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 160년:
무엇이 머뭇거리던 링컨을 변화시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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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내전(남북전쟁)에서 중심적인 인물의 하나였다. 노예제를 폐지한 인물로 추앙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통합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노예 해방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다음은 2012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을 계기로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에 실린 기사를 일부 번역한 것으로, 미국 역사가 브라이언 켈리가 미국 내전 당시 링컨의 변화와 링컨이 했던 구실을 균형 있게 살펴본다. 영화 내용에 관한 부분은 생략했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노예제폐지론자인 리디아 마리아 차일드는 링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노예제에 맞서겠다는 그의 의지만큼은 “꾸준히 성장해 왔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링컨을 비판한 많은 확고한 노예제폐지론자들도 링컨이 자신의 보수성을 넘어 성장했음을 인정했다. 역사가 에릭 포너가 최근에 말했듯이 이것이 “움직이는 링컨”의 모습이었다. 링컨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태를 좌우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고백하건대 사태가 나를 좌우했다.”
남북전쟁이 시작된 지 반년, 유럽 지배계급은 이 전쟁의 혁명적 의의를 한사코 무시하고 있었고, 링컨은 경계주
공격
마르크스가 보기에 상층의 정치와 노예들의 자주적 활동, 북부군의 전략 변화는 하나로 이어진 역동적인 전체였다. 흑인·백인을 불문한 최상의 노예제폐지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도 노예제를 정면 공격하기를 주저하는 초기의 링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전쟁 초기에도 마르크스는 링컨에 대한 노예제폐지론자들의 불만을 공유했다. 링컨이 경계주 노예 소유주들의 “이익, 편견, 정서에 유화적이고,” “미봉책”을 펴고, “적들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자 악의 근원인 노예제 자체를 제대로 타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부가 군사적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해서
마르크스의 확신은 1862년에 입증됐다.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을 통해 자신의 전향을 알렸을 뿐 아니라 전쟁의 판도를 크게 뒤바꿨다. 마르크스는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까지 우리가 목도한 것은 내전의 제1 막에 불과하다. 이것은 헌법적 교전이었다. 이제 혁명적 교전이라는 제2 막을 앞두고 있다.”
링컨을 온전하게 평가하기 위한 소재들은 스필버그의 영화
압력
이런 상황에 부응할 필요성을 느낀 북부군 지휘관들은 공화당과 머뭇거리는 링컨 행정부에게 노예해방 조처를 과감하게 밀어붙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애이브러햄 링컨은 주저하는 혁명가였다. 그 혁명은 반민주적인 노예 소유 지배계급에 맞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혁명이었다. 노예 소유주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싸울 태세였다. 링컨은 그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사건들의 힘에 떠밀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예제에 내리는 벼락”을 동원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비록 더뎠지만 링컨은 도전에 응했고 퇴행적인 사회 질서에 맞서 미국 부르주아지의 승리를 완수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앞서 노예들과 그들의 동맹들이 잉태한 것이었으며, 수많은 북부군 병사들의 목숨과 희생을 대가로 얻어낸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남부연합의 패배를 축하하며 이를 세계사적 전진이라 했다. 이전에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을 대표해 1864년 재선을 축하하는 서한을 링컨에게 보냈다. 미국에서 노예 소유주들이 주도하는 “반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유럽 노동자들은 그 반란을 분쇄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롭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끼고 있으며, “과거에 성취한 성과들의 운명도 대서양 건너편의 저 거대한 충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마르크스는 썼다.
노예제의 붕괴는 미국 내에서 새로운 계급 정치의 기회를 열어 줬다. “노예제의 죽음에서 생겨난 새로운 활기”는 8시간 노동을 둘러싼 새로운 행동뿐 아니라,
마르크스가 미국 내전을 “지금 시대의 가장 큰 사건”이라고 본 것은 옳았다. 노예제가 심어 놓은 인종 간 분열을 극복할지도 모를 새로운 노동계급 운동을 위한 토대가 노예제의 패배로 마련됐다는 지적 또한 옳았다. 남부연합이 승리했다면 흑인 노예제는 미국 전체로 확산됐을 것이고 북부 백인 노동자들이 쟁취한 얼마 안 되는 민주적 권리는 무력화됐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전체에 자본주의가 공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면서 또 다른 전망이 제기됐고, 궁극적으로는 그 전망이 실현됐다. 서부의 인디언 학살 전쟁이 최종적으로 완수됐고, 산업 기업이 성장했으며, 그들의 요구하에 새로운 노동계급 운동이 군사적으로 짓밟혔다. 미국 제국주의가 극적으로 팽창했고, 노예들과 그 후손들은 새로운 야만적 폭력·인종차별·착취 체제에 다시 종속됐다.
노예 소유주인 경쟁자들을 패배시킨 부르주아지는 기대에 가득 찬 노동계급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노예해방의 시기를 지난 노예제폐지론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은 노동자 운동에서 갈 길을 찾고 인종 평등을 위한 투쟁을 지속했다. 링컨이 게티스버그에서 약속한 “새로운 자유의 탄생”은 이윤을 위한 새로운 각축전 속에서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본 미국 남북전쟁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했다. 1848년 혁명이 패배한 후 혁명의 경험으로 급진화한 많은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노예제폐지 운동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거나 나중에는 북부군 장교가 되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미국으로 건너간 급진적인 독일인들과 연락하고 미국과 유럽의 언론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사태를 추적했다. 1860년 1월 미주리주
브라운 처형 이후 1860년 대선 동안 전쟁 위기는 심화했다. 반
영국의 강력한 “면직업계 이해당사자”들이 남부 노예주를 지원할 명분을 찾아내려 하고 있고, 링컨이 노예제를 건드리기를 주저하는 바람에 전쟁에 명분이 없다는 비난에 힘이 실리던 시점에 마르크스는 예리한 대안적 분석을 제시했다. “남부는 지리적으로 북부와 확실하게 나뉜 영역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하나로 뭉쳐 있지도 않다. 남부는 나라도 아니다. 전투 구호에 불과하다.” 링컨이 노예제와 정면대결에 나서든 말든 남부 노예주들은 “노예제를 확장하고 지속시키기 위한 정복 전쟁”에 착수할 것이다.
영국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쟁을 분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남부연합에 동조하는
마르크스가 썼듯이 언론들은 “주마다 노동자들에게
1864년 링컨이 대통령에 재선했을 때 제1인터내셔널의 축하 서한을 작성한 것은 바로 마르크스였다. “‘노예주들의 권력에 저항하겠다’는 것이 첫 선거 때의 신중한 표어였다면, 이번 재선의 의기양양한 전투 구호는 ‘노예제에 죽음을’이다.” 북부의 승리가 미국에서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환상을 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부가 승리하면 국제적으로 반동이 강화될 것이고, 노예제가 타도되면 미국과 미국 바깥의 노동자들이 더 대담해질 것임을 이해했다. 전쟁이 끝나가고 노예제가 살아남지 못할 것처럼 보이자 마르크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거대한 변화가 이토록 빨리 일어난 적은 없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이로운 영향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