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박정희는 단 3000여 명의 병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다. 정부나 군의 이렇다 할 진압도 없었다. 쿠데타 직후 육군참모총장이 박정희 편으로 넘어갔고 내각을 이끌던 총리 장면은 겁에 질려 진압 명령도 포기하고 도망가 숨었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길고 끔찍한 군사 독재 정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시는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지 1년째 되는 때였다. 어째서 박정희의 쿠데타는 큰 저항 없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4월혁명 전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월혁명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국·중국·소련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개입한 한국전쟁으로 거의 폐허가 됐다. 대중은 전쟁의 참상과 분단, 지독한 가난으로 고통받았다.

반면, 같은 시기에 기업가들은 이승만 정부한테 엄청난 특혜를 받으며 향후 재벌로 거듭날 토대를 닦았다. 이승만은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적산)을 소수의 기업가들에게 거의 공짜로 나눠 줬다. 1948~1958년 사이 기업 2029곳이 불하됐는데, 이승만 정권과 연줄이 닿는 기업가들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당시 남한 경제 전체를 지탱하다시피 한 미국의 원조 또한 자본가들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업과 국가 관료의 유착과 부정부패는 사회의 붙박이장이 됐다. 4월혁명의 주된 요구 중 하나가 이승만 하야뿐 아니라 부정 축재한 재산의 환수와 부패한 관료, 기업인 처벌이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승만은 가난과 불평등, 부패가 만연한 사회를 유지하려고 혹독한 억압과 독재 통치를 12년 동안이나 유지했다.

더욱이 이승만 정권 말기에는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안 그래도 취약한 경제가 곤두박질쳤다. 1960년 잠재적 실업자까지 고려한 실제 실업률은 34.2퍼센트에 달했다.

그래서 4월혁명은 누적돼 온 계급적 불만이 폭발한 결과였다.

1960년 2월부터 부정선거 조짐이 보여서 대구 등지에서 이미 항의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3·15 부정 선거를 계기로 마산에서부터 시위가 분출했고, 경찰은 유혈 진압을 시도했다. 시위는 금세 다른 지역으로 번졌고 “이승만 독재 정권 물러나라”는 전국적 외침이 됐다. 이승만이 자유당 당수 자리에서 물러나는 듯 양보 제스처를 취했지만 투쟁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4월 26일 오후 1시 드디어 12년 동안의 독재가 막을 내리고 이승만은 하야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정치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민주당 장면 정부의 배신

정권 붕괴와 함께 이승만의 자유당은 7월 총선에서 완패했다. 내각제로 헌법이 바뀌었고, 국회 압도 다수 의석을 민주당이 차지해 장면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상황을 전혀 안정시키지 못했다.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혁명의 여파가 계속됐다. 교원노조 등 노동자 투쟁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통일 운동을 벌였다.

혹자는 5.16 쿠데타 직전의 사회적 혼란을 계속된 투쟁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 산책》의 저자 강준만은 당시 대중이 너무 미숙했고 혁명 분위기에 도취돼 이뤄질 수 없는 요구를 계속 내걸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책임을 엉뚱한 데 돌리는 것이다. 부패 척결과 민주주의, 자립적 경제 발전을 바란 4월혁명의 요구와 염원들은 지극히 정당했고 허황된 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문제는 혁명을 계승한다고 표방한 민주당 정부의 배신과 부패, 무능에 있었다. 4월혁명에 약점이 있었다면 오히려 혁명을 일관되게 발전시켜 민주당 정부를 극복하지 못한 주·객관적 한계에 있었을 것이다.

장면 정부는 4월혁명의 가장 우선적인 요구들(3·15 부정선거와 4월혁명 폭력 진압 책임자 처벌, 부정 축재자 처벌과 재산 환수)조차 실현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이승만 독재에 반대한 야당이었지만, 그들 역시 친미적이고 우파적이었다. 친일파 출신자도 많았다. 민주당은 애초에 4월혁명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4월혁명이 처벌하라고 요구한 대상에는 이승만 정부의 군·경찰·사법부 등에서 고위직을 지낸 관료들이 포함됐다. 부정 축재자 처벌과 재산 환수는 사실상 당시 거의 모든 자본가들에 대한 처벌을 의미했다.

장면 정권은 국가 관료들과 기업을 공격할 뜻이 없었다. 정권의 기반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 위기가 해결되지 않았고, 위기를 넘어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노동자와 서민을 쥐어짜야 한다는 지배계급의 필요가 있었다.

부패도 한몫했다.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어부지리로 얻게 된 권력을 놓고 권력 쟁투를 벌였는데 이 둘은 서로 경쟁하면서 부정 축재자들에게서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았다.

당시 미국도 4월혁명의 요구를 처리하는 과정이 급진적이 되지 않도록 압력을 넣었다. 당시 남한은 미국에게 있어 소련·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최전방의 동맹으로서 서방 진영의 안정적인 보루 구실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4월혁명 직후 미국은 이렇게 촉구했다.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 처단이 한국의 기업 생산 위축을 초래[할] 우려가 있음.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이 사유재산을 몰수한 것과 같은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한국의 4월 민주혁명은 계급혁명이 아니며 비민주적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장면 정부 하에서 부정선거 책임자와 4월혁명 발포 명령자들이 대부분 무죄로 풀려났다.

