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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민중의 피로 경제성장의 시동 걸기

노무현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에 박정희가 파병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미국의 강요만은 아니었다.

사실, 남한 지배자들은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반공 청부 전쟁을 자청해 왔다. 예를 들어 이승만은 1954년에 베트남에 1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베트남뿐 아니라 라오스 내전에서 위기에 빠진 푸오미 노사반 우익 군사정부를 지원하겠다고 했고, 1962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좌파 공격에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특히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부터 미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거듭 제안했다. 그의 좌익 경력에 대한 미국의 의심을 거두게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미국은 이 제안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유보’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닉슨 정권 들어 미국이 전선을 확대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게 되자 한국군 파병은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지금의 이라크 전쟁과 마찬가지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해 있었다. 미국은 유엔의 인정도 받지 못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자신의 동맹국에 파병을 종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들은 냉담했다. 영국은 기껏해야 6명의 의장대를 ‘파병’했고, 프랑스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독자 노선을 취했다. 미국의 ‘더 많은 국가들을 참여시키려는 캠페인’(More Flag Campaign)은 실패작이었다. 박정희만이 이 캠페인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그 즈음 박정희가 추진하던 대체산업화 성장 전략은 파산했다. 경제 지표는 악화했고 한일회담을 둘러싼 정권 최초의 정치 위기가 심화하고 있었다.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정권에게 여러모로 탈출구였다.

박정희는 “자유 우방을 도와주기 위해 파병해야 한다”고 했지만, 한국군 파병은 베트남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심지어 남베트남의 지배자들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3국군의 개입이 가뜩이나 취약한 자신들의 정통성을 더욱 훼손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당시 수상이던 판 후이 콰트와 국방장관 티우도 제3국군 파견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군 파병은 1964년 9월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 파견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파병에 대한 의미있는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당시 한일회담에는 반대했지만 민족주의적 시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파병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이보다 좀더 많은 사람들은 파병을 가난 탈출의 기회로 여겼다.

도널드 스턴 맥도널드가 인용한 미국의 미해제 기록은 전투병 파병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9월에 시행한 어느 국민여론조사를 보면, 베트남 파병 사실을 알고 있는 조사 대상자 중 57.6퍼센트가 전투병 파병에 찬성했다.”

다음 해인 1965년 1월에는 수송부대와 공병부대 등 2차 파병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파병에 대한 찬반 논란은 2차 파병 때부터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반대가 전쟁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는 초기에 신중론 또는 반대론이 우세한 반면 야당 진영에서는 원칙적인 찬성론이 우세했다”고 한홍구는 썼다. 2차 파병 동의안은 찬성 106, 반대11, 기권 8표로 무난히 통과됐다.

의무대와 공병대의 파병은 결국 전투병 파병으로 이어졌다. 3차 파병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됐을 때 야당은 한일기본협정에 대한 반발로 표결에 기권했지만, 이들이 파병동의안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야당인 민중당의 조윤형은 “전투병을 파견하여 이를 국위선양과 멸공통일의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군 파병은 2만 명의 전투병 추가 파병을 요구하는 4차 파병 동의안으로 이어졌다.

추가 파병이 계속되는데 이렇다 할 반전 흐름이 만들어지지 않은 데는 주류 언론도 한몫 했다. 국민들은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지 못했다.

한홍구가 말하듯이 “1965년만 해도 한국군의 전사자 수가 정기적으로 신문에 보도됐지만, 한국군의 사망자 수가 3백 명을 넘어서면서부터 이런 기사는 슬그머니 신문에서 사라졌다.”

한편, 한국군 파병은 북한을 자극했다. 북한은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으로 동북아시아에서 한미일 3각동맹이 강화되는 것에 긴장했다.

이에 북한은 1968년 1월 특수부대를 청와대 앞까지 침투시켰고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박정희는 술주정을 부리면서까지 즉각적인 대북한 전쟁을 원했지만,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는 미국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미국의 대답은 “전쟁을 하려면 혼자 하시오”였다.

북한의 무력 행위는 남한의 베트남 전쟁 참가 확대에 비례했다. 예를 들어, 정전협정 위반 사례는 1965년 88회에서 1968년 985회로 급증했고, 베트남에서 본격적인 철수가 시작되는 1972년에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1968년 3월에 배치될 예정으로 논의된 1개 경보병 사단의 추가 파병 논의는 중단됐다. 대신 남한에서 박정희 정권의 사회통제와 독재는 강화됐다.

박정희는 참전 기간에 1967년 동백림 사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등 공안사건을 터뜨렸다. 또, 경향신문을 폐간시켜 언론 통제를 강화했고, 주민등록제도를 통해 일상적인 주민 감시 체제를 만들었다. 이런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는 1969년 9월 14일 3선 개헌을 단행해 장기독재의 길을 열 수 있었다.

당시 외무장관 이동원은 “월남은 전장터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베트남 전쟁은 남한 재벌에게는 축복이었다.

당시 한국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은 논란거리다. 파병하지 않은 일본이 가장 큰 이익을 봤고, 겨우 20명을 파병한 대만과 비슷했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성장의 시동을 걸 수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정성진이 말하듯이 1960년대 후반기의 “연평균 성장률은 11.8퍼센트로서 1960년대 전반의 실질성장률 5.5퍼센트의 두 배가 넘는다.” “한국은 베트남 참전국으로서 파병군인의 송금, 미군의 물자조달 등을 중심으로 연간 2억 달러, 1965∼72년 누계 10억 2천2백만 달러에 달하는 특수를 얻었다.” 또, 한국은 당시 미국의 ‘바이 아메리칸’ 정책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얻어 다른 제3세계 나라들과는 달리 미국 시장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한국군은 1964∼73년에 연인원 32만 명이 참전했다. 이 기간에 한국군은 모두 1천1백70회의 대대급 이상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 회의 소규모 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4천6백87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불구가 됐다. 그리고 “4만 1천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어느 조사를 보면 9천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 장기집권과 경제 성장의 발판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베트남 민중과 가난한 남한 병사들의 피로 점철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