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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세습에 좌절하는 청년에게:
능력주의는 공정을 보장하는가?

이 글은 7월 1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 발제문을 정리한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 최대 화두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 공정성 논란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데, 최근에는 이준석까지 가세해서 논쟁에 기름을 붓고 있다.

공정성 논란의 근본에는 갈수록 불평등해지는 현실이 있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에 힘입어 등장한 터라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 문재인 정부는 불평등 해소를 바라는 대중의 눈치를 보며 ‘공정’을 공약했지만, 문재인 정부 하에서 오히려 불평등은 심화했다. 상위 10퍼센트 소득 비중이 2017년 48.4퍼센트에서 2019년 49.4퍼센트로 올라 소득 격차가 더 커졌다. 순자산 5분위 배율(순자산 상위 20퍼센트 그룹 가구의 평균 순자산을 하위 20퍼센트 순자산으로 나눈 값)이 2017년 99.65배에서 2020년 166.64배로 급증했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양극화가 더 커진 것이다. 심화하는 불평등(게다가 위선과 내로남불) 때문에 대중의 기대는 배신감과 환멸로 바뀌었다.

일련의 공정성 논란을 보면서 사람들은 여러 물음을 던진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립됐음에도 왜 공정이 실현되지 못하는가? 왜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하는가? 왜 사람들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불평등과 차별을 옹호할까? 등등. 최근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논의의 대부분은 불평등이나 공정을 능력주의와 관련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무엇인가?

능력주의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하자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자원(부와 권력)을 차등 분배하는 시스템(이데올로기)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자들은 능력주의가 누구에게나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회 계층 이동이 가능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는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논리들은 사실상 허구다. 우선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개인의 능력은 가정환경을 비롯해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에 크게 좌우된다. 또한, 어떤 능력이 보상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사회적으로 결정되는데 여기에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관점이 반영된다. 개인의 성공에는 비능력적 요인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운과 같은 우연적 요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능력주의는 기회의 균등을 전제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애초부터 기회가 평등하지 않다. 다시 말해 계급 사회에서는 출발선이 다르고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애시당초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경쟁의 룰도 지배계급에게 유리하게 정해진다. 따라서 능력에 따른 보상은 결코 합리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논리적 허구성을 차치하더라도 결국 능력주의는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나쁜 이데올로기다. 그런데 왜 일부 사람들은 능력주의에 기대를 거는 걸까?

일부 청년들이 공정한 경쟁에 매달리는 것은 그저 능력주의를 맹신해서가 아니다. “절차적 공정”, “공정한 경쟁”에 목을 매는 것은 부모 찬스가 없는 평범한 청년들이 오직 시험 같은 것을 통해서만 안정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공정’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청년 세대가 보수화됐다거나,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하고, 평등이나 연대보다 경쟁을 선호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최근 국회미래연구원에서 발표한 ‘한국인 미래가치관 연구’ 보고서는 20대가 다른 세대에 비해 훨씬 더 평등과 연대에 열려 있음을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 4년 동안 “국민이 체감한 교육”은 부와 특권이 대물림되는 동시에 경쟁도 강화되는 교육이었다 ⓒ출처 청와대

능력주의 논쟁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능력주의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불평등과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계속 제기돼 왔다. 미국 사회의 능력주의를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책들 — 특히, 《엘리트 세습》(대이얼 마코비츠)와 《공정이라는 착각》(마이클 샌델) — 은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한때 자본주의 황금기에 성장과 번영, 민주주의를 이끄는 기관차로 추앙받던 능력주의가 어쩌다가 지탄의 대상이 됐을까? 흔히 이데올로기적 변질(세습주의로 전락했거나 새로운 귀족주의로 변질됨)을 지적하지만, 근본적으로 경제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지고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기회균등’과 ‘능력과 노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이 현실에서 점점 더 실현되기 어려워진 것이다.

능력주의의 기원과 부상

능력주의는 어떻게 생겨났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성장하게 됐을까? ‘개인의 능력에 따른 대우’라는 신조는 자본주의와 함께 탄생했다. 프랑스 혁명은 혈통이나 신분이 아니라 ‘재능에 의한 출세’를 기치로 내걸었다. 당시로서는 귀족세습주의에 맞선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이 있었다.

