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기후 정상회의를 개최한 4월 말에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부정하는 두 권의 책이 번역돼 나왔다. 두 책은 서울 시내 주요 서점과 온라인 서점에서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올랐다. 미국 정부조차 기후 위기에 대응한다며 대규모 재정지출 계획은 내놓은 상황에서 이는 다소 이례적인 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이든을 비롯해 주요 선진국 지배자들은 기후 위기 해결보다 기업주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그들의 대책은 기후 위기 해결에는 한참 못 미치는 반면, 재생에너지, 전기차, 수소 등을 새로운 시장으로 키우는 데에 큰 열의를 보이고 있다(관련 기사 : ‘권력자들은 정말로 기후 위기를 해결할까?’, 〈노동자 연대〉 371호). 이를 위해 정부 기술을 민간 기업들에 넘겨주고, 재정 지원으로 기술 발전을 촉진하겠다는 게 이들의 계획이다. 특히 빌 게이츠 등은 핵발전을 기후 위기의 해결책으로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바이든과 문재인도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점을 강조해 핵발전소 수출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마이클 셸런버거, 부키, 664쪽, 22000원)은 국내에 ‘찬핵’ 환경운동가로 알려진 마이클 셸런버거가 2020년에 쓴 책을 번역한 것이다. 셸런버거는 문재인 정부 취임 직후인 2017년 7월 문재인 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내 ‘탈핵’ 정책을 비판한 바 있다. 국내 우파 언론들은 셸런버거를 ‘〈타임〉지가 선정한 환경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며 핵발전이야말로 진정한 대안이라는 그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문재인 정부가 ‘탈핵’은커녕 미국과 함께 핵발전소 수출을 추진하고 소형핵발전소(SMR)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지금, 그의 책이 출판된 것은 문재인의 개혁 배신으로 우파의 사기가 올라간 현실을 보여 주는 한 사례일 것이다.

셸런버거는 기후 변화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화석연료 연소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그 원인이라는 사실도 인정한다. 다만 기후 변화의 위험성이 과장돼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종말은 오지 않는다’(Apocalypse Never)이다.

책의 1장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에서 저자는 오늘날 기후 변화의 효과로 거론되는 현상들(산불, 해수면 상승, 식량 위기, 산불 등 자연재해)이 기후 변화와 별 관계가 없거나 과장돼 있다고 주장한다.

“1920년대에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540만 명이었던 반면 2010년대는 40만 명에 불과하다.”

자연재해가 대부분은 인재와 결합돼 커다란 피해를 낳는다. 이 점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상하수도나 도로, 병원, 소방 체계 등 사회기반시설에서 커다란 차이가 나는 거의 10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는 것이 넌센스라고 여길 것이다.

현실은 정반대다. 2020년 유엔 재난위험경감사무국(UNDRR)은 2000~2019년의 자연재해를 그 전 20년과 비교한 결과, “2019년 세계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1도로 치솟으면서 폭염과 가뭄, 홍수, 혹한, 태풍, 산불 등 극한 기상 현상들이 더욱 자주 일어나고 있다” 하고 발표했다. 홍수는 2.3배, 태풍은 1.4배로 늘었다. 인명피해 규모는 크게 늘지 않았지만 저소득 국가에 피해가 집중돼 재해 사망률이 사회 인프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2018년 인도네시아. 해수면 상승과 더 잦아진 폭우는 더 큰 재해로 이어질 것이다 ⓒ출처 인도네시아 국가재난관리청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식량 생산량이 확연히 증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는 말은 전체 맥락에서 떼어낸 왜곡일 뿐이다. 셸런버거가 인용한 보고서는 서두에서 해당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 모든 도전들 중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이 가장 절실하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FAO 2018)

한 전문가의 말을 빌려 산불과 기후 변화가 관계없다고 한 주장도 억지일 뿐이다. 해당 전문가는 산불의 원인을 기후 변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했을 뿐이다. 오히려 “1910년부터 1960년까지 기간을 살펴보면 화재 발생 건수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건 강수량입니다. 하지만 1960년 이후로는 중심지표의 자리를 기온이 차지하게 되죠.”(68쪽)

셸런버거는 자신의 주장 곳곳에 주석을 달아 근거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 듯한데(깨알 같은 글씨의 주석이 664쪽 중 78쪽이나 차지한다), 부정확할 뿐 아니라 아전인수 격이라 도무지 신뢰할 수 없다.

