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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저항자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다

다음은 5월 8일(현지 시각)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커밀라 로일이 한 강연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 안의 내용은 〈노동자 연대〉 번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첨가한 것이다. 커밀라 로일은 《삐딱이들을 위한 엥겔스 가이드》의 저자이다.

오늘날 세계를 이해하는 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태어난 지 200년이 넘었다. 수염 덥수룩한 19세기의 두 남자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

마르크스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사악한 공산주의의 창시자로 본다. 그래서 20세기 스탈린 치하 소련과 오늘날 북한과 중국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범죄에 대한 책임이 적어도 일부 있다고 본다.

이런 견해는 거부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그 체제를 봤다면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학계에서 마르크스는 경제에 대해 몇몇 좋은 통찰을 내놓고 매우 영향력이 컸던 흥미로운 철학자로 취급된다. 사회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나처럼 지리학을 가르치는 사람도 마르크스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마르크스는 매우 결함이 많고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 사상을 가졌던 인물로 치부된다.

한편, 마르크스가 여성 차별이나 제국주의, 인종 차별 같은 문제에 관해 말한 게 별로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 중심적이어서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마르크스가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해 다른 것들을 무시한 채 계급만 앞세웠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마르크스가 모든 문제를 빠짐없이 다 다룬 것은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기가 다루고 싶어 한 문제들조차 다 다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후대의 많은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의 사상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려 했고, 적용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우선, 마르크스는 사회를 이해하려고 역사유물론이라는 방법과 변증법이라는 방법을 발전시키고 적용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들이기도 하다.

특히, 마르크스는 그의 걸작 《자본론》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착취를 바탕으로 작동하고 위기에 처하는 경향이 있는지를 분석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엄청난 불평등과 착취가 지배하는 체제에 살고 있다.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 한 사람이 하루에 3200만 달러를 버는 세상이다. 화성 표면에 탐사 로봇과 드론을 보낼 기술도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제대로 된 산소호흡기가 없어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죽어 나가고, 백신 제조업체들의 이윤이 세계 대다수 사람들의 생명보다 우선하고 있다.

거대한 불평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 하루에 3200만 달러를 버는 아마존 회장 베이조스(왼쪽), 인도에서는 의료 물자마저 부족해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오른쪽)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문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꽤 자명하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응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자본주의를 이론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핵심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처지라는 관점

마르크스의 사상을 살펴보자. 우선, 마르크스와 엥겔스,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처지라는 관점에서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노동자 대 자본가의 대결에서 그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확고하게 노동자 편을 들었다. 그저 공평무사한 태도로 세계를 관조하려고 하지 않고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어 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둘 다 평생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노동자 투쟁에 헌신했다. 마르크스는 정치 신문 기자로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항쟁에 큰 감명을 받았다. 1844년에 지금은 폴란드 영토[실롱스크]인 슐레지엔에서 수많은 직조공들이 매우 전투적인 폭동을 일으켜 사용자들이 사는 저택과 공장으로 쳐들어갔다. 공장 설비를 박살 내기도 했다. 이는 얼마간 절망에서 비롯한 행동이기도 했다. 임금이 대폭 삭감돼 도저히 먹고살 수 없게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투쟁은 산업 노동자들이 벌인 최초의 중요한 투쟁의 하나였다.

엥겔스도 이와 비슷한 영국 노동자 파업 투쟁에서 영감을 얻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차티스트운동을 벌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에도 참여했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혁명을 앞두고] 자신들이 속한 공산주의 단체를 위해 쓴 것이다. 당시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자처했다. 1848년 혁명이 유럽을 휩쓸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의 한복판에서 조직 활동을 했다.

훗날 마르크스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뭐니 뭐니 해도 혁명가”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업 노동자들의 용기를 찬양하고, 노동자 투쟁 소식을 알리고, 노동자가 겪는 고통에 공감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들이 처한 체제를 분석하려 했고, 노동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를 타도할 잠재력이 있는 계급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을 자신들의 노력의 중심에 놓았다.

