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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기후변화, 핵전쟁 위기…:
“항구적 재난”이 된 자본주의

2020년 위기는 체제의 이례적 현상이 아니라 상시적 위기의 한 모습이라고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주장한다. [ ] 안의 내용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동자 연대〉 편집부가 넣은 것이다.

“끝이 보인다. 코로나 검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 백신이 도착하기 전에라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이 끔찍한 바이러스가 등장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대단히 효과적인 백신이 여럿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일반적으로는 인류 전체, 구체적으로는 분자생물학자들)가 이룬 위대한 업적 중 하나다.”

‘코호트 격리’는 바이러스 발생뿐 아니라 끔찍한 대응도 재난의 일부임을 들춰 냈다 코호트 격리 중인 서울의 한 요양병원 ⓒ이미진

위 내용은 [유럽 최대 바이오 연구소인] 프랜시스크릭연구소의 루퍼트 빌이 12월 초에 쓴 것이다. 하지만 축배를 들기 전에, 1년 전만 하더라도 전염병 대유행 때문에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불황을 겪을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도 상상조차 못 했다는 점을 명심하자.

빌의 글은 경고로 끝난다. “우리의 기술도 빛을 발했지만 운도 따랐다. 사스-코로나바이러스-2 백신은 비교적 제조하기 쉬운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대유행할 바이러스는 이만큼 너그럽지 않을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변이가 생겨 감염이 빠르게 늘고 있는 최근 상황은 우리가 자연을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이해하는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엄중히 확인시켜 준다.

이제 우리는 전보다 더 잘 알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읽었듯이, 마이크 데이비스나 롭 월러스 같은 선구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환경 파괴로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이 세계적으로 창궐할 여건이 마련되고 있다고 오랫동안 경고해 왔다. 코로나19를 예측하기는 어려웠을지 몰라도, 5000만~1억 명이 숨졌던 1918~1919년의 끔찍했던 인플루엔자 유행[‘스페인 독감’]에 맞먹는 전염병 대유행들이 하나 이상 닥칠 것임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세계사학자 윌리엄 H 맥닐은 고전 《역병과 사람들》(1976)[국역: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한울)]에 이렇게 썼다.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기생적 유기체가 평소의 생태적 지위를 벗어나 인구 밀집 지역(오늘날 세계적으로 두드러진다)을 아마 파괴적 치명률로 새롭게 위협하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맥닐도 이해했듯, 인간과 기생 미생물(바이러스·세균)의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자본주의는 세계적 규모로 농업을 산업화했고 남아 있는 야생 지역을 침범했다. 지금 우리는 그 결과를 마주하고 있다.

재난은 더는 예외적이지 않고 정상적인 일이 됐다. 주류 정책 입안자들도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국 민주당에 지적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하는 브루킹스연구소는 차기 바이든 정부에 코로나19 위원회를 꾸려서 케네디 암살, 9·11 공격 때와 맞먹는 수준의 조사를 진행할 것을 촉구했다.

코로나19 위원회를 제안한 일레인 케이마크는 이 위원회가 도널드 트럼프의 책임을 조사할 뿐 아니라 “확률은 낮지만 강도는 높은 사건들에 어떻게 대처할지”도 다뤄야 한다고 썼다. 그런 사건들은 소위 “검은 백조”라고도 불리는데, 드물게 벌어지고, 예측하기 어렵고, 통상적 범주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일단 벌어지면 아주 충격이 크고 파괴적인 사건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그런 사건들이 “21세기에는 갈수록 잦아지고 있다.” 예컨대 “기후변화 때문에 자연 재해는 더 빈번해지고 더 위험해질 것이다.”

이런 일은 각국 지배계급에게 지적·정책적 도전 과제를 안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그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물론 우리에게 재난을 다룰 도구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세계대전에 반대해서 쓴 《유니우스 팸플릿》(1916)은 그런 도구를 제시한 고전이다. “오늘날 우리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한 세대도 더 전에 예언했듯이 지독한 선택지를 앞에 두고 있다. 한편에는 제국주의가 승리하고 모든 문화가 파괴돼 고대 로마가 겪은 인구 감소, 황폐화, 퇴보, 거대한 공동묘지화가 있다. 반대편에는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 수단들 그리고 전쟁에 맞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투쟁이 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다. 또 에릭 홉스봄은 1914~1945년을 “재난의 시대”라 불렀다. 그 기간 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 대불황, 파시즘·국가사회주의의 성공적 부상, 스탈린주의의 승리, 홀로코스트가 있었다. 이런 연쇄적 재앙을 거의 동물적 감각으로 감지한 룩셈부르크는 그 자신이 그런 재앙의 초기 희생자가 됐는데, 파시스트 무장 조직의 전신 격인 세력[자유군단]의 손에 1919년 1월에 맞아 죽은 것이다.

