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는 노동계급의 문제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 산불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유럽과 북미를 덮친 역대 최악의 산불, 섭씨 50도를 웃도는 북아메리카의 살인적인 폭염, 중국과 인도에 거세게 몰아친 폭우, 200년 만의 서유럽 대홍수,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극의 고온 현상 등등. 한국에서도 밤낮없이 이어지는 폭염이 기승이다.

전례 없이 심각한 기후 재난은 2018년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내놓은 전망을 이미 앞질렀다. IPCC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며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시했는데, 그조차 “보수적이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훨씬 더 신속하고 과감한 조처가 요구된다.

2019년 청소년들의 동맹휴업과 ‘멸종 반란’ 운동 등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기후 시위는 이런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이 운동의 유명한 구호는 “기후 변화가 아니라 체제 변화”였다. 기후 위기가 야기하는 위협이 실로 심대하고, 시스템을 바꾸는 급진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공감대가 커졌다. 한국에서도 그해 9월 21일 4000여 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후 위기에 시급히 대처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여러 나라의 정상과 권력자들도 이를 부정하지 못한다. 바이든이나 문재인 정부도 탄소 배출을 대폭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사태의 심각성에 비춰 보면, 각국 정부의 계획은 그럴싸한 말과 달리 너무 느려 터졌고, 매우 부실하고, 시장의 이윤 논리에 종속돼 목표를 이루기 어렵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371호 ‘권력자들은 정말로 기후 위기를 해결할까’를 보시오.)

그런 가운데 탈탄소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조건 문제도 부상했다. 가령 화석연료를 태워 전력을 생산하거나 탄소 배출량이 많은 철강·자동차 등처럼 급격히 줄여야 하는 산업에서 일자리 축소와 대규모 해고가 벌어질 수 있다. (물론, 재생에너지 산업 분야 등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

지금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이 바로 이런 상황에 처했다. 석탄 발전에 주력하며 노동자들을 위험천만한 작업으로 내몰아 온 정부와 사용자들은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면서 또다시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려 한다.

정부가 발표한 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2034년까지 노후 석탄발전소 28기가 순차적으로 폐쇄된다. (추가로 석탄발전소를 또 짓고 폐쇄된 석탄발전소를 LNG로 전환하겠다는 등 탈탄소와는 거리가 멀다.) 단순 계산해 봐도, 올해 12월부터 몇 년 안에 노동자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석탄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8000여 명의 고용불안이 예상된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고용·조건 후퇴 압력으로부터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수년에서 수십 년을 이곳에서 일했다. 그런데 이제 어디 가서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가족의 생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불안해 하고 있다. 일부 발전소에선 (우선 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30퍼센트의 임금 삭감을 전제로 한 교대제 개편도 시행되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도 ‘전기차 전환’에 따라 기존의 내연기관차 부품을 생산하던 노동자들의 고용·조건이 위협 받고 있다. 사용자들은 부품 수가 줄어 40퍼센트가량의 인력 감축이 불가피하다고 노동자들을 압박한다. 이미 일부 사업장에선 부분적 인력 감축, 조건 후퇴 공격이 추진되고 있다. 전기차 부품 생산 능력을 갖추지 못한 부품사·협력업체는 앞으로 공장 문을 닫게 될 수도 있다.

정의로운 전환의 제안 배경

기후 위기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지, 탈탄소 산업재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뜨거운 이슈다. 그린뉴딜과도 한 쌍을 이루는 정의로운 전환은 이를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정의로운 전환은 탄소 배출량이 많은 산업을 친환경적으로 ‘전환’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산업재편으로 일자리를 잃을 노동자들에게 재취업 교육과 대체고용, 생계 지원금, 사회보험 등을 제공하자고 한다.

정말이지 기후 재앙을 막으려면, 화석연료 기반 산업의 폐기와 재생에너지 전환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기후 위기에 아무 책임도 없는 노동자들에게 대가가 떠넘겨져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정의로운 전환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옳다.

적잖은 환경엔지오와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환경’과 ‘노동’을 별개의 문제라고 보거나,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 것과 노동자의 일자리·조건을 지키는 것이 서로 대립된다고 여겨 왔다. 이에 비하면 정의로운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의미가 있다.

‘환경’과 ‘노동’ 두 문제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기후 위기는 노동계급의 문제다. 기후 위기는 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자들, 빈곤층이 가장 큰 피해자다.

세계 곳곳에서 해수면 상승과 홍수, 산사태 등으로 집이 무너지고 생활 터전을 잃고 가족을 잃은 가난한 노동계급 사람들의 통곡이 이어지고 있다. 마땅한 냉방시설도 없이 한여름을 쪽방촌에서 이겨 내야 하는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폭염은 치명적이다. 폭염으로 인한 농축산물 가격 상승은 노동자·서민의 생활고를 가중시킨다.

또, 야외에서 건물을 짓고, 배를 만들고, 물건을 배달하고, 전력·통신망을 관리하고, 청소하는 노동자들에게 폭염은 지옥 같은 노동 환경을 만든다. 임시선별진료소, 유통업체 물류센터, 학교 급식실 등 옥내에서 일하는 일부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폭염 속 건설 현장은 불지옥이다. 숨 막히는 무더위에도 안전화에 긴 바지를 입고, 버프로 목을 감싸고, 안전모를 쓰며, 마스크를 착용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이 줄줄 흐른다. 등에 소금꽃을 수십 번 피워내야 하루가 간다.”(건설노조, 7월 21일 폭염 대책 촉구 기자회견에서)

폭염속 건설현장은 불지옥 건설현장 온도가 44도로 측정된 온도계 뒤로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출처 건설노조

그런데 기후 위기를 해결하겠다면서 또다시 노동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노동자들은 화석연료 산업에 이해관계가 있지 않고, 오히려 그로부터 피해를 입어 온 당사자다. 이런 노동자들에게 또다시 실업과 노동조건 후퇴 등 고통을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화석연료를 생산해 거대한 부를 축적한 기업주들(석유·석탄·가스 등)과, 그 화석연료를 태워 환경을 파괴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둬 온 기업주들(자동차·기계·제철·화학·유통 등), 또 화석연료를 태워 만든 전기를 값싸게 공급받아 이윤을 축적한 기업주들(반도체·IT·서비스 등), 이들에게 투자금을 빌려주고 이자를 나눠 받아 온 금융 기업주들에 이르기까지, 화석연료 산업에 투자를 결정하고 막대한 이윤을 얻어 온 자본가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를 위한 산업정책을 펴며 자본가들을 뒷받침해 온 정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노동자들은 이들에 맞서 일자리와 조건을 지키고 기후 위기를 해결해야 할 이해관계와 그것을 실현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지구 환경을 파괴하고 일자리를 위협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들의 노동 없이는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관건은 어떻게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높이고, 투쟁을 연결시키고,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정부의 ‘공정한 노동 전환’ — 말로만 “친환경” 산업 구조조정

