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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사회주의자가 말한다:
아시아계 인종 차별의 뿌리는 미국 자본주의·제국주의에 있다

다음은 미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 ‘마르크스21’이 3월 26일 개최한 온라인 토론회 ‘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파장과 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증오 범죄의 증가’에서 버지니아 로디노가 발표한 내용을 글로 정리·편집한 것이다. 버지니아 로디노는 AFL-CIO 아시아·태평양계노동자연합 메릴린드주 대표이자 인종차별 반대 연대체 ‘증오에 맞서 단결하자’의 간사이고, ‘마르크스21’ 회원이자 한국계 미국인이다. [ ] 안의 내용은 〈노동자 연대〉 편집부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취약한 아시아인 이민자 집단에 속했다 ⓒ출처 Andrew Ratto(플리커)

한 명은 전직 초등학교 교사였고, 다른 한 명은 젊은 시절 무용수였다.

한 사람은 싱글맘이었다.

최소 두 사람은 할머니였다.

최소 네 사람은 미국 시민이었다.

상당수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희생자 둘은 이혼 이후 금전적으로 불안정하게 살았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희생자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다수는 취약한 아시아인 이민자 집단에 속했다.

버지니아 로디노

198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계 미국인의 중위 가계소득은 백인과 같은 수준이 되거나 더 높아졌지만, 아시아·태평양계(AAPI, 아시아계 미국인과 태평양 섬 주민들) 중 가장 취약한 노동계급, 싱글맘들은 일자리 기회가 적고 사회 안전망도 거의 없는 처지다.

팬데믹

트럼프 정권하에서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폭력이 급증했다는 것은 수많은 증거들로 입증돼 왔고 지난 몇 주간 더 밝히 드러났다.

비영리 단체 ‘아시아·태평양계 혐오를 멈춰라’는 지난 1년 동안 아시아계에 대한 폭력이 3800건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그중 503건은 2021년에 벌어졌다. 피해자의 압도 다수는 여성이었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경우, 살해된 여성들이 종사한 일의 성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괴롭힘과 폭력, 낙인 찍기를 당하기 쉬운 업종에서 일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심지어 같은 인종 내에서도 그런 취급을 받는 업종이다. 그리고 어머니나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들도 이런 업종에 고용될 때가 많다.

언어 장벽과 나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기회가 제한된 이런 중년 여성들은 서구인들이 꺼리는 서비스 부문의 저임금 일자리에 흔히 취업한다. 많은 수는 이미 더 정규적인 일자리를 찾으려고 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다. 미등록 노동자들에게 불법 마사지 산업 일자리는 다른 일자리에 견줘 취업 문턱이 낮다. 많은 경우 고용주들은 서류나 노동허가증, 경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일자리에 종사하는 많은 여성들이 어린 아이를 양육하지만 지원은 거의 받지 못한다. 그래서 저녁이나 퇴근 시간대 이후 아이들이 잠들었을 때 할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 모든 어려움이 팬데믹으로 악화됐다. 식당이나 네일샵 같은 곳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속출했고 양육을 위한 안전망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지하경제로 유입됐다. 유색인종 여성은 이번에도 훨씬 큰 고통을 받은 것이다.

성판매

따라서 아시아계를 겨냥한 최근의 공격들을 이해하는 데에서 성판매자에 대한 공격이라는 요소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를 간과하면 아시아계에 대한 이 특정한 인종차별에서 핵심적인 문제를 놓치게 된다. 바로 아시아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문제다. 그들의 몸은 물건처럼 취급되고, 아시아 여성은 마사지 업소에서 당연히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마사지 업소와 성매매를 똑같은 것으로 뭉뚱그려 보는 시각은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인종차별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점이다.

