수 있었다. 그들은 브렉시트 결정 후 영국 자본주의가 경쟁력을 키우겠다며 노동계급을 더한층 쥐어짜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려면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종차별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브렉시트 결정이 인종차별 확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 2015년 가을 유럽 전역에서는 난민 연대 운동이 크게 벌어졌고, 영국에서도 인구의 31퍼센트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난민 지원 활동에 참여했던 바 있다.

이런 일들이 보여 주는 가능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런 가능성을 더 키우고 계급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애쓰는 게 옳았다.

정치 양극화, 코빈의 부상과 좌절

브렉시트로 영국 정치가 출렁인 지난 4년은 노동당 내 좌파이자 사회주의자인 제러미 코빈이 부상했다가 좌절한 기간과 겹친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에 약 9개월 앞선 2015년 9월 12일 제러미 코빈이 압도적 차이로 노동당 대표로 당선했다. 이는 기성 정치권에 감전 같은 충격을 줬다. 코빈이 이끈 노동당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1년 뒤에 열린 총선에서 민영화된 기업의 재국유화 같은 공약을 내걸고 큰 성공을 거뒀다. 영국 유권자 1200만 명이 코빈의 메시지에 호응했다.

코빈의 부상은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좌파 정치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가 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 코빈이 노동당 대표가 된 직후에 열린 난민 연대 집회에는 5만 명이나 참가했다. 그러므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인종차별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은 무척 일면적인 데다가 자신의 그릇된 편견으로 세상사를 끼워 맞추는 어리석은 일이다.

현재 자본주의가 여러 겹의 위기를 겪는 와중에 세계 곳곳에서 정치가 양극화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득세한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힘이 크게 흔들리며 좌우 모두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신자유주의를 신봉했고, 신자유주의의 유지에 이해관계가 있는 기성 권력자들이 그냥 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환멸은 더 커지고 대중은 더 좌로, 더 우로 시선을 돌린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정치 양극화의 주된 수혜자는 극우다. 신자유주의와의 단절을 주장하며 떠올랐던 급진 좌파들은 결국엔 실패했다. 그리스 시리자는 집권한 지 반년 만에 긴축 정책 추진자로 변하며 배신했다. 현재 스페인 연립정부에 포함된 포데모스도 마찬가지다. 2020년 11월 영국 노동당에서는 제러미 코빈이 축출 시도에 직면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에 헌신하는 기성 권력자와 자본가 계급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분노가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투쟁이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정치를 규정해 왔다. 이 투쟁에서 좌파가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느냐가 코빈 등 급진 좌파의 성장과 좌절에서 배울 중요한 교훈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사회주의자는 어떤 무대에서 어떤 정치로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할까?

변화

코빈의 성장은 좌파 전체를 고무했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 좌파와 사회주의자가 고무됐다. 코빈의 부상은 사회주의 사상이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있음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코빈의 성장은 시리자와 포데모스와는 차이점도 있었다. 시리자와 포데모스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바깥에서 더 좌파적인 세력이 성장하는 모습이었지만, 코빈의 경우에는 정치적 시체 취급을 받던 영국 노동당의 안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노동당 바깥에서 새로운 좌파 정당을 건설하려던 시도가 중단됐다. 코빈 지지자 수십만 명이 노동당에 입당하는 흐름과 함께 많은 좌파가 노동당으로 향했다.

2017년 6월 총선까지 코빈은 승승장구했다. 코빈은 브렉시트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두 노동계급과 영국 국민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자고 호소했다.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파를 이루려던 보수당의 구상은 무참히 망가졌고, 노동당 지지율의 상승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제 선거를 한 번만 더 치르면 코빈 총리의 시대가 열릴 것만 같았다.

이 선거 직전에 맨체스터에서 폭탄 공격이 벌어졌고, 기성 정치인들은 이를 이슬람 혐오와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데 이용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빈은 역대 영국 정부들이 직접 다른 나라를 침공하거나 제국주의적 전쟁에 동참한 것이 그런 비극을 일으킨 원인이라고 지목하며 영국의 제국주의적 외교 정책을 비판했다. 그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영국의 외교 정책이 폭탄 공격에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라는 슬로건으로 압축되는 코빈의 총선 공약은 인기가 좋았다. 기성 권력자와 자본가 계급에 염증을 느끼던 영국 유권자 1200만 명이 신자유주의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 코빈의 좌파적 주장에 호응했다.