수년간 기후변화 피해가 크게 늘고 있다 2019년 사이클론 이다이가 동아프리카를 강타한 후의 모습 ⓒ출처 국립재해관리연구소(모잠비크)

하지만 1945년 이후 미국의 관장 아래 선진 자본주의는 서유럽과 일본에서 재건됐고, 세계 경제는 역사상 최대 호황을 구가했다. 부유한 선진국에서 노동계급이 투쟁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사반세기 동안 완전 고용이 실현됐고 복지국가가 확대됐다. 서구에서는 재난이 잦아들었다. 1950년대 초 한반도, 1960년대 중엽 인도네시아, 1970년대 말까지 인도차이나 반도의 현실은 여전히 끔찍했지만 말이다.

1970년대에는 오랫동안 계속될 경제 위기가 시작됐다(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이를 “장기 불황”이라고 부른다). 신자유주의는 그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조직 노동계급에 일련의 혹독한 패배를 안기고, 생산 구조를 재편하고(그에 따라 일부 개발도상국에서 산업화가 촉진됐다), 삶의 모든 측면을 가차없이 상품화했다. 그럼에도 체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기 확장 국면으로 재진입할 만큼 이윤율을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은 갈수록 금융 거품으로 소비와 투자를 진작시키는 데에 주로 기대게 됐다. 국가는 이런 거품 조장에 늘 일조해 왔다. 하지만 2007~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경제 성장은 중앙은행이 금융권에 돈을 새로 주입하는 데 의존하게 됐다. 그 돈 덕에 자산 시장은 호황을 구가했고, 부동산·주식·채권 가격이 치솟았고,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됐다. 신흥 경제 강국인 중국에서도 수출 산업들이 부채에 기반해 자금을 조달하는 등 비슷한 동역학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는 이제 중국 경제 성장률이 점차 하락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전제 조건

1938년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경제적 전제 조건은 자본주의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까지 일반적으로 이미 도달했다. 인류의 생산력은 정체하고 있다. 새로운 발명과 개선으로 물질적 부를 키우는 것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이는 당시에 진실이 아니었고, 지금도 확실히 그렇다. 충분히 높은 이윤율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투자가 정체해서 생산성 향상이 느려지는 것은 맞지만, 생산력은 꾸준히 커졌고, 지금도 인공지능이나 전기차 같은 발명품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19 백신이 신속하게 개발된 것도 기술 발전의 역동성을 보여 준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장기적인 경제적 정체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은 각종 조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정책 결정 과정을 지배하지만, 성배마냥 떠받들어지지 않은 지 오래됐다. 그보다는 일종의 자동 조종 장치처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같은 관료들이나 중앙은행이 관장하고 금융시장의 강제력으로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그 결과, 세계 금융 위기와 끝도 없는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불만을 극우가 이용해 주류 부르주아 정치로 치고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를 보면 알 수 있듯, 이들 세력은 일관된 대안 경제 강령을 갖고 있지 않다. 1930년대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아돌프 히틀러(가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제시한 바)와는 다르게 말이다.

체제가 무너지는 중이라고 하면 과장일 것이다. 그보다는 체제가 갈수록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파괴적인 결과를 양산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1945년 이래로 수십 년 동안 재난은 마치 갈수록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냉전기(1946~1991) 내내 배제할 수 없었던 핵전쟁이라는 파국적 재난 정도를 제외하면, 핵심 위험 요소는 (인간이 그 일부로서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연을 맹목적으로 파괴하면서 자본을 축적하는 것임이 오래전부터 분명해졌다.

이런 파괴 행위 중 가장 위험한 것은 기후 변화다.(코로나19 등도 있으므로 유일한 위험은 아니지만.) 캐나다의 생태 사회주의자 이안 앵거스가 탁월한 저서 《인류세를 마주하며》에서 주장하듯, 지구온난화는 단지 오랫동안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거나 심지어 자본주의가 18세기 말 산업 혁명과 함께 화석연료에 갈수록 의존해 온 탓만은 아니다. 유명한 하키 스틱 그래프[하단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기온 상승과 그로 인한 효과는 20세기 중엽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1939~1945년의 공업화된 전쟁[제2차세계대전](글자 그대로 석유와 석탄으로 굴러갔다), 그 뒤 전후 장기 호황 동안 안드레아스 말름이 ‘화석 자본’이라고 부른 것의 확장, 동아시아에서의 생산이 성장한 탓이었다.

