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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반발)의 크기와 성격

이 기사는 7월 22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에서 한 필자의 발제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2015년 이후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다시 부흥했다. 그런데 대략 2018년부터 국내 언론은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경향과 현상을 가리켜 ‘백래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백래시’는 사회·정치적 변화로 영향력이나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반격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는 계기나 양상은 다양할 수 있다. 최근의 논란은 이준석 등 우파 정치인 일부가 주도하고 있다.

민주당이 참패한 지난 4월 재·보선 이후 우파 정치인들의 페미니즘 공격이 늘었다. ‘안티 페미니즘’을 내세운 이준석이 6월 11일 국민의힘 대표에 당선했고, 7월 6일 국민의힘 대권 주자인 유승민, 하태경이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냈고 이준석이 지원 사격을 하고 있다.

이준석 등 우파의 부상이 20대 남성의 안티 페미니즘 때문?

어떤 사람들은 20대 남성(또는 청년 남성)이 이준석 등 우파 정치인의 안티 페미니즘에 동조한 덕분에 우파가 부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20대 남성의 소수가 반페미니즘 정서를 드러내지만, 그들의 다수가 반페미니즘 성향인 것은 아니다. 더 일반적으로 그들의 의식을 하나로 싸잡아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준석이 국민의힘 대표로 당선된 게 그의 안티 페미니즘 덕분인 것도 아니다. 이준석의 당선은 내년 대선에서 승리해 보겠다는 국민의힘 핵심 지지층의 집권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60~70대 꼰대 남성’ 이미지가 강한 기존 우파 정치인으로는 한계가 크기 때문에 새 간판을 단 것이지, 우파의 지지층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 연대〉는 당시 이런 분석을 담은 기사를 냈는데, 그 뒤 이를 뒷받침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6월 22일 고려대불평등과민주주의연구센터와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조사 결과(자료 1)를 보면, 이준석의 대표 당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는 60대가 68퍼센트로 가장 많았다. 20대는 43퍼센트로 가장 낮았다.

자료 1 고려대불평등과민주주의연구센터와 한국리서치의 여론조사 결과

젠더 이슈는 이준석의 대표 당선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 탄핵은 정당했다”는 대구 연설이 당선의 1등 공신으로 꼽혔다.

익히 알려졌듯이, 청년층의 불만 1순위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다. 물론 부동산 문제뿐 아니라, 실업과 빈곤 등 경제적 곤란에 대한 청년층의 불만이 높다.

청년층의 보수화가 이준석 등 우파의 부상을 낳은 게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배신에 대한 청년들의 환멸이 최근 우파의 반사이익이 됐던 것이다.

이준석 등 우파 정치인들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에 환멸을 느낀 청년층을 끌어들이고자 안티 페미니즘을 선거 쟁점으로 이용하고 있다.

여가부 폐지 공약: 성평등 정책에 대한 공격과 성별 이간질

국민의힘 대권 주자들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리고 성평등 정책을 공격하며 대중을 성별로 이간질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 여성이 더는 차별받지 않으므로 여가부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여성 차별이 갖가지 형태로 온존한다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큰 성별 임금격차, 여성에게 편중된 가사와 돌봄 부담, 대중 매체에 만연한 성 상품화와 여성 비하 등등.

많은 여성에게 여가부의 활동에 대한 체감도가 크지는 않다. 여가부의 예산과 인력은 매우 적고, 활동이 주로 가족 업무에 맞춰져 있다(자료 2). 여가부가 ‘국가의 성평등을 총괄하며 집행하는 부서’라지만 한계가 큰 것이다.

자료 2 여성가족부 예산 규모와 내역

그럼에도 여가부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열악한 처지의 여성을 지원하는 데 더 낫다는 점은 명백하다. 여가부 예산의 대부분(65퍼센트)이 한부모 가족의 양육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 밖에 위기·학교 밖 청소년,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경력 단절 여성 등을 지원한다. 여가부를 폐지하면 가뜩이나 부족한 성평등 정책이 더 후퇴할 것이다.

한국의 성별 격차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봐도 매우 크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여성들의 고통은 더 커졌다. 노동계급 등 서민층의 여성은 가정 내 돌봄 부담 증가와 실업과 일자리 불안정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여가부 폐지 같은 퇴행이 아니라, 더 많은 여성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성평등 정책은 오히려 강화돼야 한다. 여가부의 복지 예산이 늘어야 할 뿐 아니라, 낙태권이 보장되고, 공공돌봄서비스와 양질의 일자리 등이 대폭 확충돼야 한다.