그린뉴딜처럼 지난 몇 년 사이 정의로운 전환 논의도 주류화 했다. 특히 2015년 주요국 정상들이 참여한 파리 기후협약의 서문에 ‘정의로운 전환’ 문구가 포함되면서, 이 개념은 국제기구나 주요 국가, 지방정부들의 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취지가 비틀어지고 ‘녹색’ 포장지로 전락하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공정한 노동 전환’도 그런 사례다.

문재인 정부는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그때까지 산업재편을 추진해 탄소 배출량을 대폭 줄이고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을 끌어올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가 검토 중인 계획은 “탄소중립”과 거리가 멀다. 화석연료가 전체 에너지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지언정 온실가스는 여전히 대량 배출하는 계획이다. 게다가 그런 계획조차 공허한 말뿐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기 위한 재정 조달 계획도, 강제 수단도 없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380호 ‘문재인 정부의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탄소중립·탈핵 포기 시나리오’를 보시오.)

정부는 석탄발전소를 폐쇄하겠다지만 지금도 7곳을 추가로 짓고 있다. 폐쇄된 발전소를 LNG 발전으로 돌리겠다니, 지금보다 양은 줄겠지만 여전히 온실가스를 대규모로 뿜어낼 것이다.

‘녹색’ 포장지로 전락한 문재인 정부의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무엇보다 정부는 ‘기후 악당’ 대기업들과 손잡고, 민간 투자를 대폭 유치해서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고 한다. 정부가 신설한 ‘탄소중립위원회’에는 현대차, SK, 포스코 등 국내 주요 화석연료 관련 산업의 기업 임원들이 포진해 있다. 이 기업들 모두 탄소중립을 말하지만, 전혀 효과적이지 않고 심지어 아직 상용화가 요원한 기술로 탄소중립을 이루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를 보나 지금 내놓은 계획을 보나 진정으로 기후 위기를 막는 데 관심이 없다.

가령, 포스코는 국내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압도적으로 많이 하는 기업이다. 에너지 사용량도, 미세먼지 배출량도 가장 많다. 그런데 이제 포스코는 “기후 악당의 오명”을 벗고 “그린으로 변신”하겠다며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철강 생산 과정에서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하는 ‘수소환원제철’로 전환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술은 아직 개발도 안 돼 있는데다가, 포스코는 이를 위한 구체적 투자 계획도 내놓지 않고 있다. 공허한 “탄소중립” 외침만 있을 뿐이다.

더구나 최근 역대급 영업 실적을 낸 포스코는 2030년까지 조강(쇳물) 생산능력을 6000만 톤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국제적 생산 능력을 1.3배 더 늘리겠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북미에서 석탄 고로가 아니라 전기로를 활용하겠다지만, 지금 전력 생산은 압도적으로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포스코가 선언한 탄소중립은 알맹이 빠진 말뿐이고, 적어도 앞으로 10년간 탄소 배출량은 오히려 더 늘어날 공산이 크다. 포스코는 중국이 철강 생산량을 일부 줄인 틈을 노려 시장에서 더 큰 지분을 차지하려고 생산을 늘리려는 것이다.

사실 주요 기업들이 ‘탄소중립’을 약속하는 이유는 당장 주요 선진국들이 추진하는 (역시 구멍 많은) 탄소국경세 등 무역 규제에 대처하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일 뿐이다. 빌 게이츠가 “(기후 변화가) 엄청난 경제적 기회”라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분적으로 탄소 저감을 시도할 수 있지만 진지하게 나서지는 않는다.

일부 정치인들은 탈탄소 전환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도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핵심 동력인 국가·기업 간 치열한 이윤 경쟁 속에서 주저하고 동요하며, 전환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폭을 제한하려고 한다.

따라서 기후 위기 해결을 시장과 기업들에 맡겨 두거나 그들과 타협하는 방식으로는 유의미한 개선을 이룰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탄소중립” 산업재편이 실제로는 “친환경”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자본주의 효율성 제고

그렇다면, 정부가 추진하는 산업재편의 진정한 실체는 무엇일까?

지금 지배자들의 고민거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부터 장기화된 경제 침체다. 일부 산업 분야에서 부분 회복이 있지만 그 역시 불확실성이 크다.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국가 경제와 산업 전반의 생산성·경쟁력을 끌어올릴 구조조정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자들 내에서 커져 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기업주들은 마침 부상한 기후 위기 대응 요구를 명분 삼아 산업 구조조정 추진에 탄력을 불어넣으려 한다.

문재인 정부가 최근 잇따라 쏟아 낸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6월 28일), 〈한국판 뉴딜 2.0〉(7월 14일), 〈선제적 사업구조 개편 활성화 방안〉(7월 22일),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한 공정한 노동전환 지원 방안〉(7월 22일) 등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 패키지다. 여기서 “저탄소”, “그린”, “친환경”이라는 말이 수십 번 반복되지만, 허울뿐인 미사여구를 거둬 내고 보면 핵심은 한국 자본주의의 효율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수소·전기차, ICT·반도체, 바이오 산업 등 저탄소·디지털 중심의 “미래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한다. 이런 계획은 문재인 정부가 임기 초부터 내놓은 것이고, 박근혜 정부도 ‘창조 경제’의 주요 방향으로 내세웠었다. 그런데도 “미래 산업” 육성이 잘 안 돼 온 이유는 만성화된 세계경제 불황으로 신규 사업 투자 전망이 어두운데다 오랫동안 구축해 놓은 화석연료 연관 산업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정부는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완화해 주고, 세금을 대폭 깎아 주고, 금융 지원을 확대해 기업에 유리한 투자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또, 이윤 경쟁력이 낮은 사업을 더 쉽게 축소·정리하고 돈벌이가 되는 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산업 구조조정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가 삼성 이재용의 더러운 범죄야 어떻든 그의 사면(가석방)을 추진하는 것도 ‘반도체 산업 육성이 최우선’이라는 노골적인 친기업 관점을 보여 준다.

