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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 - 닫힐 줄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

석 달 전 ‘X파일’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일부 좌파들은 노무현이 그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부패한 구세력과 ‘개혁세력’ 간 대결구도”(〈사회화와노동〉 275호)에서 “노무현 정권은 수구보수세력에 대한 정치적 타격을 가하고, 상대적 차별성을 가진 개혁적 이미지를 한층 높이려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다”(〈노동자의 힘〉 86호)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분석에 기초해 ‘X파일공대위’를 폄하하며, 자신들의 항의 운동 불참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과 전망은 잘못됐다. 먼저, 현실에서 노무현은 전혀 상황을 주도하는 행위자가 아니었다. 그는 “지배세력 내에서 주도권을 획득”(〈사회화와노동〉 275호)하기는커녕 대중의 깊은 환멸과 지배계급의 압력 사이에서 꼴사납게 줄타기를 해왔다.

그는 “97년 대선자금 수사는 안 된다”(8월 24일)며 삼성을 ‘비호’했다가, 반발이 있자 “삼성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9월 27일)며 대중의 눈치를 살피고, 그러다 얼마 못 가 ‘삼성카드·삼성생명 분리대응 방침’(10월 4일)으로 되돌아갔다.

양쪽의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 하다 결국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마는 익숙한 상황이 재연됐다.

이른바 “국민 정서” 때문에 노무현은 그가 보호하고자 한 지배자들을 완전히 지켜 줄 수 없었다. 삼성과 이건희 일가는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수난’을 치르고 있다. 여차하면 필생의 과업인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는 판국이다.

우파들은 노무현이 “반삼성 정책을 통해 … 좌파 성향인 반기업 정서를 확산·조장한다”(한나라당 김무성)며 신경질을 냈다.

전임 김대중 정부의 핵심인사들도 ― 특히 전임 국정원장들 ― 불법도청 혐의로 구속될 위기에 처해 있다.

반면, 대중이 보기에 노무현은 여전히 ‘삼성 감싸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형적으로, 금산법 논란에 대한 두 달 간의 조사 끝에 노무현은 금산법 부칙 조항 삽입은 그저 “절차상 문제”이고 “법리상 타당하다”고 결론내렸다.

덕분에 노무현의 인기는 더 떨어졌다. X파일 폭로 직후에 23.1퍼센트(7월 26일)이던 지지율은 9월 27일 현재 20.4퍼센트로 떨어졌다(〈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열우당 지지율은 역대 집권당 최저인 13.3퍼센트다(〈리서치앤리서치〉 10월 5일치).

지배계급 다수파와 대중 양쪽 모두에게 노무현의 인기가 원체 형편없다 보니 국가기구에 대한 통제력은 더욱 약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 김대중 정부 시절 불법도청에 대한 수사가 급물살을 타는 것은 노무현으로서는 전혀 바라지 않았을 일이다. 노무현은 전임자인 김대중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써왔다. 전임 국정원장들이 ― 김은성처럼 ― ‘나만 죽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폭로전이 더 확대될 수 있다. 지난 6일 청와대 제1부속실장 윤태영은 “대통령의 권력도 무기력하다”고 말했다.

지난 석 달 동안 ‘공멸’은 피해야 한다는 지배자들 사이의 공감대가 최악의 파국을 막는 안전판 노릇을 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내가 더 밑질 수는 없다’는 계산 때문에 서로 약점을 들춰내는 일이 계속됐다. 대중의 환멸과 불신은 더욱 심화됐다.

노무현이 제시한 ‘가이드라인’들은 한편으로는 대중의 압력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자들의 분열 때문에, 대부분 공문구가 돼 버렸다.

지배자들이 아직 ‘판도라의 상자’를 덮지 못하고 있는 근본 배경은 대중의 골 깊은 환멸과 비록 소수이지만 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행동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기를 삼가는 급진 좌파는 지금이라도 이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