최근 페미니즘 백래시의 크기와 진정한 원인

많은 여성이 이준석 등 우파 정치인의 페미니즘 공격에 분노한다. 이들의 역겨운 주장에 분노하고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페미니즘 백래시의 수준을 너무 크게 보면 현재의 세력균형을 오판할 위험이 있다.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현 상황을 미국의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1991년에 발표한 베스트셀러 《백래시》[2017년 국내의 아르테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에서 묘사한 상황과 유사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팔루디는 그 책에서 1980년대에 우파 대통령 레이건이 등장하면서 정치, 미디어, 대중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이 벌어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우파 정치인이 모두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에 나서는 상황도 아니다.

여가부 폐지 공약은 국민의힘 안에서도 반대가 여럿 나왔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우파 언론들도 이 공약에 비판적인 보도를 했다. 〈조선일보〉는 선거에서 여성 투표율이 남성보다 더 높다며, 당 대표인 이준석이 성평등 정책을 계속 공격하는 것을 우려한다.

이것은 성평등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중의 다수가 아님을 반영한다. 수십 년간 우리나라에서 대중의 성평등 의식은 대체로 진보해 왔다.

최근 일어나는 페미니즘 백래시는, 앞서 지적했듯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배신에 대한 대중의 환멸 때문에 우파가 반사이익을 얻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물론 페미니즘의 일부 과도함이 한몫한 측면이 있다. 이제 이 점을 살펴보겠다.

백래시 논란을 계기로 돌아본 페미니즘 운동의 일부 과도함

우파 정치인들의 페미니즘 비판은 역겨운 위선이다. 그들은 평범한 여성의 처지는 물론, 평범한 청년 남성의 고통에도 별 관심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백래시 논란을 계기로 페미니즘 운동의 일부 지나친 면들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우파 정치인들이 문재인 정부의 배신과 함께, 페미니즘의 일부 ‘오버’하기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성평등 사상과 운동을 뜻하는데, 이런 광의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매우 많다. 다수 남성도 사회가 좋게 개혁되기를 바라며 그 일환으로서 여성 차별도 없어지거나 크게 완화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하나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늘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페미니즘이 대중화하면서 페미니즘의 종류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다.

한국의 페미니즘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1960~80년대 미국식 ‘제2물결’과 유사한 페미니즘인데, 이런 페미니즘의 급진파가 종종 드러내는 극단적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급진 페미니즘의 급진성은 사회를 여성 대 남성의 대립 구도로 이해하며 남성 일반을 지배자, 권력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성차별을 주도하고 이로부터 수혜를 입는 권력자와 평범한 남성을 구별하지 않고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그리고 성차별적 말과 단순히 편견을 드러내는 말을 구별하지 않고 모조리 ‘여성혐오’로 몰며 단죄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심지어 성차별적 함의가 없는데도 성별 이분법적인 자신들의 주장에 도전하는 견해다 싶으면 성차별주의로 취급하며 규탄하기도 한다.

이런 도덕주의는 여성 차별을 지지하지 않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 검열적 태도 때문에 종종 반발을 낳았다. 이준석 등 우파는 이런 반감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차별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청년층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보면,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는 낮아도 성평등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높다.

남성 일반을 단일한 이해관계를 지닌 권력자로 보는 것은 제대로 된 분석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극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된 계급사회다. 남성 사이에 계급에 따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여성 사이도 마찬가지다.

지배계급은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노동계급을 쥐어짜려 들기 때문에 착취 조건을 놓고 노동계급과 일상적으로 충돌한다. 그래서 남성이 다 연대해 여성을 지배한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 오히려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지배자들은 온갖 논리로 이를 정당화하며 차별을 부추긴다.

급진 페미니즘은 사람들의 관념을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과 분리시켜,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취급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사람들의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여성 차별을 어떻게 끝장낼 수 있는지 그 답도 찾을 수 없다.

대중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바람은 이해하지만, 개개 남성들의 관념을 비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필요한 반감을 키울 뿐, 진정한 적 — 자본주의 — 에 맞서 단결을 이루지 못한다.

