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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 후퇴 시도:
산업재해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산재 사망은 이윤체제가 저지르는 구조적 살인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에 열린 ‘2021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조승진

내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주들이 개악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중대재해 대상을 줄이고, 경영자의 책임과 의무를 감면하고, 경영자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들고, 처벌도 더 약화시키자는 것이다.(관련 기사: 본지 364호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더 난도질하자는 재계, 호응하는 정부’)

재계와 보수 언론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이 너무 강력하다며 볼멘소리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은 이미 정부와 여야의 후퇴로 누더기가 됐다. 그래서 기업주 처벌을 강화해 안전 의무를 강제하고자 한 취지가 크게 퇴색됐다.

대표적으로 50인 미만 영세사업장 적용은 3년 유예돼 2024년 1월에야 시행된다. 2020년 산재 사망사고(질병 제외)의 81퍼센트(714명)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벌어졌는데 말이다.

또, 건설 산업에서 원청이라 할 수 있는 발주처와 임대인이 책임과 처벌 대상에서 제외됐다. 최근 민주노총 등이 ‘2021년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한 한익스프레스는 화재 사고로 38명이 사망한 이천 물류창고의 발주처였다. 한익스프레스 관리자는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 위반으로 솜방망이 처분(집행유예)을 받았는데, 중대재해처벌법으로는 아예 처벌 대상도 아니다.

재계는 책임자 처벌이 능사가 아니고 예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치 자신들이 예방은 잘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믿고 안전 고삐를 풀어 왔다.

민주노총이 2013~2017년 산안법 위반 사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재범률이 97퍼센트나 됐다.

얼마 전 노동부 특별근로감독에서 산안법 위반 사항이 총 59건 지적된 태영건설은 올해 1~3월 사이 매달 1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런데 대표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2월에는 사망자 발생 이후 경기도로부터 영업정지 3개월의 행정명령을 받았지만, 이조차 법원에서 취소 가처분신청이 인용돼 곧바로 영업을 재개했다. 그러다 또 사망자를 냈다.

이처럼 중대재해와 산재는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기업, 그런 기업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국가 기관들에 의해 반복돼 왔다.

2022년까지 산재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던 문재인 정부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2020년 전체 산재(사고와 질병)는 2019년보다 되레 늘어 2062명을 기록했다. 정부가 중대재해처벌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시행령에서 또다시 후퇴할 조짐을 보이는 것도 경제가 불황인 상황에서 기업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는 지지율 하락 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에 노동계 눈치를 본다. 최근 건설사 몇 곳을 집중 감독하고 안전 문제를 엄중히 다루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는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그러나 우파에게 재계의 지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친기업 우경화 방향도 강화하고 있다. 청와대는 최근 재계와의 만남을 부쩍 늘리고 있다. 이 속에서, 산안법 개정안을 누더기로 만든 후 시행령에서 또 뒤통수를 쳤던 일이 반복될 수 있다.

중대재해를 줄이려면 — 영국의 경험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고 기업주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실효성 있는 법을 만들고 실제로 적용되게 만들려면 노동자 투쟁이 뒷받침돼야 한다.

중대재해는 기업주들이 안전보다 이윤을 우선시해서 벌어진다. 치열한 시장 경쟁 속에서 기업들은 이윤 극대화에 몰두하고 안전에 대한 투자는 낭비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기업과 긴밀하게 유착돼 있다. 국가는 단지 기업주 처벌에 미온적일 뿐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비롯해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온갖 안전 규제가 완화됐고 이는 또 다른 중대재해로 이어졌다.(관련 기사: 본지 272호 ‘산재, 화재, 가스 누출 ...: 왜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비극적 사고가 계속되나’)

세계 노동운동의 경험을 보면, 노동계급의 투쟁이 강력할 때 작업장 안전이 증진되고 산업재해를 감소시킬 수 있었다.

예컨대, 1970년대 초 영국에서는 계급투쟁이 활발해지자 기업주들과 정부가 산업안전에 대한 양보 조처를 내놨다. 1972년 20만 명이 참여한 영국 광원 파업으로 계급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1972~1974년 사이에는 공장 점거가 200건이나 벌어졌고, 대부분 사용자에게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는 공세적 투쟁이었다.

영국 지배계급은 1974년에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 산업안전법(HSWA)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1972년 국립석탄위원회 사장인 로벤스 경이 제안했는데, 당시 석탄 산업은 노동자들이 강력하고 전투적으로 조직돼 있는 핵심 국유 산업이었다.

