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4월 2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 발제문을 개정·증보한 것이다.


3월 18일 알래스카에서 미·중 관리들은 ‘인권 문제’로 설전을 벌였으나, 이들 중에 대중의 시민적 권리에 진정 관심 있는 사람은 없다 ⓒ출처 미 국무부

3월 18일 미국 알래스카에서 미국과 중국의 2+2 고위급 외교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은 양측의 첨예한 설전으로 이목을 끌었다. 미국의 국무장관과 백악관 안보보좌관, 중국의 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원과 외교부장이 일반적인 외교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격하게 논쟁한 것이다. 양측의 쟁점은 광범했는데, 그중 인권 문제가 포함돼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 앤터니 블링컨은 신장과 홍콩 등지에서 벌인 중국 정부의 조처에 깊이 우려한다고 말했다. 이 회담 전날에 미국 바이든 정부는 중국 시진핑 정부가 홍콩 민주주의와 자치를 훼손했다면서 중국·홍콩 관리 24명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미국 측의 비난에 대해 중국공산당 정치국원 양제츠도 응수했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자면,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대사 “너나 잘하세요”였다. “미국의 인권이 최저 수준이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학살당하고 있지 않냐.” 그는 인권·민주주의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말라며, 미국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보편적 기준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에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식 민주주의가 있다.”

이 회담 이후 바이든 정부는 《2020년 국가별 인권 보고서》에 중국 정부가 신장 위구르족을 “집단 학살”한다고 적시했다. 미국·캐나다·유럽연합 등이 위구르족과 홍콩 문제를 이유로 중국에 제재 조처를 내렸고, 중국이 이에 맞불을 놓았다.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에서 점증하는 무력 시위, 반도체·5G·인공지능 등 첨단기술 경쟁과 맞물려 ‘인권’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전임 트럼프 정부 하에서도 미·중 갈등이 심화됐지만, 당시에는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가 주된 쟁점이 아니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말기부터 달라졌다. 지난해 트럼프 정부의 국무장관 폼페이오 등은 중국을 가리켜 민주주의·자유와 대립되는 전체주의, 권위주의 체제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정부는 2020년 5월에 내놓은 《대중국 전략적 접근》 보고서 등 공식 문서에서도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인간의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라는 미국의 절대 신념과 양보할 수 없는 인간 권리라는 미국의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 정치인들은 최근 부쩍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이라고 포장한다. 바이든 정부는 이 방향으로 더 밀어붙이려 한다. 특히, 동맹을 결집시키려는 맥락에서 말이다. 대선 기간에 바이든은 대통령에 취임하면 “국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하겠다고 공언했다. 중국·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에 대적해 미국 주도 하에 동맹국과 파트너들의 결집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호응해, 영국 보리스 존슨 정부는 기존의 G7을 확장해 D10(Democracy 10), 즉 ‘민주주의 10개국 협의체’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제국주의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민주 vs 반민주 갈등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갈등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축적의 동역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히 자본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경쟁이 지배적인 특징인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이다. 이 경쟁은 경제적 형태뿐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형태도 띠며, 궁극으로는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귀결될 수 있다. 레닌과 부하린이 강조했듯이, 제국주의의 핵심은 강대국들 사이의 지배권 다툼에 있다.

미국은 오랫동안(20세기 후반부)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서열 맨 꼭대기를 차지했지만, 21세기부터는 이 지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경쟁자 중국 등을 상대로 꼭대기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팬데믹 속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제 격차는 더 줄어들었다. 지난해 중국 국내총생산(GDP)이 처음으로 미국 GDP의 70퍼센트를 넘었다. 이 추세라면 2028년에는 중국의 GDP가 미국을 추월할지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물론 중국 경제가 앞으로 순탄하게 성장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설사 중국 GDP가 미국 GDP를 따라잡더라도, 미국의 세계 패권이 바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2020년 현재 중국의 1인당 GDP는 여전히 미국의 6분의 1 수준이다. 중국의 GDP가 미국을 추월해도 미국과 중국의 1인당 GDP 격차는 상당할 것이다. 군사력과 세계 금융 지배력 등에서도 미국은 한동안 중국에 비해 우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바로 그런 맥락 속에서 양측의 인권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은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를 국내외에서 자국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동원하고 있다. 사실 양국 지배자들은 모두 인권 문제에서 매우 위선적이다.