셸런버거는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이 저절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술 발전으로 기업들은 셰일층과 바다에서 더 많은 천연가스를 채굴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이 2005년부터 2018년까지 미국이 사용하는 에너지에서 배출하는 탄소량이 13퍼센트 줄어들게 된 주요 원인이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3도 이상 상승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할 수 있다.”(251쪽)

또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의 풍요를 이루고 나면 개발도상국의 탄소 배출량은 줄어들 것이다. … 기술의 힘으로 우리는 기후 변화를 막아 내고 있다.”(78~79쪽)

“세상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201쪽)

그러나 먼저 이런 전망에는 아무 근거가 없다. 비중이 줄고는 있지만 석탄·석유는 여전히 주요 선진국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 천연가스도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다. 천연가스가 석탄·석유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추가되면 탄소 배출량도 늘어난다. 미국의 탄소 배출량 감소에는 값싼 천연가스 공급이 한 요인이 됐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2007년 이후 회복되지 않고 있는 불황이 훨씬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온실가스 배출은 2007년 경제 위기와 불황 이후에야 감소세로 돌아섰다

오늘날 중국과 인도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고려하면 개발도상국의 탄소 배출량이 ‘저절로’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은 앉아서 재앙을 기다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3도’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보다 평균 기온이 3도 높았던 시기는 300만 년 전 플라이오세 시대이다. 이때 인류의 조상은 아직 아프리카에만 존재했다. 해수면 높이는 지금보다 25미터 높았고 양극에는 얼음이 없었다.(마크 라이너스, 《6도의 멸종》)

물론 인류가 멸종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고통이 특히 빈국과 선진국의 하층민들에게 닥쳐올 것임은 분명하다. 셸런버거는 뭐라고 할까?

“해수면 상승과 같은 문제는 이미 어딘가에서 발생해 온 문제들이다. 인간 사회는 그런 문제를 겪고, 회복했으며, 적응해 나갔다.”(60쪽)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집단면역’을 갖추자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염 위험에 방치한 일부 지배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천연자원보호협회, 환경보호기금, 시에라클럽

셸런버거는 일부 환경운동 지도자들의 부적절한 처신을 꼬집으며 물타기를 시도한다.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들이 정작 화석연료 기업들한테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셸런버거가 주로 예를 드는 천연자원보호협회, 환경보호기금, 시에라클럽 등은 오늘날 기후 변화 운동 등을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단체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부르주아 환경(자연)보호론자들의 관심사(자신들이 등산이나 스포츠를 즐길 산이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는)에서 출발한 단체로 진보적 성격이 거의 없다.

따라서 이런 단체들이 “자연 보호를 내세워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정책을 촉구하고 추진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기후 위기 반대 운동의 대의를 깎아내리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적지 않은 환경 엔지오 단체들이 문제 의식 없이 기업들한테 후원을 받는 관행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런 일은 해당 단체의 입장과 실천에 악영향을 주며, 운동의 대의를 훼손하려 하는 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그러나 셸런버거에게는 이 점을 비판할 자격도 없다. 그가 창립한 ‘브레이크스루연구소’의 주요 후원자들 중에는 ‘신시아와 조지 미첼 재단’이 있는데, 이 재단은 천연가스 시추와 프래킹으로 번 돈으로 세운 재단이고 천연가스 시추가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마이클 만,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

셸런버거는 유명 스타들이 기후 변화에 목소리 내는 것도 위선이라고 지적한다. 셸런버거는 그들에게 진지한 행동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닥치고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니 좌파적 비판과는 정반대다.

핵무기 찬양

셸런버거는 환경 운동가들이 핵발전소와 핵무기를 구별하지 못하고 둘 다 반대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핵발전과 핵무기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핵발전소에서는 궁극적으로 핵무기 원료가 생산된다.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만들어 세계 곳곳의 핵발전소를 감시하는 이유다.

또 핵연료를 다루는 기술(과 각종 제도·시설·인력 등)은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에 필수적이므로 핵발전을 도입·유지하는 것은 핵무기 개발을 준비하는 셈이다.