특히 정부는 이번에 다시 “시장 친화적”이고 “선제적”인 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이에 더해 자동차 기업주들은 전기차 전환 시에 노조 동의 없이도 인력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법 개악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시장 친화적” 구조조정의 실체는 지난 몇 년 사이 한국GM 군산 공장 폐쇄 과정에서, STX·성동조선소 청산 위기에서, 금호타이어 매각 과정 등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정부는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된 해고를 묵인·방조하고, ‘상생의 고용안정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장기간의 무급휴직을 강요하고, 임금 삭감과 노동조건 후퇴를 압박했다. 이번에도 정부는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복지 삭감과 공공서비스 악화로 이어질 수 있는 방안들을 내놓았다.

결국 “친환경” 산업재편이란 것은 포장일 뿐이고, 이윤 획득에 눈이 벌개진 자본가들에게만 이로운 조처들이다.

노동자 희생 강요

물론, 정부는 말로는 산업재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노동자들에게 “공정한 노동 전환”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이것을 정말 진지하게 추진하고자 한다면, 대대적인 재정 지출이 필수적이다. 태양광·풍력발전 등 친환경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노동자들의 고용·조건을 보장하고, 재취업 때까지 충분한 생계비와 무상의 양질의 교육훈련 기회를 제공하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발표한 방안은 이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되레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떠넘기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째, 정부의 ‘공정한 노동 전환’ 지원 방안에는 고용을 보장하는 내용이 없다. 정부는 지역 차원에서 전기차와 신재생에너지 산업 등을 육성하겠다지만, 확실한 약속 없이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추상적 말뿐이다. 그 외에 정부가 만들겠다는 ‘상생형 지역 일자리’는 광주형 일자리로 대표되는 저임금 일자리다.

굳이 앞으로의 계획을 볼 것도 없이, 지금 정부는 석탄화력발전소 비정규직의 직접고용 요구도 외면하고 있다. 산자부와 기재부는 ‘필수유지 업무에 종사하는 발전소 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국가인권위 권고를 최근 또다시 거부했다. 자회사 전환과 민간위탁 유지가 최선이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이 노동자들은 직접고용 정규직이 될 자격이 충분한데다, 앞으로 닥칠 고용불안을 생각하면 그 필요가 더 절실한데도 말이다.

둘째, 정부가 그나마 노동자들을 위한다며 내놓은 방안은 (기약 없는) 재취업 훈련, 생계비 (지원이 아니라) 대부, (망하기 십상인) 창업 컨설팅 등 사후적이고 보잘것없는 수준의 지원에 머문다. 기업주들에게는 지난 한 해에만 100조 원가량을 지원했고 앞으로도 막대한 자금 지원과 온갖 특혜를 제공하겠다면서 말이다.

재취업 훈련이라는 것도 확실한 고용이 보장돼야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몇 해 전 일자리를 잃은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미용 기술이나 가르쳤던 것의 반복이 되기 쉽다.

셋째, 결국 이런 수준이면 노동자 희생은 불가피해진다. 실제로 정부는 “불가피한 노동 전환에 대한 노사정 노력 의무”를 부과하겠다고 한다. 그간의 경험을 봤을 때 이는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에 협조하라는 것이다. 즉, 양보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직장을 옮기기 위한 ‘전직’ 준비 기간에는 노동시간을 줄여 재취업 교육을 받되 임금을 삭감하라고도 한다.

문재인 정부는 이 같은 내용의 ‘공정한 노동 전환’ 지원 방안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적 대화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하반기부터 산업별·지역별 노사정 대화를 해 나가겠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대화 추진의 목적은 분명하다. 노동자들에게 국가·산업 경쟁력을 위한 구조조정에 협조하라는 것이다. 이번에 정부가 (지난해 7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된)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협약’을 유사 사례로 제시한 데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적 대화를 통한 계급 타협을 거부하고 싸워야 한다.

환경엔지오, 노동조합, 좌파정당들의 정의로운 전환

문재인 정부의 ‘2050 탄소중립’과 ‘공정한 노동 전환’은 민주노총과 온건·급진 좌파, 환경엔지오 등 여러 단체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거기에 “정의로운 전환은 없다”는 당연한 이유에서다.

이들 단체는 지난 5월 말 정부가 개최한 녹색성장 정상회의(P4G)를 “그린 워싱”이라고 폭로하며 규탄했다. 그에 앞서 정부가 각계각층의 대표자들을 불러모아 구성한 탄소중립위원회에도 대체로 참가를 거부했다. (유감스럽게 한국노총, 환경운동연합 등은 참가해 문재인 정부에 녹색 분칠을 해 줬다.)

민주노총과 주요 산별노조들, 정의당·진보당 등은 정부가 발표한 ‘공정한 노동 전환’ 지원 방안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내놓았다. 고용 보장이 빠진 매우 제한적인 지원에 그치고, 노조의 참여를 배제했다고 비판한다. 기후위기 비상행동 등은 탈탄소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고용 보장과 피해에 대한 충분한 보상, 녹색 일자리 창출, 석탄발전소 건설·투자 중단과 신공항 건설 중단 등을 요구한다. 지지할 만한 것들이다.

5월 30일 석탄화력분야 노동자 고용보장과 에너지 전환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 ⓒ이미진

이런 단체들이 제시하는 방안들이나 요구가 차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정의로운 전환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탄소 중심 경제를 ‘녹색 경제’로 전환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 피해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요구를 정말로 실현하려면, 자본주의 이윤 논리와 정면 충돌이 불가피하다.