1960년 10월, 4월혁명의 부상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해 시위를 벌이는 등 장면 정부에 대한 항의가 벌어졌지만 장면 정부의 응답은 데모규제법과 반공법 제정 시도였다. 이는 이승만 시대의 국가보안법을 보강한 억압적 법들이었다. 이 두 악법은 장면 정부가 군을 투입해서라도 반대 시위를 진압하고 통과시키려 했지만 계속된 시위 탓에 도입이 무산됐다.

부정축재자 처벌 또한 유명무실해졌다. 부정축재의 정의에 “[자유당에] 자진하여 3000만 환 이상을 제공한 자” 등 단서를 달아서 처벌 대상을 대폭 축소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장면 정부는 처벌 대상자들더러 5월 16일까지 자진 신고하라고 공표했다. 이날이 바로 쿠데타가 벌어진 날이었다. 이후 박정희는 무능한 장면 정부를 대신해 자신이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겠다고 표방했다.

5·16 쿠데타가 남긴 교훈

집권 세력에 대한 환멸이 가득한 상황에서 공식 정치 세력 중에는 대안이 없었다. 대안적 지도력을 제공할 만한 좌파 정당도 없었다.

사회의 불안정이 커져가는 속에서,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은 일찍부터 점쳐지고 있었다.

1961년 2월 미 국부무는 백악관에 이렇게 보고했다. “장면 정부의 독직, 부패, 무능이 한국을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 그리고 장면 정부가 4월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며 공산주의 혁명 혹은 그와 비슷한 극단적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으로 궤멸되다시피 했던 남한의 노동운동과 좌파는 4월혁명 이후 부활하고 있었지만, 쿠데타를 저지하고 혁명을 더 전진시키기에는 아직 힘과 정치력이 미약했다.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박정희(가운데)와 그의 수하들 ⓒ퍼블릭 도메인

박정희는 1960년 3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쿠데타 모의 회의를 20여 차례나 했다. 박정희는 4월혁명이 분출하자 ‘학생들이 내 계획을 다 망쳤다’며 분개했지만 겉으로는 지지하는 척하며 때를 기다렸다.

장면 정부가 혁명의 힘을 빼고 성과를 후퇴시키는 일에 매진할수록 박정희의 반혁명적 대안이 기습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적기도 가까워 왔다.

이것이 1961년 5월 당시 박정희의 쿠데타를 막아 설 별다른 세력이 없었던 배경이었다. 장면 정부는 허약하게 무너졌고 대중도 장면 정부를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4월혁명에 담긴 염원을 강력하게 추진할 유일한 세력을 자처했다. 이 때문에 쿠데타 직후 리영희·박현채 등 진보·좌파적 지식인들도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진실은 머지않아 드러났다. 박정희는 혁명의 염원을 파괴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당일 혁신계(자유당, 민주당보다 왼쪽 대안을 표방했던 세력들)와 사회단체, 노동조합 활동가 등 4000여 명을 체포했다. 대표적인 본보기로 진보적 신문이었던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를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다음 날 부정축재자 17명을 체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풀어 줬다. 권력이 자리잡기 무섭게 기업인들에 대한 처벌은 최소화됐고, 1963년 창당한 박정희의 공화당은 재벌들과 연합한 새로운 지배계급 정당이 됐다.

박정희는 4월혁명이 제기한 과제 중 하나였던 “자립경제의 발전”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배계급과 국가를 강화하기 위한 자본 축적에 철저한 강조점이 있었다. 박정희는 그것을 아래로부터의 변화 가능성을 차단하고 위로부터의 폭압을 통해 이뤄내려 했다. 국가자본주의적 성장 노선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 과정은 무려 18년간의 초착취와 폭력, 정치적 억압을 동반했다.

한편, 4월혁명의 발전을 어떻게든 막고자 했던 미국은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반공”을 전면에 내세우자 (남조선노동당 경력이 있어서) 미심쩍어하던 눈빛을 금세 거두고 박정희 정권을 적극 승인해 줬다.

박정희는 그 대가로 미국이 원하던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밀어붙였고,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파병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국 지배계급은 경제적 이득을 톡톡히 챙겼다. 이런 일들은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주의’가 전혀 진보적인 게 아니었음을 보여 줬다.

5.16 쿠데타 이후 1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박정희 정권은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급속한 자본 축적의 또 다른 결과였던 노동계급의 성장과 투쟁, 그 연장선에서 분출한 부마 항쟁, 그로 인한 지배계급의 내분이 배경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4월 “4·19혁명의 위대한 정신은 ... [박근혜 퇴진]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왔다”고 말하며 4월혁명의 정신을 찬양했다. 박정희의 망령이 박근혜 퇴진으로 타격을 입고 수그러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주당은 1960년의 민주당처럼 기여한 바가 거의 없고, 무엇보다 집권 후 개혁 염원 배신, 위선과 부패, 무능 또한 반복됐다. 이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이용해 우파는 다시 박정희 신화를 꺼내들려 할 것이다.

4월혁명은 전쟁으로 온 국토가 파괴된 지 10년도 안 돼 독재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대중이 아래로부터의 강력한 저항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러나 뒤이은 5·16 쿠데타는 우파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주당 등 부르주아 야당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대중적 투쟁과 정치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