바이든은 중국을 비난하며 인권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 그가 구상하는 소위 ‘민주주의’ 진영에 포함되는 각국 정상들 중에는 팔레스타인 억압으로 악명 높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무슬림 살해 방조자이자 농민 탄압자 인도의 모디, “브라질의 트럼프”라는 극우 대통령 보우소나루처럼 인권·민주주의와는 동떨어진 강성 우익 정부 수반들이 있다.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 비해 서구 국가가 표현의 자유 등 시민적 자유를 더 많이 보장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 지배자들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런 자유를 제한하려고 해 온 역사로 점철돼 있다. 바이든만 해도, 경찰이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벌여 논란이 되자 ‘몸통 대신 다리를 쏘라’고 했다. 그는 중남미 이민자들을 막는 국경 통제 강화도 지지해 왔다. 바이든 취임 직후에 텍사스주 이민자 아동 구금 시설이 재가동된 것도 들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이 염원하는 민주주의와 서구 지배자들이 실행하는 민주주의는 다르다. 예컨대, ‘통치 과정에 대한 대중의 능동적 참여’를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으로 꼽는 명분과는 달리, 서방 지배자들에게는 ‘기업 활동의 자유’가 실제로 더 중요하다. 즉, 이들의 민주주의에서 그 사회적·경제적 핵심은 이윤과 재산, 소수 권력이다. 2003년 민주주의를 강요하겠다며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 부시 정부가 가장 열을 올린 일이 석유와 군사기지와 민영화 등 규제 완화였던 까닭이다. 또한 부시 정부가 보기에 이라크의 민주주의에는 미국에 ‘No’ 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돼서는 안 되므로 대중적 지지가 약한 소수 친미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몰아 줬다.

한편, 중국의 인권 문제들 가운데 특히 신장 위구르족 문제를 보자. 신장 위구르족 문제는 중국의 한족 제국주의 민낯을 보여 주는 민족 문제다. 마오쩌둥 혁명 직후부터 중국은 위구르족 등 현지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장 지역을 차지하고 그곳에 한족을 대거 이주시켜 왔다.

오늘날 중국 신장 자치구에 사는 위구르족 1000만 명은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고 온갖 천대를 당하면서 한족 제국주의에 저항해 왔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인들의 저항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여긴다. 신장 지역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인 데다, 자결권 문제에서 위구르인들에게 양보하면 다른 소수민족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가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의 위구르인 탄압 실상은 여러 차례 폭로돼 왔다. 예컨대, 2017년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중국 당국의 내부 문서를 입수해 많은 위구르인들이 ‘전문 직업훈련 시설’이라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폭로했다. ICIJ는 이 시설들에 최대 100만 명까지 수용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위구르족이 억압받고 있음을 부인하기 일쑤다. 마지못해 일부 탄압 사실들을 인정할 때도 그것이 서구 정부들의 치안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조처라고 하거나, ‘직업훈련 정책’을 비롯한 반테러 정책 덕분에 신장에서 테러리즘과 이슬람 극단주의가 사라지고 안정과 번영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한다. 많은 위구르인들이 바로 그 극단주의자로 몰리고 ‘안정과 번영’에서 배제돼 있다.

얼마 전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이렇게 말했다. “각국은 문명과 전통이 다르고 발전 단계도 상이하며 인권에 대한 이해도 저마다 강조점이 다르다.” 중국의 인권 기준은 서구와는 다르니 내정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국 당국의 인권 상대주의는 당장에 중국 헌법과도 모순된다. 이에 따르면 중국 국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고 중국 사회는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중국이 서구 사회보다 본질적으로 진일보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사회주의 사회라면 시민적·정치적 권리들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보다 훨씬 신장돼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권리들이 체계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가짜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 신장 문제를 처음으로 ‘집단 학살과 반(反)인도적 범죄’로 분류했다. 그러나 미국이 신장 위구르 문제로 중국을 비난하는 것은 엄청난 위선이다.

2001년 9·11 공격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할 때, 위구르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중국 신장 지역에 인접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미국은 중국 정부와 협력해, 이슬람 근본주의와의 연계가 의심되는 위구르인들을 감시했다. 미국과 유엔은 위구르인 저항단체들을 테러 조직으로 규정했고, 소위 ‘테러리스트’들을 가두는 미국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한때 최소 20명 이상의 위구르인들이 갇혀 있는 게 확인됐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바이든을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은 위구르인들을 걱정하는 척한다. 실로 악어의 눈물에 불과한 것이다.