화석연료 문제만 생각해도 그렇다. 자본주의 경제에는 화석연료가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전력, 제조업, 교통, 식품, 농업, 생필품 생산, 유통 등 거의 안 걸친 산업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를 전부 폐기 처분하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지배계급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일부는 필사적으로 막아 서려 하고, 일부는 그 필요를 부정하지는 않아도 경쟁적 축적의 족쇄에 묶여 주춤거릴 것이다. 따라서 신속하고 과감한 탈탄소 전환을 위해서는 기존 정치·경제 권력과의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이 점은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조건을 지키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정부와 사용자들은 어떻게든 노동자들을 희생시켜 경제 위기의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전환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자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삶을 지키려면, 자본의 이해관계를 거슬러 투쟁해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 존 벨라미 포스터는 “정의로운 전환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축적하고, 또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 오경과 예언서의 말씀이니라!’라는 논리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로운 전환은 “계급 투쟁과 필연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어야 한다”며 “아예 다른 생산 양식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환경엔지오, 노동조합, 좌파정당들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거나 회피하면서 “이제 탈탄소 전환은 불가피해졌다”고 말하고, 정책적·법률적 수단 제시에 골몰하기도 한다. 운동 내 정의로운 전환 논의에서 계급투쟁에 대한 강조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연착륙

환경엔지오, 노동조합, 좌파정당들 내에서 가장 유력하게 제시되는 대안은 체제 내에서 이해 당사자들의 “상호 협력”을 통해 녹색 산업재편을 추진하는 것이다. 기후 위기의 원인이 재벌 대기업 등의 특정 세력이나 그들이 주도하는 산업구조(“에너지 산업체제”, “교통체제” 등)에 있다고 보면서, 모든 경제 주체들이 협력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이루자고 한다.

금속노조는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산업재편의) 연착륙”(강조는 필자)이라는 말로 이런 문제의식을 표현했다. 이는 국제노총(ITUC)이 제시하는 정의로운 전환의 정의에 부합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정의로운 전환은 노동조합 운동이 좀더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한 변화를 순탄하게 하고 ‘녹색 경제’의 역량을 제공하도록 국제사회와 공유하는 수단이다(강조는 필자).

즉, 탈탄소 전환을 위해 이윤 체제와 그 권력자들에 맞서 투쟁(충돌)하기보다 체제 내에서 “순탄”한 전환을 위해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조나 온건 좌파 정당의 지도자들이 ‘대화의 장(場)’에서 이를 위한 다리가 되겠다는 것이다.

환경엔지오, 노동조합, 좌파정당들의 정의로운 전환 논의에서도 “피해자 권리의 최대 보호”, “전환 비용의 사회적 분담”, “취약계층의 피해 최소화”, “이해 당사자의 (논의) 참여”(강조는 필자) 등과 같은 지향을 발견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지만, 일정한 부담을 나눠 지자는 것이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지난 3월 토론회에서 제안한 ‘기후정의법’(황인철 공동집행위원장 발표)이나, 정의당의 기후 위기 대응 법안도 정의로운 전환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런 주장들에는 노동자들의 이익과 사용자들의 이익이 조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계급 협조를 통해 기후 위기도 해결하고, 노동자들의 고용도 지키고, 산업 경쟁력도 높이는 ‘합리적 선택’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에 미래 경쟁력이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주들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노동자 착취를 강화하고, 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기술에 여전히 의존한다. 그들에게 최선의 ‘합리적 선택’은 단기적 이윤 확보에 있다.

그러므로 정부와 기업주들에 협력해 “정의”(합리적 선택)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공상적이다. 노동운동이 계급 협조로 기울수록, 되레 탈탄소 전환의 폭과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거나 노동자들도 일정한 희생을 부담해야 한다는 압력에 처하게 될 것이다.

가령, 정의당이 제안하는 방안들에서 그런 모순이 드러난다. 정의당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50퍼센트 줄이고 재생에너지 비율을 50퍼센트로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동시에 “질서 있는 전환 전략”도 필요하다고 한다. “국가재정운용계획을 고려”해야 한다거나 “민간부문과 조화로운 발전·협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은미 의원이 지난 4월 대표발의한 ‘기후 위기 대응과 정의로운 녹색전환을 위한 기본법안’에 이런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 운용계획을 ‘고려’(실제로는 그에 좌우되는)하거나 시장과의 조화를 추구해서는 탈탄소 전환을 이룰 수 없다. 사태의 시급성을 볼 때, 정부가 앞뒤 가리지 말고 일단 필요한 만큼 충분한 지출을 해야 한다는 급진적 제안이 그린뉴딜 운동 일부에서 나오는 이유다. 부자·기업주들에게 세금을 걷고 국방비를 대폭 삭감해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또, 가령 요즘 노동운동 안에서 고개 드는 천연가스(LNG)발전 활용론도 한계가 있다. ‘천연가스는 친환경’이라는 지배자들의 주장과 달리, 운동 내에서는 LNG가 친환경이 아니라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석탄발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온실가스를 덜 배출하는 LNG발전이 에너지 전환의 “주요한 가교 역할”(공공운수노조)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런 입장은 석탄발전소의 전면 폐지를 요구한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석탄을 LNG로 대체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을 용인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쉽다. 나중에 가서 LNG발전을 폐기하고자 해도, 지배자들은 그간 새롭게 축적된 투자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면 탈탄소 전환은 또다시 멀어지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날씨 변화에 따른 재생에너지(태양열·풍력 등) 공급의 불안정성 문제는 충분히 많은 설비와 저장기술(ESS 등) 활용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려면 LNG발전보다 막대한 비용이 들겠지만, 그만큼 일자리도 늘 것이다. 비용의 효율성보다 기후 위기를 멈추는 데 우선순위를 확실히 둬야 한다.

전환 비용의 분담

환경엔지오, 노동조합, 좌파정당들의 정의로운 전환 논의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세금 부담을 지우자거나, 전기요금 등 공공요금을 인상하자거나, 임금·조건을 양보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탄소세 도입 제안이 대표적이다. 정의당은 최근 이에 관한 법률안도 발의했다(교통·에너지·환경세법 전부개정법률안). 화석연료 “과소비”와 관련 산업 “조장”을 억제하자는 취지인데, 노동자·서민의 불가피한 소비와 기업주들의 이윤 생산을 위한 소비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노동계급에게도 부담을 전가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컨대, 현행 교통·에너지·환경세법은 휘발유 1리터당 475원의 세금을 부과하는데, 이것은 그 부담이 고스란히 개인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방식이다. 정의당의 법안은 이런 구조를 고스란히 유지한다.
그와 달리, 정의로운 방식이 되려면 세금이 법인세처럼 기업주들의 이윤에 부과돼야 한다. 사실 탄소세는 이에 대한 화석연료 기업주들의 격렬한 반발(충돌)을 피하려고 고안된 세금이다. 기후 운동 내에서는 이런 절충적이고 시장 원리를 따르는 대안들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 정규직 노사의 공동 출자 기금을 취약계층 지원에 활용하는 “사회연대전략”을 제안했다. 일각에서는 임금 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동안 보건의료노조·사무금융노조·공공운수노조·금속노조 지도자들이 추진했던 연대기금 제안에서도 볼 수 있듯, 그것은 비정규직·취약계층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해결하는 데 효과를 내지 못한다. 도리어 엉뚱한 데 책임을 지우는 효과를 내어 노동자들 사이에 반목과 갈등을 낳을 수 있고 단결 투쟁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해롭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315호 ‘사회연대기금,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노동자 단결에 도움 될까’를 보시오.)