예컨대 최근 빌 게이츠가 띄우고 문재인 정부도 개발에 열을 올리는 소형모듈반응로(SMR)는 핵잠수함과 핵항공모함의 엔진을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부분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핵잠수함 도입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셸런버거 자신이 핵무기 찬양으로 기울어 일구이언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핵무기는 전쟁을 막고 끝내기 위해 개발되었다. ...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으며 ... 핵무기를 없애기 위한 시도는 재앙에 가까운 쓸데없는 갈등으로 치닫곤 했다. ... 핵무기의 존재를 직시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멸망할 수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불안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547쪽)

핵무기의 위력이 핵보유국들 사이에 정면 충돌을 머뭇거리게 하긴 한다. 그러나 과거 전쟁들에서도 지배자들은 자국민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을 알고도 전쟁을 벌였다. 자국의 세계적 지위와 자국 자본가들의 이윤을 지키려고 말이다. 오늘날 팬데믹과 기후 위기의 위험을 직시하면서도 그 해결책을 미루는 자본가들이 ‘인류를 위한다는 착각’이야말로 위험한 것이 아닐까?

빌 게이츠 등의 핵발전 대안론은 기후 위기 대응을 지연시키고 더 큰 위험을 낳는다

채식, 인구, 탈성장

교활하게도 셸런버거는 일부 근본 생태주의자들과 환경운동 지도자들의 약점을 파고들어 기후와 환경을 지키고자 하는 운동 전체를 폄훼하려 한다.

예컨대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축산업이 온실가스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과장해 채식을 강요한다. 인구 증가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거나 경제 성장 자체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셸런버거는 몇 가지 사실을 들어 이런 주장을 비판하고 선진국의 환경 운동가들이 개발도상국과 빈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오미 오레스케스는 유명한 책 《의혹을 팝니다》에서 이처럼 사실과 거짓을 뒤섞어 진실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짓을 비판한 바 있다. 특히 일부 ‘과학자’들이 담배의 유해성을 부정하고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데에서 이런 수법을 즐겨 사용해 왔다.

축산업은 온실가스 배출의 중요한 한 경로다. 특히 거대 농축산 기업들은 농장을 건설하려고 산림을 파괴하고 가축을 가혹한 환경에 내몰아 이윤을 늘려 왔다. 이 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도 늘었다. 그러나 이런 환경 파괴가 인구와 생산량 확대의 필요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볼 수는 없다. 세계식량농업기구의 발표만 보더라도 농법과 기술 개선으로 농업의 효율을 높이고 온실가스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런 대안은 세계 인구 전체를 먹여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이윤 논리 탓에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구 증가 때문에 기후와 환경이 파괴됐다는 주장은 사실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와 이 체제의 수혜자들이 만든 문제의 책임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논리일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멜서스의 주장을 비판하는 데 그토록 공을 들인 이유다.

“인구 과잉은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관계이지, 추상적 숫자나 필수품 생산력의 절대적 한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한계는 구체적 생산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 아테네인들에게 인구 과잉을 의미했을 숫자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작게 보이는가!”(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그러므로 ‘탈성장’론도 약점은 있다. 자본주의적 성장 외에 대안이 없다는 관점이 핵심 문제다. 풍요로운 사회를 추구하면 필연적으로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사실 셸런버거도 이런 관점을 공유한다. 다만 그의 결론이 정반대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환경을 파괴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경제 성장이 환경 파괴를 낳는 것은 생산이 인류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주의 이윤 경쟁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즉, 생산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한다면 인류는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풍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필요한 것들의 생산이 늘면서도 낭비와 파괴적 생산은 줄어들 것이다.

기후 변화 문제로 보자면 재생에너지의 개발과 대규모 공급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대중교통 중심의 교통체계 개편, 철도를 중심으로 한 화물 운송 체계, 단열이 잘된 빌딩 건설 등도 그런 대안들 중 일부다. 반면, 군대나 비트코인처럼 자원을 낭비하고 파괴적인 부문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이런 대규모 변화를 주어진 시간 내에 이루려면 기존 화석연료 체계에서 막대한 이윤을 얻고 거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자들을 물러서게 할 힘이 필요하다. 마르크스는 이윤의 원천을 만들어내는 노동계급에게 그런 잠재력이 있다고 봤다. 이들이 파업에 나서면 이윤 창출 자체가 마비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채식주의나 인구과잉론, 탈성장론을 둘러싼 운동 내 논쟁은 피할 수 없다. 소외된 노동으로 신체·정신 모두 에너지가 고갈되는 노동자들은 채식주의 삶을 선택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채식주의는 노동자 개인들에게 환경 파괴의 책임을 떠넘기고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효과를 낸다. 이는 노동자들이 서로를 탓하고 불신하게 하는 효과를 낸다. 단결이 어려울수록 운동의 힘은 약해지고 문제 해결에서 멀어질 것이다.