애틀랜타 총격범은 자신이 총을 난사한 스파 업소들을 두고 “없애고 싶은 유혹이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적어도, 그 업소들이 [그를 유혹하는 음성적 영업을] 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종차별, 성차별, 성판매자에 대한 적개심이 결합돼 아시아계에 대한 폭력이 벌어진 것이다. 어찌 됐든 이 범죄는 궁극적으로 성판매 여성을 겨냥한 것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업소가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곳이었다고 해도, 문제는 결국 성판매 문제로 귀착된다. 이 여성들은 사실상 성판매 여성으로 여겨지고 그런 이유로 희생양이 되고 있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희생자들이 인신매매와 성매매 산업의 피해자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들이 종사한 산업 자체가 왜곡된 이미지를 이용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 산업을 규제하고 단속할 때 업소들을 불시 습격하는 방식을 채택할 때가 많다. 여성들을 더 괴롭히고 상처 입히는 방식이다. 한 활동가는 이들이 꼭두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길거리에 쫓겨나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한 번은 경찰이 불시 단속으로 아시아계 여성 두 명을 붙잡아 수갑을 채우고 경찰차 뒷좌석에 앉혔는데, 그중 한 명이 흐느껴 울다가 호흡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이런 처우나 그에 따른 체포는 매우 흔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여성들은 마사지 산업에서 일하면서 (거의 모든 경우 백인 남성들에게) 폭력을 당한 피해자일 때가 많다. 물론 이들은 자기가 당한 일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경찰이 오히려 자신을 체포하거나, 신분증이나 휴대폰, 전자 기기, 신용카드, 현금 같은 것들을 압수해 버리는 경험을 직접 하거나 접했기 때문이다. 인신매매범이나, 이 여성들을 등쳐먹는 고용주들은 이 여성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이 여성들은 신고했다가는 추방되거나 법적 지위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이 여성들은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다. 누구를 믿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지 못한다.

경찰 예산을 늘려서 마사지 업소 노동자들을 지키게 하거나, 차이나타운을 지키는 특별 경찰팀을 꾸리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경찰에 들어갈 돈을 전부 다 아시아계 사람들의 노동 문제를 해결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 여성들이 집세를 내고, 팬데믹 시기에 마땅히 받아야 하지만 못 받고 있는 지원을 받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직장에서의 폭력 문제임을 강조해야 한다. 이민 노동자들이 맞닥뜨리는 장벽 때문에, 그들이 보호받거나 규제되지도 않고 음지에서 이뤄지는 일자리로 실제로 내몰린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이런 업종을 존속케 하는 이 체제는 여성이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 인종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팬데믹 동안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격이 급증했다 ⓒ출처 Joe Brusky / MTEA

아시아계 인종 차별의 역사

극심한 인종차별이 단지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듯, 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증오도 단지 애틀랜타 총격 사건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세기에 아시아에서 부를 뽑아내려고 혈안이 된 서구 열강은 일본과 중국을 개방시켰다. 이들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비단·차·은 등을 수입했다. 중국이 아편을 불법화해 아편 무역을 중단시키려 하자 열강은 두 차례 아편전쟁을 벌였다. 중국은 패했고 유럽과 미국 기업들에 문호를 더 개방하게 됐다. 그러면서 ‘약하고 병든 중국인’이라는 100년도 더 된 고정관념이 생겼다.

전쟁은 거대한 이주 물결을 촉발했다. 수많은 아시아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불결하고 지저분한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따라붙었다. 미국에 온 아시아인들은 인종적으로 분리된 정착촌에 살 것을 강요받았다. 이런 정착촌은 때때로 차이나타운, 저팬타운, 필리피노타운으로 성장했다. 이민자가 늘어나자 이들에 대한 공격도 심해졌다.

이런 공격에는 많은 경우 경제적 동기가 있었다. 그러나 인종적 우월감에 의해 부추겨지기도 했다. 백인들은 중국인들이 석탄 광산에서 가장 좋은 광맥을 차지하고, 가장 좋은 사금 채취터를 잠식하고, 백인이 부쳐 먹을 기름진 땅을 부쳐 먹고 있다고 비난했다. 백인들은 집회를 열어 “중국 역병”을 규탄했다. 삶의 터전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을 질병으로 취급한 것이다. 오랫동안 폭력적인 만행이 이어졌다. 1886년에만 캘리포니아의 차이나타운 십여 곳이 폭도에 의해 잿더미가 됐다.

