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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우려, 어떻게 봐야 할까?

최근 한국 주류 언론들이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보도를 내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물가 상승 기사를 1면에 부각하며 재난지원금 등 정부의 돈 풀기 정책을 비판했다. 인플레이션 우려를 내세워, 노동자·서민에 대한 턱없이 부족한 지원마저 축소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문제가 될 정도로 물가 상승이 일어날까?

올해 4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3.3퍼센트로 12년 만에 가장 높았다. 올해 5월 한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도 2.6퍼센트로 9년 만에 가장 높았다.

그러나 이 수치들에는 기저효과의 영향이 크다. 경제가 심각하게 위축된 지난해 5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0.3퍼센트에 그쳤던 것이다. 결국 지난해와 올해를 평균 내면 5월 물가는 매년 1퍼센트 정도 상승한 수준이다.

중앙은행이 돈을 풀었지만 실물 경제로 가지 않고 금융 거품만 키우고 있다 ⓒ이미진

앞으로 물가 상승세가 지속되려면, 경제 성장세가 높아져 기업들의 투자 수준이 크게 늘어야 한다.

그러나 기저효과를 제외하면 경제가 진정으로 회복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예컨대, 미국의 고용이 회복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팬데믹 직전보다 총 노동자 수가 760만 명 줄어든 상태다. 5월 미국의 신규 고용은 2년 전보다 3.8퍼센트 감소했다.

중국 경제도 투자 성장세가 충분하지 않다. 지난해 대비 올해의 평균 투자 성장률은 3월에 2.9퍼센트, 4월에 3.9퍼센트로 과거보다 한참 낮다. 거품과 연계된 부동산 투자는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인프라와 제조업의 투자는 더욱 낮은 수준이다.

한국 경제도 지난 몇 달간 수출이 회복되고 불균등한 회복 속에 일부 기업들의 이윤이 증가했다지만, 기업들의 이윤율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벌어들인 수익으로 이자도 내지 못하는 ‘좀비기업’의 비율은 31퍼센트에서 34.5퍼센트로 늘었다.

고용과 소득에서 확연한 회복이 일어나지는 않고 있다. 취업자가 늘어도 대부분 단시간·임시 일자리다. 또 구직단념자는 지난해보다 더욱 늘어서 장기 실업 문제도 계속되고 있다.

IT 등 일부 산업에서 임금이 인상된 곳들도 있지만 전체적인 소득 회복세는 더디다. 올해 1분기 가계소득동향을 보면, 가구당 월 평균 근로소득은 지난해보다 1.3퍼센트 줄어들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을 단순히 화폐적 현상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생산 과정, 특히 자본 축적의 활성화와 연계돼 있다. 이에 비춰 현 경제 상태를 보면, 투자가 극적으로 늘지 않는 한, 순전히 재정 지출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전반적인 물가 인상 추세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보수 언론과 기업주들이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것은 현재 경제의 취약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경기 침체에 대응해 펼친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돈 풀기 정책은 부채 기반 소비(투기 포함)를 대폭 늘려놨다. 앞으로 양적완화를 축소하고 금리를 서툴게 인상했다가는 심각하게 부풀어 있는 거품이 터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또 불완전한 회복 국면이라 할지라도 물가 인상은 노동자들의 생활비를 상승시켜서 임금 인상 투쟁에 나서게 할 수도 있다. 이런 투쟁은 확산될 수 있다. 기업주들이 인플레이션 우려를 부각시키는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제하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과장된 공포에는 자본가들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반영돼 있다.

화폐수량설은 잘못된 이론

최근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이론적 배경에는 화폐수량설이 있다. 화폐수량설은 물가 상승률이 시중에 풀린 통화량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가 화폐수량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프리드먼은 정부 지출의 확대는 경제 회복이 아닌 물가 상승률을 높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임금과 복지를 축소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됐다.

화폐수량설에 바탕을 둔 인플레이션 예측은 반복돼 왔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공황 때에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양적완화를 펼치며 통화를 대규모로 공급하자, 인플레이션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들이 나왔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지난 10여 년간 물가 상승률은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는 물가 상승률 2퍼센트를 목표로 삼았지만, 수년간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중앙은행이 시중에 통화를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은 기업들의 투자 확대에 큰 영향을 받는다.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면 은행에서 대출받는 과정에서 신용통화가 늘어나고, 그 과정에서 물가도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이윤율은 낮은 상태이고, 이에 따라 기업들의 투자율도 낮았다. 중앙은행과 정부가 시중에 돈을 공급해도 이것이 제대로 돌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물가 상승도 미미했다. 예컨대 한국의 통화승수(중앙은행이 푼 돈의 회전 속도)는 갈수록 줄어 2008년 26.89였지만 올해 2월 14.4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돈을 풀어도 돌지 않고 금융과 실물의 괴리가 매우 큰 것이다.

마르크스와 케인스가 주장했듯이 중요한 것은 화폐에 대한 수요이다. 그리고 화폐 수요는 이윤율과 기업의 투자에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당분간 물가가 크게 오르기 어려운 까닭이다.

통화승수는 중앙은행이 화폐 1원을 공급했을 때 시중 통화량이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통화승수의 하락은 돈을 풀어도 실물경제에 돈이 돌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