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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10주년:
반란의 튀니지, 그 10년

2011년 1월 19일 튀니지의 시위대 튀니지 혁명은 혁명이 지난 역사나 추상적 이론이 아닌 현실일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출처 Nasser Nouri(플리커)

혁명은 난데없이 벌어지는 듯 보일 수 있다. 10년 전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은 세계를 뒤바꿨다.

튀니지 시디부지드시(市)에서 과일과 야채를 파는 26세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시청 앞에서 분신한 지 이제 10년이 지났다.

부아지지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하고 외치고는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그날 이른 시각 경찰은 부아지지에 욕설과 구타를 퍼붓고 매대를 압수했다. 경찰에 줄 뇌물이 없던 부아지지는 매대를 돌려 달라고 사정하려고 시청에 갔다.

시청에서 괄시를 당한 후 부아지지는 석유 한 통을 들고 돌아왔다.

부아지지는 튀니지 정권이 저개발 상태로 방치한 빈민가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많은 또래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부아지지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다. 먹여 살려야 할 여덟 식구의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억척같이 살았다.

부아지지가 경찰에게 괴롭힘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의 여동생 레일라는 훗날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괴롭힘이 오죽 심했으면 젊은 남자가 그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시디부지드에서는 인맥이나 뇌물이 없으면 수모와 모욕을 주고, 살지도 못하게 합니다.”

부아지지의 분신은 똑같이 가난과 실업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공명을 일으켰다. 중간계급을 비롯해 사회의 광범한 층들에 충격을 줬다.

부아지지가 분신한 바로 그날 12월 17일, 튀니지 혁명 첫 번째 시위가 벌어졌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시디부지드에서 유례가 드문 시위가 일어났다. 며칠 동안 비슷한 시위가 다른 크고 작은 도시들로 번졌다.

실업률이 튀니지 평균인 13퍼센트보다 훨씬 높은 곳들이었다.

튀니지 사회주의자 자우하르 바니는 〈소셜리스트 워커〉에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적 불평등은 튀니지 혁명에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일부 지역들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문제가 혁명을 전진시키는 쟁점의 하나였습니다.

탄압

“혁명은 기회가 더 적은 주변부 지역에서 대도시로, 수도로 번졌습니다.” 사실, 2008년 튀니지 가프사주(州)에서 실업 문제로 벌어진 시위는 다가올 튀니지 혁명의 맛보기 같은 사건이었다.

이 지역의 인산염 광산은 노동자 가구의 유일한 수입원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실업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연대했다.

이는 소규모 반란으로까지 나아갔지만 가프사주 바깥으로 번지지는 않았고 끝내 대규모 탄압으로 분쇄됐다.

2010년에는 시위가 마침내 주(州)를 넘어 확산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을 겨냥했다. 실업 문제와 정권의 부패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게 드러난 것도 그렇게 된 한 가지 이유였다.

또 다른 이유는 국가의 탄압이었다. 23년간 튀니지를 통치한 독재자 벤 알리는 잔혹한 경찰력을 동원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낮게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바니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문제가 독재 정권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독재 정권은 여당의 특권을 유지했습니다.

“탄압을 받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찰과 맞설 때, 자신들을 오랫동안 억압해 온 바로 그 정권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위가 계속되면서 경찰은 더한층 잔혹해졌다.

저항

튀니지 중부 도시 카세린과 탈라에서는 무장한 저격수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사망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이런 탄압은 더 많은 행동에 불을 지폈을 뿐이다.

시위는 대도시로, 중등학교로, 대학가로 번졌다. 시위대는 벤 알리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매우 중요하게도 항쟁은 튀니지 최대 노동조합인 튀니지노동총연맹(UGTT)에 행동에 나서라고 압력을 넣었다.

노조 지도자들이 어디서나 그렇듯이 UGTT 지도자들도 조합원들과 튀니지 지배계급 사이를 중재하는 것을 자신들의 구실로 여겼다.

UGTT 지도자들은 정권과 매우 긴밀했다. 정권은 이들에게 의존해 노동자들의 저항을 단속해 왔다.

그러나 혁명이 확산되면서, UGTT 지도자들은 기층 조합원들의 압력을 받게 됐다. 이미 조합원 다수가 시위에 동참하고 있었고 스스로 파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2011년 1월 14일 UGTT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파업 전날 벤 알리는 양보안을 발표하는 절박한 연설을 했지만 대중의 분노만 돋울 뿐이었다.