능력주의가 주되게 작동하는 분야는 교육과 직업 분야다. 대학 입학 시험인 독일의 아비투어는 1788년에, 프랑스의 바깔로레아는 1808년에 도입됐다. 그 시대에 시험은 인간을 신분에서 해방시켜서 평등한 개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장치로 인식됐다. 한편 19세기에 국가기구의 역할이 확대되고 행정의 전문성이 크게 요구되면서 영국에서는 1870년, 미국에서는 1883년에 국가관리, 즉 공무원을 임용하는 데에 시험제도를 도입했다. 이전의 전통적인 임용 방식은 부패와 무능으로 비난을 받았고 공개 경쟁 시험제도는 투명하고 공정하게 능력 있는 관리를 뽑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인식됐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용어는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의 부상》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책의 핵심 내용은 능력주의가 귀족주의를 물리치고 처음에는 평등사회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능력에 따른 엘리트 지배체제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풍자 소설이었지만 그가 경고한 바는 현실이 됐다. 1945년 영국에서 노동당이 집권했고 중등교육을 대폭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노동당이 능력주의와 타협하면서 교육 기회의 확대가 결국은 능력에 따른 교육의 계층화로 이어졌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기회균등과 능력에 따른 차등 보상이라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틀이 자리를 잡았다.

1950~1960년대 미국에서는 일종의 능력주의적 대학 입시 개혁이 이뤄졌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비리그와 같은 엘리트 대학은 성적보다는 어느 가문 혹은 어느 학교 출신이냐, 학비를 낼 재력이 있느냐 등을 더 중시했다. 그러나 하버드에서 입학 전형 요소에 대입 자격시험인 SAT를 포함하고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부유층이 아니어도 성적이 우수하면 학생을 뽑겠다는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고등교육이 대폭 확대됐는데, 산업과 기술이 발달하고 국제경쟁력이 중요해지면서 고급 인력과 유능한 엘리트들이 대거 필요해졌다. 1960년대 들어서 예일대가 성적만으로 입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무능한 엘리트를 유능한 엘리트로 대체하려는 노력이었다. 능력주의는 귀족세습주의에 비해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인력 배치 시스템을 체제에 제공했다.

오늘날 대중이 능력주의를 신념 또는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1950~19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 한국에서는 1970~1980년대 자본주의 급성장기에 중산층이 형성되고, 사회적 계층이동이 어느 정도 가능해 보였던 시기를 거치면서다.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하면서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반복되면서 점차 능력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약화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의 집중과 격차가 굳어진 것도 이런 효과를 냈다.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과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기가 끝나면서 능력주의가 발행한 약속어음이 부도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즉 계층이동이 아니라 양극화가 심화되고 중산층이 붕괴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기승을 부렸지만, 바로 능력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약화되면서 딜레마에 처해 있다는 점을 봐야 한다.

교육의 구실

흔히 교육은 ‘기회의 평등’을 상징한다. 대중교육, 즉 보편교육이 이런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교육의 기회는 결코 균등하지 않다. 대체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성적과 학교 수준이 결정되고, 그것이 향후 직업(소득과 지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 부모한테서 자녀에게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대물림되는 통로가 된다. 가정환경에서부터 사교육, 공교육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재력에 따라 자녀가 경험하는 교육의 양과 질은 천지차이다.

2018년 한 통계를 보면, 소득 300만 원 미만 가구의 고등학교까지의 양육비 지출이 8000만 원 정도인데, 소득 600만 원 이상의 가구는 양육비가 9억 원 정도로 10배 넘게 차이가 난다. 여러 연구와 통계를 종합해 보면, 가난한 집 자녀들은 직업계 고등학교를 나와서 대학도 못가고 저임금 일자리로, 부잣집 자녀들은 특목고나 자사고, 명문대를 나와서 고소득 전문직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진짜 부자들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어려운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받는다. 미국의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는 ‘엘리트 유치원 – 사립학교 – 아이비리그 – 전문대학원’인데, 총 학비만 평균 100만 달러(약 11억 3000만 원)가 넘는다. 한국의 경우,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총 학비가 6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사교육비 등을 포함하면 교육 기회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교육은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아니라 계급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한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야” 하고 말했는데, 정말이지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진짜 실력이다!

시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핵심 논리는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시험, 특히 필기시험이 가장 공정하다는 믿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자본주의에서 시험이 하는 구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국가가 교육을 통제·관리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학생을 선발, 배치하기 위해서다. 즉 엘리트, 전문직, 중간관리자, 숙련 또는 미숙련 노동자 등으로 위계화된 노동시장에 배치하는 구실을 한다. 시험은 자본주의 초기에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이 수량화되듯, 인간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 결과도 수량화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에서 초등교육이 확대되면서 표준화 시험이 도입됐다. 일선 교사들이 해 오던 교육과정이나 평가(주로 구술 평가)는 낡고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대신 표준화 시험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공정하다는 믿음이 주입됐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중등·고등교육이 확대됐는데, 대규모로 학생을 선발·배치하기 위해 표준화 시험이 빠르게 확산됐다. 20세기 초에는 과학주의, 계량심리학 등의 이름으로 지능검사가 유행했는데, 1914년 개발된 선다형 시험 덕분에 값싸고 빠르게 대규모 집단의 지능검사를 실시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는 대학입시에서도 에세이 시험이 사라지고 선다형 시험만 남았다.