안타깝게도 기후 운동 내에는 이런 문제적 관점들이 강력하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접해 보지 못한 청년과 노동자들은 생태주의적 탈성장론과 자본주의적 성장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잘못된 압력을 느끼기 쉽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노동계급과 하층민에 속하는 사람일수록 전자의 주장이 더욱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셸런버거가 운동을 비난하며 파고드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저에너지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는 퇴행적 움직임으로 지금까지 이룩한 발전을 되돌리려 해서는 안 된다.”(538쪽)

개혁주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무능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노동조합과 개혁주의 정당의 지도자들은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기층 노동자들이 기후 운동의 일부가 되도록 진지하게 조직하기보다는 자신들이 기후 집회의 연단에 올라 한마디 거들거나, 운동에 대한 재정적 후원 정도를 ‘노동’의 구실로 제한해 왔다.

강력한 대중투쟁이 없다면 통과되지 못하거나 통과돼도 실행되지 못할 법안을 발의하고는 운동 건설은 뒷전인 것도 문제다.

이들은 생태주의자들과 달리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과 기후 위기 해결을 모두 이룰 수 있다고 여긴다.(이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해결책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어설픈 절충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면 노동자들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미끌어지기 쉽다. 지금 같은 불황 시기에 자본주의적 성장, 즉 기업주들의 이윤을 늘리려면 노동자 착취를 강화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자신의 노동조건을 지키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라도 되는 양 주장하기도 한다. 도덕주의적 호소의 폐해이기도 하다.

얼마 전 ‘정의로운 전환’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한 활동가는 산업 전환 과정에서 “정규직의 임금을 온전히 보전해 주면 노동시장 이중구조 하에서 정규직만 계속 많이 받는 상황이 될 텐데 이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주장했다. ‘기존의 임금을 유지하는 것’이 불평등을 고착화시킨다는 주장으로 사실상 지금의 임금이 문제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나마 지난 10년 사이에 좌파 개혁주의의 연이은 실패는 왼쪽 대안이 사라진 듯한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스의 시리자, 미국의 버니 샌더스, 영국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에 이르기까지 급진적 사회 개혁(그린 뉴딜, 국유화 등)을 통한 기후 위기 해결을 제시해 온 좌파 개혁주의 세력은 불과 몇 년 만에 주변적 지위로 밀려나 버렸다.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겠지만, 근본에서 이들의 실패는 자본주의 국가를 활용한 개혁이라는 전략의 실패를 보여 준다.

이런 상황은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에게 이중의 과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에 맡겨 두지 말고 직접 기층 노동자들을 운동의 일부로 조직해야 한다. 동시에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좌파가 늪에 빠진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꽁무니만 쫓는 것은 셸런버거 같은 자들이 목청을 키우고 관심을 끌 수 있는 환경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한편, 셸런버거의 책을 번역한 노정태는 진보신당의 청년 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해 〈경향신문〉 칼럼을 쓰다가, 지금은 《신동아》와 〈조선일보〉에 자주 기고하는 우파의 아이돌이 됐다.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 핵발전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기울었는데, 이후 빠르게 우경화했다.

역자 후기에서 노정태는 셸런버거와의 만남을 돌아보며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셸런버거가 노정태의 야망을 매우 빨리 간파한 듯하다.