1840년대 당시에는 중간계급처럼 더 교육받고 합리적인 집단이 혁명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이 흔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이 틀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동계급 대중이야말로 모든 것을 바꿀 잠재력이 있는 계급이며, 그 잠재력이 항상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역사유물론

그러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유물론적 세계관을 견지했다. 그들의 세계관을 “역사유물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세계관은 단지 권세가들과 권력층의 행위만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학교에서 우리는 왕이나 대통령, 통치자, 온갖 지도자가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배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것이 틀렸다고, 일반 대중이 계급 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했다.

사회는 사상으로 변화돼 온 것이 아니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관념론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관념론에 따르면, 사회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면서 변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질적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조건하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일반 대중이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를 생산하도록 어떻게 조직되는가? 바로 이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인간은 먹고 입고 잘 곳을 마련한 다음에야 정치나 과학, 예술, 종교를 할 수 있다”고 엥겔스는 말했다.

이것은 꽤나 생태학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떻게 생존 수단을 마련하느냐는 물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생태학적 측면은 나중에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에 내재된 핵심 요소의 하나이다.

한편, 인간은 개인으로서 살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생산을 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 형태로 조직돼 왔다. 인류 역사 동안 다양한 유형의 사회가 존재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늘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사회는 늘 이랬고 앞으로도 이럴 것이며 대안은 없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장구한 인류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는 최근에야 등장해 짧은 기간 존재해 왔을 뿐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한 핵심 논점 하나와 연결된다. 그들은 인간 본성을 변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흔히들 인간 본성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어서 사회주의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특성을 타고난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는, 인간이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이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존재이므로 인간 본성도 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또한 소외에 대해 말하면서,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체제라고 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자기가 생산한 것을 가지지 못한다. 노동의 산물은 그를 고용한 자본가의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생산물이 외려 우리 위에 군림한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그 생산물은 마치 우리가 생산한 것처럼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것인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킨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에게서도 우리를 소외시킨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모두 서로 경쟁하는 개인으로 취급한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에 따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 투쟁이 역사를 전진시킨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남북전쟁[제2차 부르주아 혁명]을 사례로 보자. 유물론적 관점이 아니면 이 역사적인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북부와 남부가 전쟁을 벌인 것은 단지 어떤 사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북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노예제에 반대하기로 마음먹어서, 노예제를 선호한 남부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링컨은 어느 날 갑자기 노예제를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결코 아니었다.

남북전쟁은 경제적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남북전쟁은 미국이 어떤 종류의 사회가 돼야 하느냐 하는 물음을 둘러싼 전쟁이었다. 미국은 플랜테이션과 목화 수출에 기반한 체제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도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하게 하는 산업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가야 하는가? 남북전쟁은 미국 전체가 어떤 형태의 체제로, 어떤 세력에 의해 조직돼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토대와 상부구조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에는 경제적 기초가 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사상과 제도가 상부구조의 일부로 형성된다.

물론 토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결정론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상과 정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중요하다. 당장 지금도 우리는 이 모임에서 사상과 정치를 토론하고 있지 않은가. 유물론적인 역사 이해에 따르면 실제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 역사의 궁극적인 결정 요인이라고 엥겔스는 말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자신이 그 이상을 주장한 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경제만이 역사의 유일한 결정 요인이라는 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경제를 등한시하는 사람들을 반박하며 경제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경제를 연구한 《자본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851년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보내 “연구가 꽤 진척돼 앞으로 5주면 경제학을 끝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30년 후 생을 마감할 때도 마르크스는 경제학을 끝내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를 이해하려 했다. 어디서 비롯했고 어떻게 작동하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아내려 했다.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의 봉건제와는 매우 다른 사회 체제다. 봉건 영주는 농노에게서 수확물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자기가 쓸 부를 축적하고 자기가 먹고 쓸 음식과 물건을 사들였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자기가 직접 사용하려고 부를 쌓지 않는다. 자본가는 부를 투자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이다. 자본가는 단지 돈을 모으기만 하지 않는다. 더 많은 돈이 돌아오길 기대하며 사업에 투자한다. 그러지 않는 자본가는 도태된다.