한국에서는 해방 후 미국 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50년대부터 지능검사를 광범하게 실시하기 시작했는데, 효율적으로 인간을 사회에 배치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려는 사회개혁의 일환이었다. 또한 ‘과학적 평가운동’이 전개되면서 입시, 각종 고시, 공무원시험이 객관식 시험으로 전환됐다. 객관식 시험은 값싼 비용으로 대규모 집단을 측정해 서열화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표준화 시험은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과학적인 도구로서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효율적인 평가로 여겨지며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1995년 5·31 교육개혁 이후, 산업과 기술이 고도화되고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수행평가, 수시, 학생부 종합전형(학종) 등이 생겨났고 취업 전형도 다양해졌다. 객관식 지필고사만으로는 유능한 노동력을 길러내거나 평가(선별)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능력을 시험 결과로 서열화한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필시험’이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오래된 상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시험이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공정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표준화 시험이 다른 평가 방식보다 더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것은 신화일 뿐이다. 학종을 흔히 ‘금수저 전형’이라고 하는데, 실제 학종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수능 점수가 부모의 경제력과 상관관계가 더 높다. 정시냐 수시냐, 수능이냐 학종이냐를 두고 논란이 많지만 둘 다 노동계급에게 불공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에서 교육과 시험이 하는 구실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노동자 정부는 시험과 성적제도, 그리고 졸업장과 학위제도를 폐지했다. 노동자를 선별하고 관리·통제하기 위한 제도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한 상식과 달리 시험 제도는 개인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수단이 못 된다 ⓒ사진공동취재단

노동에서의 공정 논쟁

노동 분야에서 공정성과 관련한 핵심 이슈는 두 가지다. 하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임금 격차다.

일련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에서 거듭 ‘공정성’ 문제가 제기됐다. 취준생과 정규직 노조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이들은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역차별”, “무임승차”, “로또 취업”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사태를 보면서 일각에서는 능력주의에 사로잡힌 대중의 그릇된 공정 관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겉모습만 보면 일부 청년이나 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정’을 내세워 ‘차별’을 옹호하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사태의 본질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우선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이 벌어진 핵심 원인은 문재인 정부의 ‘돈 들이지 않는’ 개혁이다. 실제로는 개혁에 필요한 재정은 거의 투입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취준생들은 가뜩이나 좁은 취업문이 더 좁아진다는 불안감에 내몰렸고, 점점 더 조건이 악화되고 있던 정규직들도 앞으로 임금과 복지가 더 깎이지 않을까 불안했을 것이다.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이간질을 부추기고 책임을 회피한 정부다.

둘째, 투쟁적 대안의 부재가 가뜩이나 열악한 처지의 청년·학생들이 능력주의적 대안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비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일부 노동조합 지도부는 계급 단결이라는 원칙을 옹호하기보다는 조직 보존을 선택했고, 정부의 이간질에 취약해진 노동운동은 청년·학생들의 불안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대안으로 보이지 않았다. 노동운동이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는 노동조합 지도자들뿐 아니라 올바른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좌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임금 격차와 직무급제

