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대체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올해 1월 1일부터 낙태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효력을 잃었다.

낙태죄를 유지하며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한 정부 개정안이 지난해 11월에 국회로 넘어갔지만 소관 상임위원회(법사위)가 공청회만 열고 법안 심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위기가 심화하자 민주당이 위기 관리 차원에서 정부안의 처리를 강행하지 않은 듯하다.

낙태죄 일부 조항의 효력이 중지됐지만 낙태가 합법화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낙태를 하려면 여전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입법 공백’이 예고되자 지난해 말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등 보수적인 의료계 단체들은 ‘선별적 낙태 거부’를 선언했다. 조건 없는 낙태 시술은 임신 10주 미만에만 시행하고 22주 이후 시술은 거부하겠다고 했다. 정부 개정안보다 더 제한적인 지침이다.

의료계 지침은 권고 사항이라 모든 의사가 이를 따르지는 않겠지만, 많은 의사가 낙태를 선별해 시술할 것이다.

1월 8일 MBC 보도를 보면, 낙태시술 기준이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심지어 임신 8주 이내에만 된다는 곳도 있었는데, 의료계 지침보다도 더 짧다. 임신 20주도 가능하다는 병원이 있었지만, 수백만 원의 수술 비용을 요구했다.

임신 초기조차 낙태 비용이 높다. 〈조선일보〉 보도(1월 9일자)를 보면, 서울에 있는 병원의 낙태 수술비는 임신 10주 내외인 경우 100만 원가량이었다. 경기도 소재 병원들은 70만~80만 원이었다.

높은 비용 때문에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들이 겪는 고통이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모자보건법상 허용되는 낙태(극소수에 불과한)에만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현 상황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보험 적용 범위 확대는 낙태 관련 법 개정에 따라 ‘검토’하겠다고 한다.

낙태죄 효력 상실로 올해부터 낙태 의약품 도입이 가능해졌지만 현재 식약처 허가를 받은 낙태 의약품은 없는 상태다. 해외 직구로 낙태 의약품을 수입하는 것은 약사법에 따라 금지된다. 수많은 나라에서 사용되는 안전하고 편리한 낙태 방법을 한국 여성들은 음성적 방식이 아니고서는 여전히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여성들이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도록 낙태를 법적 권리로 보장해야 한다. 기간과 사유 제한 없이 여성의 낙태를 허용하고, 모든 낙태 시술(약물 요법도 포함해)에 의료보험을 적용해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 낙태 시술이 가능한 병원에 관한 정보가 공개돼야 한다.

2018년 7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 ⓒ이미진

정부와 민주당이 달라진 게 아니다

지난 연말 국회 해당 상임위에서 정부안이 처리되지 않자 여성운동 내에서 민주당에 대한 기대가 다시 커지는 듯하다.

지난해 12월 30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과 정의당·민주당 의원들이 공동주최한 온라인 토론회(‘낙태죄 폐지 이후, 정책·입법과제’)에서 권인숙, 박주민, 남인순, 윤미향 등 민주당 의원 7명이 인사말을 했다. 이 토론회를 주관한 민주당 권인숙 의원은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판단과 결정만으로 낙태를 가능하게 하는 법안을 낸 바 있다. 하지만 그가 연말연시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민주당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는 것은 부적절하다. 

지난해 말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권인숙은 낙태 문제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의 의견 차이가 굉장히 크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전향적” 시각인 반면 국민의힘은 “정부안과 한참 다른, 헌재 안에서도 훨씬 퇴행적인 안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권인숙은 민주당의 “전향적” 태도 덕분에 자신의 법안과 박주민 법안이 나왔다고 했다.

국민의힘 의원 16명이 발의한 법안이 정부안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임신 6주 이내에만 조건 없이 낙태를 허용하는 터무니없는 법안이다.

그러나 정부안은 국민의힘 의원안보다 약간 나을 뿐, 정부안 역시 낙태죄를 유지하며 낙태를 제한한다. 그리고 민주당은 정부안을 반대한 적이 없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차이를 과장하는 것이 부정직한 이유다.

권인숙 자신은 낙태죄 전면 폐지 법안과 제한 없는 낙태 허용 법안을 냈지만, 이 법안 발의에 동참한 민주당 의원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출신이고 민주당 최고위원까지 지낸 남인순 의원조차 권인숙 법안을 지지하지 않았다.

법사위원인 박주민이 대표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은 원칙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추상적인 문구만 담겼다. 10월 말 공개된 초안에서 주수 제한과 의사 거부권 조항 같이 논란이 된 부분을 모두 들어냈지만, 생색내기 발의에 가깝다. 게다가 “원칙적”이라는 표현을 넣어서 정부안과 절충할 여지도 남겼다.(권인숙 법안 발의에 동참하지 않은 남인순은 박주민 법안에는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 자체는 낙태죄 폐지와 여성의 낙태권을 옹호한 바가 없다. 낙태권 지지자들은 민주당의 몇몇 자유주의 성향 의원들의 말을 듣고서 민주당의 태도가 바뀌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추락하자 민주당이 이명박·박근혜 사면 얘기로 우파에 아부하는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

헌재가 낙태죄 자체는 위헌이 아니고 “처벌 범위가 너무 넓어서 위헌”이라고 결정했기에, 낙태죄 처벌 조항을 되살리는 입법이 불가능하지 않다. 민주당이 낙태죄 조항을 되살리지 않아도 의료법 등으로 의료진을 처벌할 수도 있다.

4월 재보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기회주의적으로 법안 처리를 미룰 가능성도 있지만, 결국 낙태를 제한적으로만 허용하는 법안(정부안이나 정부안 수정안)을 통과시키려 할 공산이 크다. 정부와 민주당도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목표를 보수파들과 마찬가지로 공유하고, 여성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생각을 위험하다고 여긴다.

여성 엔지오들이 주도하는 연대체 ‘모낙폐’는 낙태죄 폐지와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을 옳게 주장해 왔다. 하지만 청와대와 민주당에게서 독립적이지 못한 모습도 보였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 초부터 낙태죄를 유지할 뜻을 드러냈지만, 청와대 비판은 삼갔다. 지난해 낙태죄를 유지하는 정부 개정안이 나오자 정부를 비판했지만, 민주당이 정부안을 연내 처리하지 않자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을 누그러뜨리는 성명을 냈다.

낙태죄를 유지하며 허용 범위를 일부만 넓히는 문재인 정부의 입장이 바뀌지는 않았다. 개혁 배신으로 대중의 불신을 받는 문재인 정부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서 실질적 개혁을 성취할 수는 없다.

우파와 문재인 정부 모두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전진해야 한다. 낙태권 투쟁은 그 일부로서만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