임금 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도 유의미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은 기존 생활 수준을 지키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절실한 필요를 외면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불가피하지 않은 타협은 더한층의 양보 압박으로 이어지기도 십상이다.

예컨대, 2019년 현대차 노조 집행부가 전기차 생산을 이유로 20퍼센트 인력(정원) 감축에 합의하자, 사측은 한 발 더 나아가 40퍼센트 인력 감축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이듬해 사측은 현대차 울산 1공장을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변경하면서 전환배치·외주화 등의 공격을 단행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노조 집행부뿐 아니라 온건파·전투파를 막론하고 대의원의 다수가 불필요한 합의에 타협했다. 이는 노동자들의 실망을 자아내고 자신감을 갉아먹는 효과를 냈다.

그 점에서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이 석탄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조차 “실질적 급여 삭감”을 내용으로 하는 “자구책”을 매개로 노사정 대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한 것(〈프레시안〉, 2020년 8월 3일치)은 그 의도가 어떻든 부적절하다. 그는 한 토론회에서 “정규직은 많이 받고 비정규직은 덜 받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탈탄소 전환에서도] 그대로 가져가야 하느냐?”며 정규직의 임금 양보도 암시했다.

적잖은 환경단체 활동가들은 세금 인상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유류세 인상을 기후 변화를 막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고 노동자들에게 이를 수용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2018년 말부터 이듬해 초 유류세 인상에 반대해 거리에 나선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을 노동자들이 환경 정책의 반대자로 나선 사례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이나 세금 인상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엉뚱한 책임 전가일 뿐이다. 당시 프랑스 마크롱 정부는 긴축(재정지출 삭감) 정책의 일환으로 유류세 할인 제도 일부를 폐지하려 했다. 사실상 임금 보조금 일부를 삭감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맞선 저항을 고립시키려고 유류세 인상이 지구 환경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했다.

그러나 운동이 효과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이런 위선이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일부 노동자들과 좌파·사회주의자들은 노란 조끼 운동과 기후 저항, 노동조합 운동을 연결시키려고 애썼다. 노동자들에게 대가를 떠넘기지 말고 “부자들이 생태적 전환에 필요한 돈을 내게 하라”면서 말이다. 두 투쟁이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의 “같은 논리”, “같은 투쟁”이라는 구호가 시위대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런 관점은 지금 여기 한국에서도 적용돼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체의 공격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위한 투쟁을 기후 위기를 멈추기 위한 저항과 연결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참여가 정의”인가? — 사회적 대화 추구가 낳는 모순

노동운동 내 적잖은 사람들은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려면 사회적 대화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의 대화 제안에 대해서 여러 조건을 달지만 일부는 적극 호응할 태세다.

가장 먼저 달려간 쪽은 일부 환경단체 활동가들이다. 정부는 지난 7월 27일 경사노위 산하에 ‘기후변화와 산업·노동연구회’를 발족해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첫발을 뗐다. 여기에는 한국노총과 함께,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정책기획위원, (이미 지난해 국무총리실 그린뉴딜 특보로 정부에 입각했던)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 등이 전문가로 참여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들을 경사노위로 끌어들인 것은 의도가 다분하다.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 환경 활동가들을 매개로 노동운동에 계급타협의 압력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현우 기획위원은 일찌감치 국내에 정의로운 전환을 소개해 왔는데, 사회적 대화를 주요 원리로 강조한다. 그는 2019년 초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여안이 부결된 지 5개월 만에(정부가 노동개악을 추진하던 상황에서) “기후변화 대응 경사노위 만들자”고 노동운동에 제안하기도 했다.(〈프레시안〉, 2019년 6월 24일치) 기후 문제는 특별히 국가적 협력이 중요하다면서 말이다.

마침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사회적 대화에 적극적이다. 특히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는 정부가 경사노위를 대화 채널로 제시한 것이 문제라며 “노골적으로 민주노총을 배제하겠다는 선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경사노위만 아니라면 응할 수 있다는 메시지이다.

사실 정부도 민주노총을 의식해 “경사노위 ”(강조는 필자)이라고 열어 놨으니, 타협이 성사될 여지는 열려 있다. 정부가 산업별·지역별 대화를 제시한 것도 지난해 코로나19 노사정 합의안 부결 등으로 민주노총 중앙 차원의 노사정 대화 참여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양경수 민주노총 집행부는 정부의 ‘공정한 노동 전환’이 “노동자들에게 희생 강요[를] 수용하라는 메시지”라고 좀더 선명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희생을 설득하려는 대화 제안을 거부하기보다 노정 협의를 촉구하며 절충했다.