이 법은 기업주의 안전 의무를 강화했고 경영 책임자에게 징역형 처벌도 가능하게 했다. 일부 사용자 단체는 안전 조처를 소홀히해 더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보는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산업안전법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전 강화를 추동한 핵심적 힘은 기층 투쟁이었다. 전 영국 보건안전청 조사관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인 사이먼 헤스터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 시기 매우 높은 수준의 노조 조직률과 [노조 내] 노동안전 대표의 역할이 보건 안전의 기준이 개선되도록 했다.

“1974~1978년은 높은 계급투쟁 수준을 배경으로 집권한 노동당 정부 시절이다. 노동조합원 수도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기업주들은 절박하게 사회적 안정을 원했다.

“영국 지배계급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높은 계급투쟁 수위와 강력한 기층 노동자 조직을 분쇄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들의 핵심 전략적 목표는 기층 노동자 투쟁 지도자들을 사용자들과의 협력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산업안전법은 그런 전반적 방식에 걸맞았다. 그래서 산업안전법은 사용자들이 [안전 문제 등에서] 노동자 대표와 상의해야 하는 의무를 뒀고 보건안전위원회 같은 노사협력적 조직을 구성하도록 했다.”

영국 산재 사망자 수는 1974년 615명에서 1980년 440명대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1974년 이후 투쟁이 하강하면서, 이미 노동당 정부 하에서 반격이 시작됐다. 1979년 보수당 마거릿 대처가 집권하면서 그 반격은 더욱 집요해졌다. 이러한 지배자들의 반격 속에서 작업장 조건이 다시 악화하며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1987년 지하철 킹스크로스역 화재로 31명이 사망하고, 1988년 파이퍼알파 해양플랜트에서 폭파 사고로 167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1986~1989년은 산재 사망자 수가 400명대에서 600명대로 급증하게 된다.

반복되는 끔찍한 참사에 대한 공분이 커지면서 영국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기업살인법 제정 요구가 높아졌다.

영국 기업살인법은 효과가 있었나?

한국 노동운동 내 일각에서는 2007년 제정된 영국의 기업살인법을 모델로 삼아 왔다. 그 법이 산재를 줄이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영국의 사회주의자 사이먼 헤스터는 기업살인법이 1974년 제정된 산업안전법과 달리 거의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내가 보건안전청에서 20년 동안 근무하면서 많은 사용자들을 기소했지만 단 한 번도 기업살인법으로 기소한 적이 없다. 내 생각에 기업살인법은 너무 드물게 쓰여서 거의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실제로 기업살인법이 2008년 발효된 후 이 법으로 기소된 기업은 겨우 26곳이다. 그마저도 25곳은 이전 법으로도 기소할 수 있는 경우였다.

한국에서 과대 포장된 것과 달리, 영국의 기업살인법은 경영 책임자 처벌이 불가능한 데다 징역형이 없고 벌금형만 가능하다. 그래서 기업 이사들이 벌금만 내고 풀려났다. 영국의 중대재해 유가족들은 기업들이 돈만 내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법이라며 기업살인법을 비판했다.

중대재해에 대한 공분은 컸지만 2000년대 영국은 계급투쟁 수준이 높지 않았고, 세력관계가 노동자들에게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산업안전법 보다 더 강력한 법이 만들어지기 쉽지 않았다. 1974년 정점을 이후로 영국 계급투쟁은 하강해 왔다.

물론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영국에서 통계상 산재 사망자 수 자체는 줄어드는 추세다. 산재 사망자 수는 1990년 400명대에서 하락 추세를 보이며 현재 100명대에 이르고 있다.(국가별 산재 통계 기준이 다르므로 단순 비교에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나 한국과 달리 업무 중 교통사고를 산재로 집계하지 않는다).

이런 추세는 1980년대 이후 영국에서 제조업 비중이 크게 줄어든 상황과 관련 있다. 조선업, 중공업, 탄광 등 사망이나 사고 위험이 큰 산업들이 줄거나 사라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명률이 낮아졌을지라도 안전 문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은 부상자 수는 2019년부터 다시 증가했고, 업무 관련 폐암, 천식 등 질병도 꾸준히 늘고 있다.

2017년에는 79명이 숨진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가 발생했다. 건설 기업들이 불에 잘 타는 값싼 불법 외장재를 사용하고 안전 장치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아서 벌어진 참사였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아직까지 기업주 중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처럼 영국 기업살인법의 실효성은 크지 않다.

영국의 기업살인법 제정 경험은 산재와 참사에 대한 대중의 광범한 공분만으로는 더 강력한 법 제정과 실효성 있는 적용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국에서도 강력한 계급 투쟁이 뒷받침되지 못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누더기로 통과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산재를 줄이고 작업장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노동자 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기층에서 산업재해에 항의하고 안전 강화를 요구하는 투쟁을 발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힘이 뒷받침될 때 더 강력한 법도 도입·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