정체성 정치의 약점

급진 페미니즘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는 동일하지 않다. 여성차별 반대 운동의 상층 지도자들은 중간계급 지향적으로, 대개 민주당과 정치적으로 연계돼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이다. 급진 페미니즘의 기층 지지자들은 이들보다 더 급진적이고 정치적으로 더 왼쪽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성운동에서 정체성 정치가 상식처럼 수용되면서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둘러싼 차이, 운동 내의 전략 차이가 쉽게 가려진다.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집단이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에 기초해 싸우는 운동의 전략이나 조직 방식을 뜻한다.

여성이 차별받기에 정체성 정치가 많은 여성에게 호소력이 있지만, 정체성 정치가 차별을 끝장내는 효과적인 수단은 아니다. 정체성에 호소해 때로 저항을 조직하기도 하지만, 정체성에 대한 강조는 도덕주의를 강화해 운동을 분열시키기 쉽다.

특정한 차별을 직접 겪는 사람만이 그 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여기며 운동의 참가 자격을 따지고, 운동 내에서 적을 찾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을 더 크고 강력하게 건설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는다.

정체성에 대한 강조는 ‘여성끼리의 동일성, 남성과 준별되는 차이성’에 집착하는 경향 때문에 여성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를 흐린다.

그러나 여성 차별이 계급을 가로질러 일어나지만, 계급에 따라 여성 차별의 정도와 양태는 차이가 크다. 서민층 여성과 달리 부유층 여성은 여성 차별을 완화시킬 자원과 권력이 있다.

급진 페미니즘 측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를 ‘남성 권력’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남성 일반의 공통된 이해관계라는 게 없다. 자본주의 국가는 계급 중립적인 기관이 아니라 남녀 자본가 계급과 이윤 체제를 수호하는 구실을 한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하에서 여성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이 장관이 되고 정부와 집권당에서 힘 있는 지위에 올랐지만, 서민층 여성의 삶이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다. 바로 국가의 이런 본질 때문이다.

이준석과 하태경 등 우파 정치인들은 문재인 정부에 참여한 여성운동 지도자들의 개량주의적 무기력도 페미니즘 공격에 활용한다.

국가를 활용해 위로부터 성평등을 이루려는 전략은 여성운동의 기반을 더 협소하고 온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일부 중간계급 여성의 지위 향상에 그치지 않고 평범한 대다수 여성의 삶을 크게 개선하려면, 여성운동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대거 동참하는 대중운동이 돼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대중의 의식도 크게 변하고, 진정으로 여성해방을 성취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백래시와 여성 차별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문재인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고, 문재인 정부 들어 더 많은 여성단체 지도자들이 국가 기구로 진출했다. 하지만 성평등의 진전은 미약했다. 높은 성별 임금격차,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 위주 고용 정책 등 박근혜 정부 때와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여성 대중의 염원이던 낙태죄는 폐지하지 않고 유지하려고 했고, 낙태죄의 법적 효력 정지 뒤에도 여전히 낙태를 법적 권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 퇴진 이후 한동안 꾀죄죄하던 우파가 최근에 부상한 것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배신 때문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강조했다.

따라서 우파의 공세에 맞서며 성평등을 진전시키려면, 여성운동 측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개혁 배신을 날카롭게 규탄하고, 기층에서 대중 투쟁을 건설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특히, 노동계급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 함께 싸우도록 애써야 한다.

평등을 위한 여성의 투쟁과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은 별개가 아니다. 낙태권, 공공보육, 양질의 일자리, 복지 등을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 전체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장기 불황기에는 지배자들이 대중의 삶을 개선하는 실질적인 개혁을 쉽게 양보하지 않는다. 심지어 전에 양보한 조처조차 거둬가려 한다.

성평등을 더 전진시키려면 광범한 대중 투쟁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을 도모하며 이런 투쟁 건설을 돕는 계급적 정치가 매우 중요하다.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청중 질문에 대한 답변

먼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경쟁이 강화되면, 그것에 대한 위기감이 왜곡된 방식으로 일부 남성에게 나타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물론 경제 불황이 심각해지고 일자리 경쟁이 강화되면 그런 보수적인 반응이 나타날 수 있죠. 그러나 지금 경제 불황 상황이라고 해서 여성들이 직장에 더 많이 나가고 성평등을 요구하는 것을 반대하는 정서가 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평등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전체적으로 늘었고, 20대 청년 남성의 성평등 의식은 20대 여성(성평등 의식이 가장 높다)과 큰 차이가 없다는 연구가 지난해 발표된 바 있습니다.