흔히 임금 격차에 대해 말할 때는 고용 형태와 기업 규모의 측면에서 따진다. 통계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의 60퍼센트,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도 대기업의 60퍼센트 정도다. 물론 이것은 해소돼야 할 격차다. 그런데 이런 격차가 왜 생겨났을까? 그 이유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가 임금을 너무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임금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2019년 기준, 월 임금 200만 원 이하인 임금근로자가 전체 임금근로자의 37퍼센트에 달한다. 그만큼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실제 진정한 임금 격차는 CEO와 일반직원 사이에서 벌어진다. 격차가 수십 배에서 수백 배에 달하는데, CEO는 일반직원이 평생 일해서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연봉으로 받는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노동자가 CEO의 1년 연봉만큼 벌려면 무려 143년을 일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주는 계급 간 격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서 이른바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호봉제가 나이 많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이롭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직무급제가 임금 차별을 해소하고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을 실현할 공정한 임금체계인 양 선전한다. 공정에 민감한 청년들이 다른 정치적 대안이 없다면 이런 이간질에 휘둘릴 수가 있을텐데, 언론 보도를 보면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직무급제에 대한 찬성률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직무급제의 본질은 결코 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나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 차별을 받아 왔으므로 그들의 임금을 대폭 올려주면 될 일이다. 직무급제는 직무 평가에 따른 보상을 한다면서 차별을 합리화, 정당화한다. 어떤 직무가 가치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에 사용자의 관점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사용자들이 보기에 이윤 창출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업무, 가령 경영이나 관리와 같은 이른바 ‘핵심’업무는 높은 가치를 받는 반면, 청소·식당·경비·시설관리·사무보조 등 ‘비핵심’업무는 낮은 가치를 받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직무급제 하에서 이들의 저임금은 더는 차별이 아니라 직무가치에 따른 공정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직무급제는 결코 청년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할 대안이 못 된다. 공정성을 핑계로, 특히 청년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을 하향평준화하려는 정부와 기업주에 맞서 단결해 싸워야 한다.

불평등의 원인과 대안

능력주의 논쟁은 결국 불평등의 원인과 대안을 둘러싼 것이다. 최근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불평등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런저런 주장들이 많은데, 불평등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 문제와 직결돼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은 노동 착취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계급과 착취에 기반하지 않고 불평등을 설명하는 일련의 이론들은 모두 잘못된 대안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길게 언급할 수 없지만, 최근 유행하는 세습론이나 세대론이 그런 사례다.

능력주의 문제 역시 체제와 계급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능력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윤리적 관점을 반영하고 노동 착취와 이윤 경쟁 체제라는 특수한 사회적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공정하냐 불공정하냐는 물음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데, 능력주의는 자본가 계급에게는 공정하고 정의롭지만 노동자 계급에는 불공정하고 차별적이다.

진보진영 내 적잖은 사람들이 존 롤스나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을 합리적인 대안으로 여긴다. 롤스는 기본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는 “사회제도의 제1덕목”으로 “정의”를 제시했는데, 그가 제시한 정의의 원칙 중 그 유명한 ‘차등의 원칙’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 득이 될 때만 허용된다는 원리이다. 이 원칙은 한편으로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과 복지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다. 롤스는 정의의 문제를 ‘공정성’의 문제로 봤는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공정하기만 하면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롤스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을 비판하고, 공동체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공공선’은 계급 적대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라는 개념은 계급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탈능력주의를 조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계급이라는 요인 때문에 둘을 조화시키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는 냉혹한 경쟁을 정당화하고, 알량한 기회를 제공한 다음 불평등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에 반대하고, 지배자들이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능력주의 옹호자들이 말하는 ‘공정한 기회’, ‘동일한 출발선’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막대한 부의 재분배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4년의 현실을 보듯이, 저들은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다.

능력주의에 대해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담론들이 대안 문제에서 급진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서 능력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분배 원리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현행 조건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사실상 능력주의는 유일하게 ‘공정한’ 분배 체계가 된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자원을 차등적으로 보상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전제가 잘못됐다. 자본주의 하에서 자원이 부족해 보이는 주된 이유는 부가 소수에게 집중돼 있고 생산이 대중의 필요가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위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엄청난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주거, 음식, 의료 등)조차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치와 낭비가 극심하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하고 생산을 이윤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민주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개인의 필요와 사회적 이익을 조화시키면서 개인의 필요에 훨씬 더 잘 부응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야기대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가 된다면 우리는 더는 공정이나 정의를 사회윤리로서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일부 청년들이 공정성이나 능력주의에 기대를 보이는 것은 그것을 맹신해서가 아니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좌절하는 청년들에게 공감하면서도, 불평등한 현실을 바꾸는 진정한 동력은 개인의 경쟁력이 아니라 계급투쟁과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에 달려 있음을 차분하게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과 저항이 불평등의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향하도록 안내해야 할 것이다. 평등주의적 정의는 오로지 자본주의에 반대함으로써만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와 공정에 대한 논란 속에서 이준석 같은 우파들은 경쟁을 더욱 부추기고 정부는 직무급제와 같은 노동개악을 ‘공정’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진보·좌파들이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지만, 정부의 이간질이나 노동개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지는 못하다. 한 예로, 노동운동 내 일각에서는 연대임금제나 사회적 직무급을 노동계급 내 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안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데올로기적 개입과 계급투쟁 건설 모두에서 혁명적 좌파의 구실이 중요하다.

불평등을 완화하려면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집단적 투쟁이 필요하다 ⓒ이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