악어의 눈물

미국이든 중국이든 자본주의 강대국 지배자들은 자국의 대외 정책과 관련된 이데올로기 문제를 중시한다. 자신들의 대외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민 대중이 자국의 대외 정책을 지지하고 단결하게끔 촉진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틈만 나면 민주주의, 인권을 운운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모두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합리화이고 궤변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서로 경쟁하는 열강 그 어느 쪽도 지지하지 말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 그리고 천대받는 대중의 민주주의와 그들의 인권을 위해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투쟁의 전진을 지향해야 한다.


미얀마 쿠데타에 관한 강대국들의 위선

최근 미얀마 상황에 대한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대응에서도 이들의 위선이 드러난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같은 자본주의 열강 중에 미얀마 쿠데타와 이에 맞선 저항을 놓고 미얀마 대중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쪽은 없다.

중국 정부는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3월 27일 미얀마인 100여 명이 군경의 진압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중국 정부는 같은 날 열린 ‘미얀마군의 날’ 열병식에 대사관 인사들을 참석시켰다.

이는 중국 정부가 미얀마에 인접한 국경의 안정과 인도양 진출 통로로서 미얀마의 지정학적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한때 이 목적을 위해 아웅산 수치 등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미국 등의 서구 정치인들은 미얀마 군부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해친다고 비난하고 군부의 유혈 진압을 규탄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에 미얀마 군부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던 자들이다. 예컨대, 미국 오바마 정부는 미얀마 군사 정부의 ‘민주화’ 노력을 긍정하며, 미얀마가 체제 전환의 모범국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지금도 미국 등은 미얀마 군부를 압박하는 데 신중하다. 앞에서는 군부를 비난하면서도, 뒤에서는 대중국 포위라는 지정학적 목표를 위해 미얀마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더 이익이 될지를 두고 냉혹하게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것이다.

즉, 중국이든 미국이든 미얀마에 진정 바라는 것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는 ‘안정’이지 미얀마 내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이 아니다.

그동안 미국은 미얀마 군부의 권력이 유지되는 ‘민주화 로드맵’을 지지했다. 2012년 오바마와 미얀마 군사정권 대통령 테인 셰인의 정상회담 ⓒ출처 백악관

유엔은 다를까?

유엔 등이 중심이 된 “국제 사회”가 미얀마에 압력과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잖다. 그러나 유엔의 핵심은 안보리로, 이런 허울좋은 제국주의 국제기구에 개입을 호소하는 것은 미얀마인들의 해방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유엔은 처음에 제2차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국제 질서를 조성하려고 합의해 만든 기구다. 당시 유엔의 기본적 설계는 미국 국무부가 담당했다.

이렇게 생래적으로 유엔에는 제국주의적 질서가 반영돼 있기 때문에 전 세계 노동계급을 비롯한 피억압 대중한테 소용없거나 해롭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유엔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거나 군사 개입을 정당화했다. 유엔은 결성된 지 얼마 안 된 1947년 시온주의 국가(이스라엘)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해 팔레스타인인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땅을 빼앗는 것을 방관했다. 그리고 유엔은 1950년 한국전쟁의 미국 참전, 1990~1991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처럼 미국의 전쟁을 유엔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줬다.

혹여 유엔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상충되는 결정을 할 듯하면,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이를 무력화했다. 예컨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나 러시아의 체첸 침공에 대해 유엔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유엔 회원국들의 관계는 결코 평등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민 참여가 확장된들 유엔이 “자본가들의 신성동맹”임(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에 대한 코민테른의 비판)은 바뀌지 않는다. 유엔은 고쳐 쓸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유엔 안보리 국가들의 의견이 엇갈려 있어 지금 미얀마에 유엔이 관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사 강대국들의 타협이 이뤄져 유엔이 미얀마 상황에 개입한들, 유엔의 구실은 군부와 민족민주동맹(NLD) 사이의 협상 중재일 공산이 크다(〈경향신문〉 2021년 4월 3일).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큰 결론은 NLD와 군부가 공존했던 쿠데타 직전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는 군부의 권력이 연장되는 것일 뿐이다.

일각에서는 미얀마에 유엔의 ‘보호책임’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호책임’은 “인도주의적 개입”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 ‘보호책임’ 원칙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는 바로 2011년 리비아 개입이었다. 독재자 카다피에 맞선 리비아인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나토는 유엔 결의에 따라 리비아인들을 보호하겠다며 군사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1만 건 가까운 나토의 공습 속에 항쟁은 엉뚱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리비아 사람들 머리 위로 나토 전투기가 떨군 폭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후 리비아인들은 기나긴 혼돈 속에 여태껏 서방 개입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같은 해 바레인에서 일어난 반독재 대중 항쟁은 친미 국가인 사우디까지 개입해 유혈 진압됐지만,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이를 수수방관했다.