'하키 스틱' 그래프 붉은색은 현대식 온도계로 측정한 기온, 파란색은 나이테, 빙하 등으로 재현한 과거 기온. 뉘어 놓은 아이스하키 스틱과 모양이 닮았다고 해서 이 별칭이 생겼다.(자료 출처: IPCC 2001년 보고서)

과학자와 활동가들은 이런 과정의 필연적 결과인 무질서한 기후 변화를 오래전부터 예견해 왔는데, 갈수록 늘고 있는 생태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그 일부였다. 이제 그 예상이 현실이 됐다. 2019년 3월 동아프리카에서 광범한 홍수와 인명 피해를 낳은 사이클론 이다이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어릴 적 짐바브웨(당시엔 ‘남로지디아’)에서 자랐고 이웃 나라 모잠비크의 항구도시 베이라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사이클론 이다이가 덮치자 베이라는 수심 6미터 아래에 잠겼고, 도시의 90퍼센트가 파괴됐고,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더 큰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다. UN에 따르면, 2020년에 동아프리카에서 홍수 피해를 입은 사람은 600만 명에 이르는데, 4년 전보다 5배나 늘었다.

예외적인 일들이 갈수록 보통이 되고 있다. 2019년 아마존 화재는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 뒤로도 오스트레일리아에 산불과 홍수가 닥쳤고 미국 서해안에 산불이 크게 일어 [그 매연 탓에] 샌프란시스코가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였다. 물론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부국은 이런 재앙에 비교적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에서 보듯 수십 년에 걸친 민영화와 긴축 탓에 국가의 [재난 대응] 역량이 줄었고 정부가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전보다 어려워졌다.(트럼프나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처럼 애초부터 대응 의지가 결여된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코로나19는 역병과 기아가 계급 사회만큼이나 오랫동안 지닌 특징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바로 가난한 이들이 재난에 훨씬 더 취약하다는 것이다. 가난하면 대응 자원도 부족하고 위험이 닥쳤을 때 벗어날 수단을 마련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망률은 인종과 계급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림 반대편의 모습은 예컨대 호화 요트 수요가 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부자들은 감염 중심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그런 요트에서 계속 사업을 벌이며 더 많은 부를 쌓고 있다.

이런 격차뿐 아니라, 많은 노동자들에게 목숨을 걸고 일상 생활에 나서도록 끊임없이 강요하는 압력을 보면, 아르헨티나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나탈리아 로메가 말한 “야만의 정상화”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위대한 급진적 비평가 발터 베냐민이 제2차세계대전 발발 직후에 지적했듯, “우리가 비상사태에 산다는 것은 예외가 아니라 법칙이다.”

재난을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는 테오도어 아도르노다. 독일계 유대인 아도르노는 나치의 권력 장악 뒤 유럽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의 친구이자 스승인 베냐민은 [나치가 세운] 프랑스 비시 정부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것이 좌절되자 1940년 9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으로 망명했던 아도르노는 1950년에 독일로 돌아갔지만 이 일을 절대 잊지 않았다. 아도르노의 역작 《부정변증법》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계 정신은 … 항구적 재난이라고 봐야 한다.” 아도르노는 이 때 “세계 정신”이 자본주의를 반어적으로 지칭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아도르노가 염두에 둔 재난은 나치와 홀로코스트였다. 그럼에도 그의 판단은 정확한 듯하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자본주의는 진작 떠났어야 할 손님이고 이제는 “항구적 재난”이 됐다. 비록 국가 폭력보다는 들불, 홍수, 전염병 같은 형태가 두드러지지만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관건은 ‘무엇을 할 것인가?’다. 아도르노는 그가 “망가진 인생”이라 부른 것 때문에 낙관을 갖기 어려웠고 다음처럼 썼다. “오늘날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재난을 피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과 “재난을 피하는 것”은 그리 쉽게 대비될 수 없다. 당연히 우리는 사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직하고 맞서야 할 것이다. 팬데믹 동안 필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고, 사용자들이 임금·노동 조건·생활 수준·자유를 침해하려 드는 것에 맞서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재난이라면, 우리 자신과 후손들의 안전을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다. [미국 민주사회당(DSA) 소속 국회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가 선도하는 ‘그린 뉴딜’ 아이디어는 자본주의에 맞서는 체계적인 대안을 향한 일보 전진이다.

하지만 제러미 코빈의 몰락은, 자본이 얼마나 거세게 저항할지를 보여 준다. 강력한 좌파를 재건하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그 핵심에 자리잡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