파업 당일 벤 알리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런데 군대가 벤 알리에게 등을 돌렸다. 군대는 벤 알리의 가족 몇 명을 체포했지만, 벤 알리 자신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쳤다.

반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총리 모하메드 간누시가 임시 대통령직에 오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튀니지인들은 정권 전체를 끌어내리고자 했다.

2011년 1월 19일 튀니지의 시위대 독재자 벤 알리가 물러난 후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출처 Nasser Nouri(플리커)

대규모 거리 시위가 거듭 벌어졌다. UGTT 지도자들은 새 정부의 내각을 지지했지만, 조합원들은 튀니지 곳곳에서 파업을 지속했다.

2월 27일이 되자 간누시 정부도 물러나야 했다.

혁명이 전 세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혁명은 미국과 그 동맹들이 중동·북아프리카에서 전쟁과 개입을 정당화하며 들먹여 온 명분을 산산조각 냈다.

미국과 그 동맹들은 아랍 세계와 무슬림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외부의 개입으로만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자유 시장으로만 진보가 가능하다고 떠들어 댔었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한 이런 혁명들은 미국 제국주의와의 협력에 의존해 온 독재자들을 위협했다.

튀니지에서 벌어진 일은 다른 아랍 나라들에서도 항쟁과 반란을 고무했다.

벤 알리 퇴진 후 고작 며칠 만인 1월 25일 이집트에서 거대한 시위와 함께 혁명이 시작됐다. 행진에 나선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혁명! 이집트에서 혁명!” 튀니지의 반란은 다른 나라들의 대중들도 고무했다.

2011년 내내 튀니지 혁명을 촉발한 것과 똑같은 자유 시장 정책과 긴축에 맞선 시위들로 점철됐다.

저항이 가능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정서가 있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이 그 한복판에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에게 튀니지 혁명은 혁명이 지나간 역사나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증거였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우울한 한계에 대한 대안이 존재함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튀니지 혁명은 혁명이 가능하고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제 정권이 두려워 할 차례입니다”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망명해 현재 런던에 거주하는 튀니지 사회주의자 모하메드 바니는 튀니지 혁명 당시 총파업에 참가했다. 아래는 당시 바니가 전한 소식을 축약한 것이다.]

“12시 30분에 튀니스에 도착해 곧장 부르기바가(街)의 시위 현장으로 갔습니다. 시위는 어마어마했습니다. 6만 5000명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이전까지 튀니지에서 수백 명 규모 이상의 시위가 벌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전 시위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하고 사람들이 머리에 총을 맞아 뇌가 흘러나오고 두개골이 박살난 충격적인 사진과 영상이 인터넷에 나돈 이후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런 사진과 영상들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습니다. 이제 정권이 두려워할 차례가 됐습니다.

“우리 대열은 내무부 청사 앞에 있었습니다. 시위는 매우 평화로웠습니다.

“오후 4시쯤 경찰이 갑자기 공격했습니다.

“바로 전날 밤에 살해당한 시위 참가자의 장례 행렬이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경찰은 그 행렬을 빌미 삼아 모두를 공격했습니다.

“경찰은 최루탄을 쐈습니다. 총성이 들렸어요. 사람들은 ‘최루탄이 아냐, 실탄이야’ 하고 말했습니다.

“두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그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제 처남은 지붕 위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됐습니다.

“처남은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어. 경찰이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있다고!’

“정권의 지도적 인사들이 소유한 주택들이 불에 탔습니다.

“대형 쇼핑몰 거의 모두가 불에 탔습니다. 경찰서들도 불에 탔고요.

“많은 튀니스 사람들이 그랬듯, 우리도 지역위원회를 세워 [친정부] 무장 집단으로부터 우리 동네를 지켰습니다.

바리케이드

“우리는 가구로 바리케이드를 쌓아 도로를 봉쇄했습니다.

“또한 동네를 순찰했고, 통금 시간 이후 돌아다니는 차는 모두 수상쩍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튀니지에는 55년 동안 대통령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24시간 만에 두 명이 교체됐죠.

[정부는] 튀니스를 봉쇄했지만, 이미 다른 지역에서 거리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늙은 벤 알리의 패거리가 권좌를 부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