미얀마 노동계급은 다른 천대받는 사회집단과 소수민족 등을 이끌고 스스로 해방을 쟁취할 잠재력을 갖고 있고 지금 군부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는 일관된 국제주의 정신에 따라 “국제 사회”(즉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실현되기를 바라야 한다.


‘인도주의적 개입’의 경험

미국 등 서구와 유엔의 “인도주의적” 개입이 결코 현지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상시키지 않았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20세기 후반에 서구 열강은 지역 독재 정권과 전쟁을 할 때가 많았다. 예컨대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격돌한 포클랜드 전쟁이 있었고, 특히 냉전 해체 후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미국의 일방주의가 강화되면서 이런 전쟁이 많이 벌어졌다. 서구 열강은 이런 전쟁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인도주의적” 목적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미국이 주도해 독재자를 응징한다며 벌인 1990~1991년 이라크 전쟁으로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희생됐다. 이후의 10년이 넘는 경제 제재로 이라크에서 100만 명이 넘게 사망했는데, 그중 절반이 아동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03년 미국의 점령으로 이라크는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됐고, 그 지옥에서 작은 괴물인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가 잉태됐다.

2001년 9·11 공격 직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때 미국의 침공이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해방과 제대로 된 “국가 건설”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아프가니스탄 곳곳을 파괴하고 수십만 명을 살해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해방되기는커녕 기나긴 전쟁 속에 절망해 왔다.

1990년대 미국이 주도해 나토는 “인도주의”를 표방하며 발칸반도 내전에 개입했다. 인종 청소를 당하는 사람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수많은 민간인들이 나토 폭격으로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토의 군사 개입은 민족 간 갈등을 오히려 악화시키고 새로운 인종 청소가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나토가 인종 청소의 원흉으로 지목한 세르비아 독재자 밀로셰비치는 정작 나토의 공습이 아니라 2000년 가을 대중 항쟁으로 축출됐다.

‘보호책임’이든 ‘인도주의적 개입’이든 그 어떤 이름을 붙여도 제국주의 국가들이 현지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전쟁을 벌이는 것은 깡패짓이고,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런 것이 용인되면 제국주의 열강은 누가 악당인지 아닌지를 자의적으로 선택해 훨씬 쉽게 무력을 행사할 것이다.

2010년 아이티의 유엔군. 유엔군과 미군은 아이티에서 군사적 필요와 부유층 보호를 중시했고, 구호 활동에서는 완전히 무능했다 ⓒ출처 Nicolas Jolliet

바이든 정부와 북한 인권 문제

바이든 정부는 중국 인권을 문제 삼는 한편, 북한 인권에 대한 비판도 강화했다. 미국 국무부는 《2020년 국가별 인권보고서》를 발표하며, 북한 인권 상황을 “세계 최악 중 하나”라고 지목했다. 그리고 바이든 정부의 새 대북 정책에서 인권이 필수 요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북한에는 인권 문제가 실재한다.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관료적(전면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여서, 그리고 김정은 등의 북한 관료들이 착취를 강화하려고 억압적 조처들을 체계적으로 시행해서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서구 정치인들이 북한의 인권을 문제 삼을 자격은 없다. 무엇보다, 대북 인권 공세는 미국과 서유럽의 제국주의적 대북 압박이 지속·강화되는 맥락 속에서 제기되고 있다. 즉, 북한 인권 문제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대북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등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문제 삼아 제재를 가하고 위협을 강화해 왔다. 그러나 국제적 맥락에서 미국은 핵 위협과 인권 등 모든 문제에서 북한과는 비교가 안 되는 진정한 깡패 국가다.

북한 인권은 서방의 개입과 압력으로 개선될 수 없다. 제재는 평범한 북한 대중의 삶을 더 궁핍하게 만들고, 서방의 제국주의적 대북 압력 행사와 개입은 북한 내부에서 정권과 인민 대중의 결속을 키워 북한 노동자들이 자력 해방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오히려 차단할 뿐이다.

팬데믹 때문에 대북 제재를 완화하자는 제안이 나오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그러면서 북한의 “지독한 인권 상황” 운운한다 ⓒ출처 조선중앙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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