남성이 경제 불황 상황에서 자동으로 여성에게 반발한다기보다, 일자리 경쟁과 실업 같은 고통이 있을 때 우파 정치 세력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고리입니다. 불황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평등을 위해서 더 싸우자는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죠.

1980년대 초 미국에서는 불황이 굉장히 심각해서 남성이 집중된 일자리가 문을 많이 닫았어요. 실업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레이건 등 우파가 집권해서 보수적인 가족 가치관을 강조하며 1960~1970년대 여성·성소수자 운동이 이런 위기를 낳았다고 공격했습니다. 이런 공세에 위축된 일부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특히, 노동자 투쟁의 잇단 패배로 대안이 잘 보이지 않았던 상황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층에서 단결된 투쟁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한국의 여성운동에서 정체성 정치가 상식처럼 수용된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정체성 정치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미국에서 처음 유행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운동에서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정체성 정치의 부상은 특정 상황의 산물입니다. 미국은 1960년대에 급진적인 운동이 많이 있었는데요(반전 운동, 흑인 민권 운동, 여성해방운동). 여성운동은 초기에는 여성 해방을 사회 전체 변혁의 일부로 여기는 좌파적인 입장이 우세했지만, 좌파가 취약해지고 노동계급의 투쟁이 침체된 1980년대에는 이런 견해가 쇠퇴하는 가운데 정체성 정치가 급부상했습니다.

당시 운동을 주도한 리더들의 중간계급 지향적 전략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상층부에 진출하는 것을 통해 성평등을 크게 성취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때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게 진입 장벽을 뚫고 사회 상층부로 들어가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이런 과정은 자본주의 국가가 부추긴 것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부의 급진적인 운동들을 길들이기 위해 운동의 일부 리더들을 체제 내로 흡수하고 운동 단체들에 보조금을 줬습니다. 국가가 여성·성소수자·흑인 운동 단체들에 각각 보조금을 주며 일정하게 제도화하다 보니, 국가기구를 통해 평등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개혁주의 전략을 택한 사람들은 특수한 정체성을 강조하고 다른 정체성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노선을 발전시킵니다.

물론 운동의 전통, 특히 혁명적 좌파와 노동운동의 힘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런 양상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요.

처음에 영국은 미국보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훨씬 컸기에 1960년대 후반~1970년대에 미국과 달리 ‘사회주의 페미니즘’(노동조합 및 노동당과의 연계를 강조하는)이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중엽에 중요한 광원 파업이 대처 정부에 의해 분쇄되고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영국 노동운동은 침체기를 겪습니다. 이런 상황이 중요하게 영향을 끼쳐서 여성운동에서도 배타적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론들이 많아지고, 중간계급 지향성을 가진 급진 페미니즘이 우세해지는 현상이 생깁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1980년대 혁명적 투쟁의 물결 속에서 등장했을 때는 좌파성을 강조하고 사회 변혁 운동의 일부로 자신을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하면서 개혁주의 전략을 취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더 일반적인 당시 좌파의 혼란이 정체성 정치가 번성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오늘날은 정치적 경험이 적은 젊은 여성들이 차별에 대한 즉각적인 분노로 정체성 정치를 쉽게 받아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까 청중 발언에서 할당제 얘기가 있었는데요.

이준석이 여성 할당제를 공격했을 때 핵심 타깃은 고위직 여성 할당제였습니다. 문재인이 집권 초 내각에 여성을 30퍼센트 뽑은 것을 두고 이준석은 “무능력한 여성을 뽑아서 민생이 파탄났다”고 말했죠.

우선, 이것은 성차별적인 발언입니다. 무능력한 것으로 따지면 왜 유독 문재인 정부의 장관들만 그렇겠습니까? 고위직에 여성들이 별로 있지도 않기에 이런 식의 공격은 황당할뿐더러,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얄밉게도 이준석이 문재인 식 페미니즘의 모순을 이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준석은 ‘여성들이 더 많이 장관이 됐는데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냐’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협력해 온 여성운동 리더들의 무기력을 이렇게 이용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파적인 할당제 공격은 비판해야겠지만, 진정한 개혁을 성취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국가를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층에서 대중 투쟁을 건설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없앨 수 있는 남녀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