“그(셸런버거)는 내(노정태) 경험을 ‘영웅의 경로’로 그려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 이 책은 내 인생의 책 중 하나다. 앞서 설명한 이유로 인해 심지어 출간되기 전부터 내게는 그런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571~573쪽)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오늘날 중도 정치세력의 개혁 배신에 실망한 청년들에게 우파적 진로를 제시하는 책이다. 〈파이낸셜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등 기업주들의 언론이 이 책을 추천하고 아마존, 반스앤드노블 등 대형 서점들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국내에서도 문재인의 탈핵·탈석탄 공약 폐기는 찬핵론자와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의 목소리를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기후 위기를 기술 경쟁에서 앞서나갈 계기로 삼으려는 자본가들은 일종의 양동 작전을 펴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기후와 환경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함께하면서도 예리한 논쟁을 회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기후 위기 부정론자들은 기후 위기 자체를 부정하거나, 인정하더라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근거가 없다 ⓒ출처 PxHere

또 다른 책인 《불편한 사실》(그레고리 라이트스톤, 어문학사, 251쪽, 18000원)은 미국 이산화탄소 연맹의 회장이자 악명높은 하트랜드연구소 자문위원인 그레고리 라이트스톤이 2020년에 쓴 책이다. 하트랜드연구소는 담배 기업들의 돈을 받으며 담배의 유해성을 부정하는 ‘연구’들을 발표하고 화석 연료 기업들의 돈을 받아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목소리를 내 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프레드 싱어가 있다.

책을 번역한 박석순 교수는 이화여대 환경공학과에 재직 중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따라서 셸런버거의 책에 비해서는 순도 높은 거짓말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덜 헷갈린다.

그레고리 라이트스톤이 펴는 주장들은 비교적 잘 알려진 것들로 일부는 셸런버거의 책에서도 거론된다. 예컨대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식물이 잘 자라고 그래서 다시 이산화탄소 농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 등이 있다. 주요 주장들과 진실은 아래 정리했다.

《기후 위기, 과학이 말하다》(존 쿡, 청송재, 19000원)와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마이클 만, 톰 벨스, 미래인, 13000원)은 이런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진실, 혹은 거짓?

▲ 지구온난화는 1998년에 멈췄다 : 1998년은 유난히 엘니뇨가 심한 해였다. 즉 매우 더운 해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2010년까지 추이를 그려 보면 정말로 멈춘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2014~2020년까지 7년이 역사상 가장 더운 해들로 기록돼 이런 주장은 파탄났다.

▲ 남극 얼음은 두꺼워지고 있다 : 일부 지역은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기후 변화는 지구 전체에 똑같은 효과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더 많은 에너지가 축적되고 있다는 증거는 넘쳐난다. 남극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점점 더 많이 녹아내리고 있다.

▲ 온실가스보다 태양과 공전궤도 변화가 더 큰 영향을 준다 : 온실 효과는 낮보다 밤이, 여름보다 겨울이 온도 상승폭이 크다. 태양의 변화는 반대다. 현재 태양 활동이 약화되는데도 지구 기온은 오르고 있고, 밤과 겨울의 온도 상승폭이 큰 것으로 측정되고 있다.

▲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 미량의 원소일 뿐이다 : 미량의 원소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약이나 독을 생각해 보라.

▲ 가장 강력한 온실가스는 이산화탄소가 아니라 수증기다 : 맞다. 그러나 수증기의 양은 대기의 온도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산화탄소가 늘어 대기가 따뜻해지면 수증기도 늘어 기온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낸다.

▲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식량 생산이 증가한다 : 그런 효과는 있다. 그러나 식량 생산은 이산화탄소 농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가뭄이나 홍수가 잦아지면 흉작이 될 수 있다.

▲ 미국 자연과학자 3만 1000명이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 가설을 반대한다 : 그런 청원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3만 1000명은 미국에서 자연과학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의 0.3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서명자 중 기후 과학자는 전체의 0.1퍼센트밖에 안 된다. 반면 기후 변화와 관련된 논문의 97퍼센트는 인간이 기후 변화를 초래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 중세에도 온난기가 있었다 : 일부 지역의 기온이 높긴 했다. 태양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화산 폭발이 잦아든 효과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효과가 없고, 중세 때 전체 지구의 평균 기온은 지금보다 낮았다.

▲ 과학자들이 기후 변화를 꾸며낸 편지들을 주고받았다(기후게이트) : 두 나라에서 아홉 건의 독립된 수사가 있었지만 거짓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메일을 폭로한 사람들이 일부 표현과 문장을 맥락에서 떼어내 왜곡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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