좌파 노조 지도자들도 사회적 대화를 추구하는 데서 예외가 아니다. 공공운수노조의 좌파 집행부, 금속활동가모임 등이 적극적이다. 노동전선 소속의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사회적 대화 제안이 포함된) 공동결정법안의 성공을 “각오”하는 금속노조 중집 성원들의 연명에 이름을 올렸다(자기가 속한 노동전선이 반대 입장을 표명했는데도 말이다). 일부는 민주노총 중앙 차원의 대화는 부적절하다면서도, 산업·업종별 대화는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 차원이냐 산업·지역별이냐, 노사정이냐 노정이냐 하는 교섭 형식의 차이는 본질적이지 않다. 가령 사용자 측이 협상장에서 빠지더라도, (앞서 살펴 봤듯이) 문재인 정부가 사용자의 편에 서 국가 경제·산업의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대화가 추진되는 맥락이다. 문재인 정부는 실질적인 탄소중립에 관심이 없고 되레 “시장 친화적”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공정한 노동 전환’을 고리로 노동자들의 양보와 희생을 압박하고 있다. 더구나 지금 정부는 코로나19 방역을 빌미로 민주노총을 탄압하고 있다. 지난 6월 말 택배 파업 승리 등 투쟁 분위기 확산을 차단하려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를 압박하려면 투쟁으로 맞서야 한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회복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정부와 사용자들은 웬만해서는 양보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사회적 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후 위기 대응의 시급성, 산업재편이 낳을 파장 등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사회적 대화 논란에서도 ‘특별한’ 사유는 있었다.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참여 주장에는 사회 양극화 해소와 노동기본권이라는 필요가, 지난해 노사정 합의 주장에는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취약계층 보호라는 필요가 제기됐다. 그럼에도 그것이 좌절됐던 배경은 정부가 그 절박한 필요를 외면하고 되레 노동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일각에서는 산업재편 과정에서 비명 한 번 못 질러 보고 일자리를 잃게 될 미조직 하청 노동자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예컨대, 금속노조는 전기차 전환으로 2·3차 부품업체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될 수 있다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정부와 원청사가 그 업체들에 전기차 생산 능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설득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안정적인 고용 유지 방안이 되기 어렵다. 부품사 사용자들이 전기차 전환 비용과 불확실한 경기 상황 등을 이유로 또다시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16~2019년 STX·성동조선소 노조 지도부가 정부에 기업 경쟁력을 지원(신용 보증과 발주 등)하라고 요구하며 사측과 협력했다가, 사측에 거듭 뒤통수를 맞고 해고와 무급휴직, 임금 삭감에 직면했던 데서 보듯 말이다.

오히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고용불안에 직면한 부품사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다. 광범한 연대 투쟁으로 성과를 낸다면 산업재편 과정에서 고용불안과 조건 후퇴에 처할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공동결정제도

주요 노조들이나 정의당·진보당 등은 일제히 “참여가 곧 정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다. 그것은 정부와 사용자들의 일방적 구조조정을 폭로한다는 점에서는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대화 참여로 정부와 사용자들을 강제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사실 사회적 대화 같은 방안은 투쟁해도 소용 없다는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구조조정 저지 투쟁을 해 봤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투쟁 자체가 아니라 투쟁을 효과적으로 했느냐이다. 노조 지도자들이 고용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며 양보를 거듭하거나, 개별 노조 차원의 대응으로 방치하는 경우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사회적 대화는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더 악화시키기 쉽다. 노조·정당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 주도권을 줌으로써 노동자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협상력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면, 노동자들은 무대 밖으로 밀려나기 십상이고, 이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약화시킬 수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 활성화에 도움이 안 된다.

이것은 정부가 노사정(노사) 파트너십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이기도 하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추진하는 중요한 목적 하나는 ‘노사 공동 운명체 정신’으로 노동자들을 현혹하는 사이에 노동운동을 무장 해제하는 것이다.”(김하영, 《문재인 정부와 노동운동의 사회적 대화》, 2020.04.13)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대화 파트너로 참여시켜 대우하면서, 한편으로는 공동 번영을 위한 희생을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의 발목을 잡고 저항을 마비시키려는 것이다.

그 점에서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사회적 대화와 함께 정의로운 전환을 이룰 수단으로 제시하는 경영참여 방안도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최근 금속노조는 노동조합이 산업·지역·사업장 수준에서 산업정책 논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내용의 경영참여 활성화 법안(정의로운 산업전환을 위한 공동결정법안)을 내놓고 열정적으로 입법화 추진에 나서고 있다. 이를 통해 “산업·기업의 미래발전”과 “노동자 희생 없는 사회의 지속가능성”, 즉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공동결정법안에 대한 10만 국민청원 동의 모으기 시도는 한 차례 기한 연장으로도 1만 5308명의 동의만을 얻어 자동 폐기됐다. 금속노조 조합원 수가 18만 5000여 명에 이르는 점을 볼 때, 자기 조합원들로부터도 유의미한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김호규 금속노조 위원장은 “진보정당과 협의해 입법 노력을 지속 펼쳐 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금속노조가 공동결정제도를 통해 이루겠다는 산업정책 내용은 노동자들의 감흥과 열정을 끌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금속노조가 앞세우는 전기차 생산·투자 요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후 위기를 해결하려면,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내연기관을 모두 전기화 해야 한다.(전력 생산도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자동차 기업주들은 이 당연한 결론을 반세기 동안 외면해 왔다. 최근 자동차 기업들이 전기차 생산에 뛰어든 것은 어디까지나 이윤 추구가 목적이다. 그래서 전기차로의 ‘전환’은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국제 자동차 시장의 변동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이에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용자들은 산업 경쟁력을 빌미로 인력 감축과 조건 악화를 추진하며 노동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려 한다. 현대·기아차 사측이 전기차 생산을 빌미로 인력 감축과 노동조건 후퇴를 추진하는 이유다.

이런 자본의 논리에 도전하지 않은 채 전기차라는 ‘대안적’ 제품에만 주목하는 것은 그 산업의 경쟁력을 위해 노동자도 협조해야 한다는 압력에 스스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노동 측의 협조라는 문제점은 경영참여의 모범으로 알려진 독일에서도 드러났다.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는 대기업 감독이사회에 노사 양측이 절반씩 참여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러나 사측이 추천하는 의장이 두 표를 행사해 사용자 측의 입장이 관철되는 구조다. 무엇보다 노동 측 대표들은 경영에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번번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일관되게 방어하지 못했다. 그래서 독일의 기업주들은 공동결정제도가 “합의를 통한 구조조정, 고양된 기업 내 평화”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노조 스스로 조건 악화를 받아들이고 투쟁을 자제시키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공동결정제도의 의의를 찾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주의자인 폴카트 모슬러가 지적했듯이, “사회적 동반자 관계가 제도화된 것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위기의 순간, 노동계급이 투쟁에 나설 때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됐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218호 ‘독일식 노사관계 모델: 누구를 위한 성공의 역사인가?’를 보시오.)

