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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와 민주주의 투쟁

미얀마 노동자들은 아웅산 수치 같은 자유주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믿고 사용해야 한다 2월 22일 시위에 나선 미얀마 노동자들 ⓒ출처 Prachatai(플리커)

거리는 시위대로 미어터졌다. 학생들은 즉석에서 만든 군사 정부 규탄 현수막을 들고 무리 지어 시위대를 누비며 구호를 외쳤다.

하얀 가운을 입은 병원 노동자 대표들이 안전모를 쓴 기술자들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한데 섞였다.

이는 오늘날 미얀마(버마)의 모습일 수도 있고, 2007년과 1988년에 미얀마를 뒤덮은 시위대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운동들은 모두,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군사 정권에 맞서 이해관계가 같다는 환상 때문에 패배했다.

현재 대규모 시위 물결에도 노동자 대표들이 빼곡히 찼다. 이들이야말로 혹독한 탄압으로 낭자했던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저항의 역사를 만들 희망이다.

그러나 기회를 포착하려면, 평범한 사람들이 말만 그럴싸한 자유주의자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힘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1988년 8월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은 이 운동을 “8888 항쟁”이라고 불렀다. 이 운동은 그보다 몇 달 전 벌어진 사소해 보이는 사건(아래 서술할 양곤의 한 찻집에서 음악 때문에 일어난 다툼)을 계기로 촉발됐다.

죽음

정부 하급 관리의 아들이 한 학생을 찔러 죽였는데, 군부는 이 살인을 덮으려고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졌다. 이들은 이미 오랫동안 이어진 군부 독재와 경제 침체에 분노하고 있었다.

1962년 이래로 군사 정권을 이끌던 장군 네 윈은 시위 진압 경찰을 보내 학생들을 유혈 진압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

목격자 버틸 린트너는 허다했던 대학살 중 하나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하얀 다리’ 라고 부르던 지하 배수로를 나오자마자 멈춰섰다. 철조망이 우리 앞 도로를 가로질러 쳐 있었다. 공포스럽게도 그 너머에는 군인들이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채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이를 보고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오금이 저렸다. ‘론테인’[시위 진압 경찰 특수부대] 수백 명이 철모를 쓰고 곤봉, 소총, 강철로 날을 세운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 [진압] 명령이 떨어지자 론테인은 학생들에게 돌격했다.

“곤봉이 바람 소리를 내면 뼈가 부러졌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의 신음과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 한 시간쯤 지나자, 광란의 폭력이 끝났다.

“시체들은 피로 웅덩이를 만들며 거리에 온통 널브러져 있었다. ‘하얀 다리’도 붉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운동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탄압 때문에 [군부 독재 규탄] 운동이 노동자와 지식인 모두에 확산됐다.

정권은 정면 대결로 응수했다. 1988년 8월 정부는 학생 시위 진압을 지휘한 장군 세인 르윈을 수반으로 내세웠다. 르윈은 곧장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몇 주 동안은 투쟁이 들끓었다. 대규모 시위와 수백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벌어졌다. 군 기관들이 정부에 등을 돌렸다. 한 달 동안 군 장성들은 완전히 마비됐다.

노동자들은 지역 위원회를 수립했고 농촌에서는 농부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임금과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투쟁을 민주주의 투쟁과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이들에게 두 문제는 본질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노동자와 학생들이 무리 지어 관공서 건물들을 습격했다. 정권이 완전히 끝장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운동 내 분단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운동 지도부를 구성하던 작지만 중요한 계층인 중간계급 지식인들은 아래로부터의 행동에 겁을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권의 통제에서 자유로워지길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 자신이 새로운 미얀마를 주도하기를 바랐다. 거리 전투와 파업을 벌이는 빈민촌 폭도가 아니라 말이다.

이 유복한 자들은, 겉보기에는 민주적이지만 다수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체제에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았다.

르윈은 계산된 움직임 하에 사임했고 이후 정권은 군사 정권을 지지하는 민간인을 수반으로 내세웠다.

군부는 이로써 민주주의 운동의 “존경받는” 지도부가 좀 더 “난폭한” 부위를 통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 시점에서 전에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인물인 아웅산 수치가 무대의 중심에 섰다.

수치는 영국 식민 점령에 맞서다 암살당한 독립 투사 아웅산의 딸이다. 미얀마인 대다수가 아웅산을 “국부(國父)”라고 여겼다.

수치는 옥스퍼드대학교를 나왔고 유럽인과 결혼했으며 유엔에서 활동했다.