대륙횡단철도

센트럴퍼시픽 철도 회사는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부터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시작하면서 중국인 이주민 2만 명을 고용했다. 전체 회사 노동력의 90퍼센트에 이르는 수였다. 철도 투자가들이 처음부터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백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실패하자(일이 너무 험해서 금세 일을 그만뒀다)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 목숨을 건 위험한 그 일을 떠맡긴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인을 배척하는 정서가 팽배해졌다. 골드러시 시기[1840~1860년대]에 대부분 캘리포니아로 건너온 중국인 이민자들은 외부자, 외국인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일자리를 몹시 찾아 헤매고 몸과 마음 모두 취약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이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도로 팽배해,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지방 정부들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시민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반(反)중국인 법들을 통과시켰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대륙횡단철도 건설 현장에 취업했다. 그들이 철도를 건설하면서 해낸 일들은 정말 놀라웠다. 오늘날 거대한 기계로 하는 일들을 맨손으로 해냈다. 터널을 파고 옹벽을 쌓았다. 필요하다면 폭약을 심고 터뜨리기도 했다. 동료들이 자신을 제때 꺼내주리라는 믿음 하나에 목숨을 걸고서 말이다.

이런 온갖 위험한 일들을 했는데도 중국인 노동자들은 백인 노동자보다 30퍼센트 적은 임금을 받았고 숙식도 제공받지 못했다. 가혹한 기상 조건과 위험천만한 작업에 비춰 보면 건설 과정에서 중국인 노동자 1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온갖 어려움과 위험에도 이들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공사를 끝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지독한 괴롭힘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1867년 중국인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조직하고 저항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일손을 멈췄고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8일 동안 투쟁을 이어갔다. 당시 노동자 권리를 요구하는 가장 큰 파업의 하나였다.

노동자들이 이처럼 힘을 선보인 것에 대응해,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온갖 법이 통과됐다. 교육, 문화적 관습, 기업 활동 등 많은 것을 제약하는 법이었다. 소위 ‘백인 남성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법률도 통과됐다. 캘리포니아주는 백인과 “검둥이, 물라토[혼혈인], 몽골계”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된 후에도 일부 중국인 노동자들은 전국을 가로지르는 철도에서 계속 일했지만, 다른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다른 일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후 수십 년 동안 인종차별과 인종적 적대가 전국적으로 심해졌다. 중국인들은 폭력의 표적이 됐고 백인들의 일자리를 훔쳐간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 정점은 1882년 중국인배척법이었다. 중국인 이민자 입국을 일체 금지하고, 중국인 노동자들이 정부 사업에서 일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다. 이러한 금지는 입국 이민자 수 제한을 해제한 1965년 이민국적법이 통과될 때까지 사실상 계속 이어졌다.

중국인배척법의 가장 직접적인 전례는 1875년 ‘페이지법’이었다. 이 법은 “중국, 일본 등 동양 나라”의 성판매 여성의 입국만을 금지하는 법이었다. 당시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는 아시아 여성에 대해 그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편견을 드러냈다. “그들 중 우리 나라로 건너와 명예롭거나 유익한 일에 종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1800년대 말 여러 주들이 백인 남성 우월 이데올로기를 지키려 하고 그랜트가 아시아계 여성의 몸을 악마화하면서, 아시아계 미국인을 상대로 한 집단 폭력은 더 잦아졌다. 진 펠저의 저서 《축출: 중국계 미국인들과의 잊혀진 전쟁》은 1880년대에 일어난 잊혀진 폭동과 축출, 린치 등을 자세히 다룬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자라 격리되기까지 했다. 1900년 3월 6일, 한 중국계 미국인의 죽음이 선페스트[페스트의 일종] 때문일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샌프란시스코시] 당국은 차이나타운을 폐쇄했다. 경찰은 부근에 차단선을 쳤고 남아 있는 백인들을 호위해서 데리고 나왔다. 보건 관료들은 가시 철망으로 그곳을 둘러싸기로 결정했다. 정치인들은 중국인들을 가둔 수십여 블록에 이르는 지역을 불태워버리는 것까지 고려하기도 했다. 결국 그러지는 않기로 했지만 대신 차이나타운 둘레에 높은 장벽을 세웠다.