그러면, 자본가는 어떻게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얻는가?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노동자를 고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을 준다. 그 대가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얻는다. 노동력은 매우 특별한 상품이다. 노동력이 여느 상품과 다른 점은 가동시키면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자기가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부를 얻게 된다.

팬데믹 동안에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1년 전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출근을 못 하고 임시휴직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근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휴직수당을 받았다. 이와 함께 경기가 크게 추락했다. 이는 사회 상층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로 경제가 굴러가는 게 아님을 보여 준다. 날마다 출근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이야말로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150년 전에 마르크스도 그렇게 말했다. “어떤 나라든 노동을 멈추면 1년은 고사하고 몇 주도 안 돼 망한다는 것은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 노동을 멈추면 경제가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 자본가는 임금을 깎고 싶어 하지만 노동자들은 임금을 올리고 싶어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싸워야 한다. 그런데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도 싸우고 경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늑대인간처럼 잉여 노동에 굶주려 있다”고 했다. 파산과 파멸을 면하려면 다른 자본가들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화석연료 산업을 보라. 땅속에 있는 화석연료를 이대로 계속 캐내고 태우면 기후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모두들 안다. 아마 그 기업들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지 못한다. 화석연료를 캐서 팔면 막대한 이윤이 남기 때문이다. 체제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그들이 경쟁에 임하지 않으면, 주주들은 다른 화석연료 기업에 투자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마지막으로, 국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국가는 내가 앞서 말한 상부구조의 일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는 정부, 의회, 군대, 경찰, 사법 기구, 복지 체계, 우편 서비스 등 현대 세계의 많은 것을 포함하는 일련의 기구들이다.

우리는 국민 국가 아래 살고 있다. 즉, 국가가 특정 국민과 결부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국가는 그 국민 국가 아래 사는 모든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고들 말한다. 국가는 마치 중립적인 세력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가 중립적이지 않으며 모든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사회를 지배하는 계급의 이익을 구현한다고 했다. 오늘날 경찰이 하는 일을 보라. 명백히 지배 계급의 이익에 봉사한다. 경찰은 본질적으로 지배 계급의 이익을 지키고 노동자들을 막는 구실을 한다. 영국 정부는 이제 경찰법을 개악해 시위도 못 하게 하려고 한다. 경찰은 또한 사회의 인종차별·성차별 관념을 모두 수용한다.

제러미 코빈이나 다이앤 애벗 같은 영국의 훌륭한 좌파 정치인들이나 다른 나라의 좌파 정치인들조차 국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국가가 필요하다고 하고, 때로는 심지어 경찰을 거리에 더 투입하라고 촉구하기도 한다.

요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성장으로] 경찰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거나 경찰이 필요하기는 하냐 등의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정치인 대부분은 경찰과 국가의 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이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라고 강조했다. 내가 소속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도 그런 관점을 견지한다.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스탈린주의 체제[옛 소련 블록]나 정당[공산당]과 달리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추구한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노동자 자신의 행동으로만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또한 우리와 개혁주의적 좌파의 차이점이다. 개혁주의적 좌파는 선거에서 이겨서 정권을 잡은 다음 기존 국가를 운영하려 한다. 물론 우리는 선거에서 이겨 국가를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운영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과 협력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투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사를 대리해 사회를 운영할 사람들에게 투표하는 것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혁명을 주장한다. 그것은 국제 혁명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한결같은 국제주의자였다. 그들은 세계의 노동자가 단결해야 하며, 계급 투쟁은 국제적 투쟁이라고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기 나라 지배 계급보다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더 공통점이 많다고 했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국민 국가를 지지해야 한다는 사회의 상식을 거스르는 것이다. 최근 영불해협의 저지섬에서 [어업] 분쟁이 벌어지자 영국 정치인들은 국기를 휘두르며 거기에 군함을 투입하는 것을 사람들이 지지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지배 계급의 이익을 지지하기를 거절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혁명의 모습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참여하고, 여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 등 모든 형태의 차별을 근절하는 혁명이다. 그렇다.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은 모두를 해방시키는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우리는 평등과 민주주의에 기반한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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