이제 수치는, 군사 독재를 싫어한 일군의 퇴역 장교들과 함께 민족민주동맹(NLD)을 창당했다. 민족민주동맹은 시위의 필요성을 인정하긴 했지만 시위를 이용해 총선을 치르라고 압박하려 했지 급진적 변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의 얼굴로 급부상하면서, 수치는 운동을 투쟁 국면에서 화해 국면으로 돌리려 애썼다.

8월 말 대규모 시위에서 수치는 참가자들에게 “군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말라”고 호소했고 민주주의 요구는 오직 “평화적 수단”으로만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치의 등장은 정권이 재정비하고 수치 자신을 포함한 운동을 분쇄할 시간을 벌어줬을 뿐이다.

운동의 약점을 감지한 군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폭력으로 수치에게 보복했다. 군 부대가 양곤으로 돌아와 마주치는 자라면 누구든 죽였다.

군대는 비무장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했고, 시위 지도자들을 산 채로 불태우는 잔혹 행위도 저질렀다.

수치를 비롯해 탈출한 활동가 중 다수는 이후 감옥에 갇히거나 가택 연금됐다.

노동자 운동은 잠시 주도권을 잡았지만, 이제 그런 때는 지나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정권은 자신을 민주적이라고 포장하려 했다. 제한적인 선거가 열렸고, 대개 적대적이었던 국제 여론을 돌릴 목적에서 특정 개혁 조처들이 허용됐다.

2007년 유가 상승 때문에 소규모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이에 열정적으로 호응했다.

군사 정권 깡패들이 행진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자, 불교 승려들이 운동에 참가했다. 곧 유가 인상 규탄 시위가 확산됐고, 또다시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승려들은 부활한 운동의 선두에 섰고 대중 운동을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승려들은 성명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사악한 군부가 폭정을 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군사 정권은 승려들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민중을 궁핍으로 내몰고 있다. 군사 정권은 모든 시민들의 공동의 적이다.”

이번에는 아웅산 수치와 민족민주동맹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지난번 운동 때보다] 훨씬 굳건했고, 노동자 행동은 훨씬 제한적이었다.

군부가 곧 민주 정부에 자리를 내주리라는 기대가 만연했다.

그러나 부활한 운동은 또다시 군경의 탄압을 받았고 곧 사그라들었다.

미국이 미얀마 정치에 개입한 것은 운동의 불씨를 꺼뜨리는 데에 일조했다.

당시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정부는 미얀마를 미국의 핵심 경제적 경쟁국인 중국에 맞선 동맹으로 삼는 것이 전략적으로 커다란 득이 되리라 여겼다.

군사 정권은 민족민주동맹과 몇 년에 걸쳐 타협안을 협상했다.

이 때문에 수치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고, 군부가 상당한 의석을 보장받는 총선이 치러졌다.

이 합의는 자유주의 지식인 계층에게도 흡족한 것이었다.

이후 치러진 2015년 총선에서 민족민주동맹은 압승했고 수치가 국가 수반이 됐다. 수치는 재빨리 군부와 화해했다.

계급

새 정부와 군부는 경제 문제에 관해 여전히 살아 있는 계급적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버마 민족주의 물결을 이용했다.

새 정부는 몇몇 집단들이 미얀마에 “제휴시민”*일 뿐이라고 규정하는 인종차별적 법들을 되살렸다(이 법은 영국의 식민 통치 시절 제정되고 이후 군정이 이용했던 것이다). 더 심하게 악마화된 집단도 있었다. 특히 라킨주(州) 출신의 로힝야 무슬림들이 수치 정부의 표적이 됐다.

군대가 날뛰며 로힝야족을 그들의 거주 지역에서 공격했고, 나중에는 [로힝야족] 반정부 무장 저항 세력을 분쇄하려 했다.

그 후 인종 청소가 이어졌다. 군대는 강간과 살인을 저질렀고, [로힝야족의] 주택에 불을 질렀다.

로힝야족 수십만 명이 미얀마와 이웃한 방글라데시로 쫓겨났고 아직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군부가 수치 정부를 끌어내린 후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왔다. 군부는 자신들의 통제력에 수치가 가한 온건한 위협조차도 참을 수 없었던 듯하다.

군 장성들은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이 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에 기회가 돼 마침내 운동이 군부의 실권을 빼앗을까 두려워했다.

지난 30년의 교훈은, 군부를 타도할 힘은 노동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아웅산 수치와 그 부하들이 절대 상상할 수도, 제공할 수도 없는 민주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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