따라서 노동조합은 전기차 같은 미래 산업에 투자하라고 사측에 요구하며 협조를 추구할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조건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기후 위기 대응을 말로만 하지 말고, 지구 환경을 위한 저항에도 실제로 노조의 온 힘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그래야 금속노조가 내세운 친환경 구호가 그저 환경단체와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는 립서비스 아니냐는 눈초리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엇나간 좌파적 버전

정의로운 전환 논의의 일각에서는 화석연료 산업의 노동자들이 친환경적인 제품 생산을 위한 ‘대안 계획’을 제시함으로써 정의로운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세계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에 큰 영감을 줬던 ‘루카스 플랜’이 모델로 제시된다.

1970년대 중반에 항공기와 각종 군수품 등을 생산하던 영국의 루카스 에어로스페이스는 정부의 국방비 삭감으로 생산이 축소될 상황에 처하자 수천 명을 정리해고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장 활동가들은 노동당 좌파 지도자였던 토니 벤(당시 산업부 장관)의 조언과 지지를 얻어 ‘대안적 생산 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 사측의 ‘사회적 책임’을 시험대에 올리고 합리적 조처를 설득하려던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수많은 아이디어를 냈다. 태양열 패널, 풍력 터빈 등 150개 이상의 친환경적이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제품 생산을 위한 청사진(루카스 플랜)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전쟁 무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제품을 생산하자는 급진적 전망을 제시하고, 노동자들이 이를 실현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국방비로 지출되던 재정을 복지와 환경을 위해 쓰자는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투쟁 대신 채택된 대체물이었던 탓에, 노동자들이 투쟁을 구축해야 할 과제를 비켜 나가게 했다. 그래서 영국의 사회주의자인 데이브 알버리는 “루카스 플랜이 그 주요 지지자들의 동기와 열망과는 반대로 그들의 주의를 돌리는 구실을 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루카스 플랜이 상당한 주목과 인기를 얻었음에도 경영진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경제 위기 하에서 노동당 정부도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당시 노동당 정부는 임금 억제와 재정지출 삭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결국 루카스 노동자들의 열정적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요즘 한국에서 루카스 플랜을 말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사용자, 지역사회에 유용한 생산 계획을 설득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루카스 플랜은 계급투쟁의 대체물로 제안되는 시도가 특히 경제 불황기에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 준다. 물론, 급진적인 정책/대안은 필요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요구를 성취할 수 없다. 기업주와 정부를 강제할 진정한 동력, 즉 아래로부터 노동계급의 대중 투쟁이 사활적이다.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는 결코 민주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들이 오로지 이윤 논리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 결정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생산수단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결정 과정에서 배제된다. 이윤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생산의 민주적 결정과 실행이 가능해진다.

한편, 일부 급진 좌파는 사회적 대화나 공동결정제도를 비판하면서 좀더 좌파적인 버전의 정의로운 전환을 주장한다. 가령, 변혁당은 에너지 산업에서 발전 공기업의 통합과 민영발전의 “공영화”·국유화를 핵심적인 방안으로 제시한다. 민영화된 공공서비스 부문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것도 옳은 지적이다. 앞서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민간기업이나 시장에 맡기는 방식으로는 필요한 조처를 추진할 수 없다.

그러나 에너지 산업 전체를 국유화한다고 해도 전면적인 탈탄소 전환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국유기업들도 세계 시장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이윤 경쟁의 압력에서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 소유의 전력 회사들이 지금껏 화석연료에 의존해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이 점은 에너지·대중교통·기간산업 등 주요 경제의 대부분을 국유화해 국가 자본주의로 교체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적 축적 압박 때문에 국가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압력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금속노조의 ‘대화와 참여’ 정책이 봉착하게 될 문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상황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좌파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적 성격과 구조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계급을 뛰어넘는 중립적인 기구이기는커녕 노동자들을 착취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에 이해관계가 있다. 이 때문에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데서도 한계에 부딪힌다.

물론, 변혁당의 일부 활동가들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내에서는 기후 위기 해결이 불가능하므로, “체제 변혁적”이고 “국제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국유화를 추진할 주체가 (좌파 정부가 집권한) 자본주의 국가라면 이는 모순이다.

이런 활동가들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한 “전환 로드맵”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일련의 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다 보면, 시장 질서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될 수 있다. 이들이 LNG 발전을 “정의로운 전환의 가교”로 활용하자거나, 영국 노동당 좌파인 제레미 코빈의 에너지 국유화 계획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그런 문제점을 얼핏 보여 준다. 코빈의 제안은 분명 급진적 요소가 있지만, 동시에 신재생에너지 확대에 관해서는 기업 육성 방안을 제시하며 시장과 타협했다.

급진 좌파는 대안적 정책 프로그램이나 경제 모델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짜고 선전하는 데 골몰하기보다 계급 투쟁을 통한 진정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대안 없는 세력이라는 얘기 안 들으려고 전자를 우선한다면, 기껏해야 노동자들에게 불가능한 환상을 심어주거나 최악의 경우 개혁주의자들에게 장단(왼쪽 코러스)이나 맞춰주게 될 수 있다.

기후 위기에 맞서고 일자리도 지키려면

그렇다면, 기후 재앙과 일자리·조건 후퇴를 막고 진정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글의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흔히 많은 사람들은 노동과 환경 문제가 서로 대립되거나 혹은 별개라고 여긴다. 그러나 기후 위기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이 노동계급이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의 위치 상 그들이 나서지 않고서는 기후 위기를 멈추기 어렵다.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한 투쟁과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연결돼야 한다.

지배자들은 기후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도 않으면서 “친환경”을 내세워 노동자들을 공격한다. 노동자들을 위축시키려는 것이다. 지난 5월 말 열린 한 토론회에서 석탄발전소 비정규직 활동가는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분위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노동자들을 일자리 위해 환경을 내팽개치는 환경 파괴자 취급하면서 자신감 있게 고용·조건 방어를 내세우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엔지오 지배적인 환경운동 내에도 일자리 방어를 부차화하는 분위기가 있다.

반대로, 일부 노동조합은 일자리를 지키려면 환경 유해 산업이 유지돼야 한다는 잘못된 입장에 서기도 한다. 2019년 두산중공업 노조가 그런 사례인데, 그들은 일자리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며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지지했다.