제러미 코빈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좌파 개혁주의 정치인의 장점과 한계가 모두 드러났다 ⓒ출처 Jeremy Corbyn(플리커)

그러나 단 2년 반 뒤에 열린 2019년 12월 총선에서 코빈이 이끈 노동당은 참패했다. 선거 공약은 2017년 총선과 비슷했기 때문에 정책 차이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영국 사회의 계급투쟁 수준이 낮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기성 정치 권력자들과 자본가 계급은 보리스 존슨이 완수하겠다는 브렉시트가 가져올 혼란도 걱정이었지만, 코빈의 노동당이 집권하며 신자유주의에 더 큰 균열이 생기는 것을 더 싫어했다. 그래서 똘똘 뭉쳐 코빈을 저지하려 했다. 코빈을 물어뜯는 온갖 비방이 난무했다.

이를 뒤집을 만한 수준의 계급투쟁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파업·시위·집회에 나서면서 집단적 단결의 중요성을 느끼고 이해하게 된다. 급진적 사상에도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그런 투쟁이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기후 위기에 항의하는 ‘멸종반란’ 운동 등이 가능성을 보여 줬지만, 아직 세력 균형을 뒤집을 만큼은 아니었다.

코빈의 성장과 2017년 총선의 성공으로 개혁에 기대감이 상승하고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의 자신감이 높아진 상황을 활용해 계급투쟁을 전진시킬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영국 노동계 지도자와 많은 좌파 활동가들은 코빈의 선거적 성공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거나 파업을 독려하지 않았다. 단백질을 아무리 많이 섭취해도 스스로 힘써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은 자라지 않는 법이다.

노동당 안에서는 우파적 반발이 거셌다. 의원단을 중심으로 한 노동당 우파는 코빈에 대한 거짓 비방에 동조하며 계속해서 코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그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몽니 부리기였고 노동계급에 대한 범죄였다.

딜레마

코빈과 노동당 좌파의 후퇴도 있었다. 코빈은 오랫동안 견지한 핵미사일 반대 입장에서 후퇴했다. 이는 반제국주의 정치와 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코빈은 브렉시트 입장에서도 후퇴해, 2016년 국민투표 결과를 뒤집을 2차 국민투표 실시 입장으로 선회했다. 브렉시트를 반대하는 유권자들조차 2016년 국민투표 결과를 이행해야 한다고 보는 상황에서 2019년 12월 총선은 브렉시트가 최대 쟁점이 됐는데, 이 입장 변경은 무원칙하고 비민주적인 데다가 코빈이 동요한다는 인상을 줬다.

노동당과 코빈이 유대인을 혐오한다는 비방에 맞서 코빈과 노동당 좌파가 싸우지 않고 후퇴한 것도 큰 실책이었다. 이 비방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정당성 훼손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코빈이 당대표를 하는 동안에도 좌파 인사가 유대인 혐오적이라는 혐의로 제명됐다. 또, 바로 얼마 전에는 코빈 자신을 노동당에서 제명하려는 우파의 공격이 있었는데, 코빈은 여기서도 물러서며 복당을 선택했다.

코빈과 노동당 좌파가 이렇게 후퇴할수록 기성 권력자들과 노동당 우파는 코빈 깎아내리기에 더 자신감을 가졌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올곧게 좌파적 신념을 고수하고 노동당의 잘못된 당론에 용기 있게 맞선 코빈의 이력을 볼 때 이런 후퇴는 그의 성품 탓은 아닐 것이다.

좌파적이더라도, 노동당의 단결 유지와 선거 승리를 가장 중시하는 정치가 그런 불가피하지 않은, 그러므로 무원칙한 타협과 후퇴의 주요 요인이었다. 즉, 의회가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보는 노동당의 정치가 근본적 문제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중앙위원장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노동당 좌파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당 좌파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노동당이 코빈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 그리고 이에 반발하면 누구든 징계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 보면 노동당 내 사회주의자들은 블레어 하에서 누렸던 만큼의 선전·선동의 여지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당의 단결’(사실은 생존)이라는 미명 하에 침묵할 것인가? 그러면 코빈 지도부 하의 노동당에 입당한 수십만 당원들을 배신하는 일일 것이다. 아니면 반항을 택할 것인가? 그러면 축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과거 노동당 좌파들은 이런 딜레마를 피할 수 있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거대한 대중 운동이 보호막이 돼 줬기 때문이다. 지금 노동당 좌파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노동당 좌파는 노동당에서 우격다짐으로 재확립되고 있는 파산한 극단적 중도 정치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해야 할 것이다.”

코빈의 부상이 가져온 기회가 유실된 데에서 결정적으로 비어 있는 고리는 노동계급 투쟁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꿀, 의회보다 거리와 일터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더 중시하는 정치와 조직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거리와 일터라는 무대에서, 선거보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중시하는 정치로, 모든 기회를 잡아 계급투쟁의 성장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임무를 잘 수행하려면 사회주의자는 계급 속에 뿌리 내려야 한다. 지금은 그것이 잔뿌리일지라도 활력이 있는 뿌리라면, 사회주의자는 계급투쟁의 전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사회주의자들이 파시스트의 성장을 저지하는 데 한몫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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