제국주의 전쟁

미국이 일으킨 전쟁을 피해 아시아계 이민자와 난민들이 잇달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도 폭력에 직면했다. 1930년 캘리포니아주 왓슨빌에서는 젊은 필리핀 남성 노동자들이 택시-댄스홀[돈을 받고 일정 시간 댄스 파트너를 해 주는 여성들을 고용한 무도장]에서 백인 여성과 춤을 추는 것에 반발한 백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941년에는 제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에 몰아넣었다.

[각종 아시아인들을 낮잡아 부르는] “국”(gook)이라는 비하적 표현은 한국전쟁 이후 베트남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재활용됐다. 제2차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이 잇달아 벌어지면서 고위 장성들은 아시아에서 여러 전쟁을 치렀다.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등지로 보낼 미군 병사들에게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심을 필요성이 생겼다. 미군 병사들은 베트남인들이 사람이 아니라 “국”이라고 교육받았다.

미군은 한국전쟁 동안 미군 병사를 상대하는 한국의 성판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데에 관여했다.]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 협정으로 중단됐지만, 1965년에도 [주한] 미군 병사 85퍼센트가 성판매 여성과 “시간을 보내”거나 “관계를 했다”고 설문에 답했다.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문화적 태도와 편견은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군 생활과 성매매가 얽히게 되는 것처럼 이런 편견은 미국 문화의 일부가 됐다. 그 기원은 잊혀지고 은폐된 채, 아시아 여성을 극도로 성적 대상화하는 편견은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 됐다. 미군 병사들에 의한 아시아 여성 성폭행은 비일비재했지만 처벌되지 않았다. 1994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미국 해병대원 3명이 12세 초등학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미국 언론들은 그 문제에 그나마 관심을 보였다.

아시아계 여성들이 성적으로 대상화됐다면, 아시아계 남성들은 비하의 대상이 되고 파산한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됐다.

1982년 디트로이트에서 젊은 중국계 미국인 설계사인 빈센트 친이 자신의 총각 파티가 열리던 스트립클럽 바깥에서 두 백인 자동차공장 노동자에게 맞아 죽었다. 두 범인은 친을 야구방망이로 공격하기 전에 비하적인 말로 그를 도발했다. 중국인과 일본인 모두를 비하했다. 마치 요즘 팬데믹 시기에 온갖 종류의 아시아계 미국인을 중국인으로 여기고는 공격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범인들은 [일본인인] ‘너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고 친을 질타했다. 판사는 친을 죽인 자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감옥에 보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는 애틀랜타 총격범을 동정한 조지아주 보안관 제이 베이커를 떠올리게 한다. 베이커도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굉장히 지친 상태고 일종의 막다른 지경에 있다. 어제는 그에게 정말 나쁜 하루였고 결국 그런 일을 저지렀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살해 행위는 결코 멈췄던 적이 없다. 1989년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에서는 캄보디아계와 베트남계 아이들이 가득한 학교 운동장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총격범은 5명을 죽이고 32명을 다치게 했다. 2012년에는 위스콘신주 오크크리크 사원에서 시크교도 미국인 6명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아시아인들이 트럼프 등의 “중국 바이러스” 운운에 반발한 것은 그것이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과민반응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계를 향한 광분의 1년은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백화점에서 아이를 칼로 찌르고, 노인에게 불을 붙이고, 노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노인을 밀쳐 넘어뜨려서 사망하게 하기도 했다. 여성이 공격받는 비율은 남성의 곱절이었다. 여성들은 쫓겨 다니고, 두들겨 맞고, 침을 맞았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오염 물질이나 병원균, 질병이라도 되는 양, 마치 백인 세상을 더럽히는 오점인양 말이다.

오래 전 그랜트 대통령이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드러낸 왜곡된 편견을 제이 베이커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유혹”을 “제거”하고 싶어 했을 뿐이라고 총격범을 두둔하는 말을 해서 우리를 아연케 했다. 베이커의 기자회견에서 두드러졌던 것은 그가 대부분 노동계급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인 희생자들이 아니라 “나쁜 하루”를 보낸 총격범을 동정했다는 것이다.