이런 양 편향을 피해야 한다. 탈탄소 산업재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할 때, 좌파는 다른 전제조건을 달지 말고 노동자들의 고용·조건 보장을 지지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고용 보장 요구를 ‘반사회적’이라고 비난하며 슬슬 피해선 안 된다. 탈탄소 같은 기후 위기 대응과 노동자들의 고용 보장을 연결해서 투쟁해야 한다.

두산중공업의 사례는 불가피한 게 결코 아니다. 지난해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석유·가스 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노동자들은 녹색 산업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해상 풍력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도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일자리가 생긴다면 그곳으로 일자리를 옮길 생각이 있다고 말한다. 고용을 확실히 보장하고 지금의 임금·조건 등을 보장한다면 말이다.

기후 위기를 멈추는 것은 노동자들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재생에너지 등 녹색 일자리에 쓰일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 진정한 문제는 정부와 사용자들이 탈탄소 경제 전환과 그것을 위한 노동자 지원에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자리와 조건을 지키면서 탈탄소 경제로 전환하자는 요구를 성취하려면 상당한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대중 투쟁을 벌이고 광범한 연대를 구축해 투쟁을 정치화해야 한다. 그런 투쟁으로 정부와 사용자들을 강하게 압박해, 노동자들의 삶을 지키고 기후도 지키는 것이 오늘날 필요한 진정한 기후 정의, 노동 정의일 것이다.

자신감

물론, 오늘날 계급세력 관계와 노동자들의 자신감 수준 등을 고려하면,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날 것처럼 여기는 것은 지나친 낙관일 것이다. 노동자들은 임금·조건 등을 둘러싼 투쟁 속에서 성과를 얻고 투쟁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노동자들이 이런 투쟁에서 성과를 거둔 경험은 기후 위기를 막는 행동에 나서는 데에도 밑거름이 될 수 있다. 1970년대 초 호주의 그린 밴(녹지 개발 반대) 운동의 성공은 본보기가 될 만한 사례다.

당시 건설연맹 뉴사우스웨일즈 지부의 노동자들은 녹지대에 고급 아파트를 짓고 빌딩을 지어 환경을 파괴하려는 기업주들에 맞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투쟁했다. 노동자들은 녹지 개발을 막기 위해 산업적 힘을 발휘했고, 실제로 1971~1974년에 42건의 개발 사업을 막아 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작업장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둔 자신감이 주효했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임금 인상, 산재 수당, 작업 환경 개선을 따냈다. 숙련 건설 노동자들보다 임금 수준이 낮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올리기 위한 비공인 “차액 파업”을 벌여 성과를 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이렇게 쌓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환경을 위한 투쟁에도 나설 수 있었고, 그것은 다시 노동자들에게 자부심을 줬다.

이런 투쟁의 연결이 저절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경제 상황이 좋았던 것은 유리한 요소였다. 그러나 똑같은 경제·정치적 조건에서도 다른 노조 지도자들은 녹지 개발 운동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노조의 상층 지도자들은 그린 밴 운동과 뉴사우스웨일즈 지부를 고립시키고 지도부를 온건파로 교체하려고 강하게 압박했다(이와 결합돼 실제로 나중에 그린 밴 운동이 막을 내렸다).

영국의 사회주의자인 킴 헌터가 지적했듯이, “급진적인 정치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린 밴 운동을 이끈 현장지부 지도부는 1960년대 후반의 정치적 급진화 물결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베트남 전쟁 반대, 여성 차별 반대, 성소수자와 이주민 권리를 위한 투쟁에도 조합원들을 동참시키려고 애쓴 급진 좌파의 일부였다.

노동자들이 환경을 위해 싸운 이 빛나는 경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감을 준다. 일자리와 임금 같은 요구를 위해 싸우며 다져진 투쟁 근육은 탈탄소 전환 같은 더 큰 변화를 위한 투쟁을 쟁취하는 데서도 소중한 자산이 된다. 이런 투쟁의 연결, 상호작용 속에서 노동자들은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체제 변화

모든 것이 이윤 극대화에 종속돼 있는 자본주의에서 이윤 논리에 도전하지 않고는 기후 위기를 해결하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한계에 부딪힌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제 침체 상황에서는 특정 부분에서 성과를 얻어도 지속이 어렵거나 불가피하게 제약을 받게 된다.

진정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하려면, 계급투쟁이 더 전진해야 한다. 자본주의에 맞서는 혁명적 전망이 필요하다. 존 벨라미 포스터가 주장했듯이, “아예 다른 생산 양식을 요구해야 한다.” 노동자 통제 하에 민주적으로 계획된 경제 하에서만 탄소 경제를 완전히 끊어내고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있고, 노동자들의 삶도 지킬 수 있다.

노동계급은 이 같은 체제 변화를 이룰 잠재력이 있다. 자본주의에서 거의 모든 재화와 부를 생산하고 전력·교통·의료·교육 등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은 노동계급 고유의 방식으로 투쟁해 체제를 마비시킬 힘이 있고 생산을 새로운 원리로 재조직할 잠재력이 있다.

노동자들은 기후 저항에서도 핵심적인 구실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 큰 회의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자기 ‘밥그릇’을 우선시하면서 환경 문제를 외면한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노동자들의 처지와 잠재력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적잖은 노동자들도 기후 위기가 파괴적일 만큼 심각하고 시급한 조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기후 위기의 피해자라는 점, 기후 위기 대응의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노동자들은 점점 더 자주 기후 위기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자동으로 기후 저항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조합 투쟁은 정치·경제 영역이 분리되고, 그 투쟁을 경제적 이슈들로만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 활동은 노조 지도자들의 기자회견 참석이나 의회 로비 정도로 여겨진다.

이런 문제는 흔히 노조와 온건 좌파 정당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강화돼 왔다. 그린 밴 운동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잭 먼디는 ‘견고하게 뿌리내린 노동조합 관료체계’가 현장 노동자들이 정치화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지적했다. 지난 몇 년 한국의 경험을 봐도, 노조 지도자들은 기후 시위나 낙태죄 폐지 등 중요한 정치적 운동에 조합원들을 동원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거대했던 박근혜 퇴진 촛불운동에서도 파업과 같은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사용하기를 주저했다. 지금도 노조와 온건 좌파 정당의 지도자들은 기후 위기 해결을 내세우지만, 대중적인 투쟁을 건설하기보다 사회적 대화에 더 관심을 쏟는다.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혁명적이고 계급투쟁적인 정치와 조직의 구실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