3월 21일 워싱턴DC에서 열린 아시아계 혐오 중단 촉구 집회에 참가한 흑인 ⓒ출처 Victoria Pickering(플리커)

다인종·다민족 연대가 필요하다

미국에서 ‘마르크스21’ 회원들은 이민자 권리를 지키기 위한 연대체에서 활동하며,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에 대한 연대를 건설하고,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맞선 공동 투쟁을 건설하고 있다. 이런 활동들이야말로 미국과 그 밖의 나라에서 아시아·태평양계 차별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이다.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들이 미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도 여러 세기 동안 흑인 해방 투쟁이 이어진 덕분이다. 그러나 흑인-아시아인 연대의 역사는 자주 역사책에서 지워지기도 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중국 이민자의 딸이자 2015년에 100세의 나이로 별세한 그레이스 리 보그스는 임차인 권리와 노동자 권리를 위해 활동했고, ‘블랙 파워’ 운동의 비흑인 여성 지도자의 하나였다.

유리 코치야마의 사례도 있다. 코치야마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진주만 공습 이후 그의 아버지는 수술이 막 끝난 상황임에도 체포돼 병원에 구금됐다. 그러고 얼마 안 가 사망했다.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에 몰아넣은] 1934년 대통령 루스벨트의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해 코치야마의 가족은 2년 동안 아칸소주 제롬에 있는 수용소에서 살게 됐다.

코치야마의 정치 활동은 1960년대 초 할렘에서 시작됐다. 그곳에서 코치야마는 아시아계, 흑인, 제3세계 출신 미국인들의 권리와 인권을 요구하는 운동과 소수인종 연구,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가했다. 코치야마는 “인종차별은 모든 소수 인종 사람들을 비슷하게 차별받고, 빈곤해지고, 주변화되는 처지로 내몰았다”고 지적하며, 흑인 해방 투쟁과 연관을 맺을 더 정치적인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을 건설하려 했다. 1963년에 코치야마는 맬컴 엑스를 만났고, 맬컴 엑스가 설립한 아프리카계미국인단결기구(OAAU)에 가입해서 인종차별에 맞서 정의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1967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 징집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크고 강력한 미국을 위해 내 형제,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들, 곤경 속에서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쏘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치 않는 일이다.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나? 저 사람들은 나를 검둥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에게 린치를 가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개를 풀지도 않았다. 나의 국적을 빼앗지도 않았고, 내 부모를 강간하거나 살해하지도 않았다 ⋯ 어찌 저 불쌍한 사람들을 쏘란 말인가? 차라리 나를 감옥에 가둬라.”

피부색이 다른 인종 집단들을 이간하고 대중 운동 내에 존재하는 다인종 연대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히 자본주의 체제에 득이 된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부지런하고 준법 정신이 투철하다는 ‘모범적 소수’ 신화와, 그들이 그런 자질 덕분에 다른 인종보다 더 성공할 수 있었다는 착각이 아시아계 미국인들과 다른 인종, 특히 흑인들 사이를 벌려 놓는 데에서 상당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 경이로우리만치 강력했던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은 눈부신 다인종·다민족적 연대를 낳았다. 그 덕분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 젊은이들,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그 밖의 운동들은 2021년 3월 애틀란타 총격 사건 이후 아시아·태평양계 혐오에 맞서 더 신속하고 긴밀하게 함께 집회와 시위, 추모 행사, 온라인 행사를 열고 있다.

‘마르크스21’ 회원들은 이런 연대 활동을 하면서, 연대체 ‘증오에 맞서 단결하자’에서 파시즘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네트워크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여성·아시아인·이민자·노동자들을 겨냥한 폭력의 물결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대응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로서 분열과 불화를 조장하는 거짓말을 무너뜨리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종·민족·젠더·체류자격을 넘나드는 계급 의식을 건설해야 한다.

동지들, 우리는 할 수 있다!

유튜브 관련 온라인 토론 영상 한국계 미국인 사회주의자 초청:
미국의 아시아계 인종차별, 왜 악화되며 대안은 무엇인가?

2021-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