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토니 클리프의 1963년 글 ‘빗나간 연속혁명’ 중 쿠바 혁명에 관한 부분이다.

‘빗나간 연속혁명’은 영국의 혁명적 좌파 계간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12(1963년 봄)에 처음 실린 글로, 레온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재고한 것이다. 연속혁명론은 1905년 러시아 혁명 와중에 트로츠키 자신이 행한 관찰과 경험의 결실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공헌”으로 꼽힌다.

이 글은 《국제주의 전통 자료집 Ⅰ-3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와 그 고전적 전통》(책갈피)에 실려 있다. 편집을 하고, 설명 주를 제외한 각주도 모두 생략해 재게재한다. 재게재를 허락해 준 책갈피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1959년 1월 8일 아바나에 입성한 피델 카스트로와 게릴라 투사들

피델 카스트로의 권력 장악은 노동계급도 농민도 중요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전체 투쟁의 장을 장악했던 경우였다. 쿠바 지도자들의 독백을 대체로 충실히 옮긴 C 라이트 밀스의 저작 《들어라 양키들아》(아침, 1988)는 애초에 쿠바 혁명이 무엇이 아니었는지를 다룬다.

혁명 자체는 임금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 싸움이 아니었다. … 우리 혁명은 도시의 노동조합이나 임금 노동자들, 또는 노동당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혁명이 아니었다. … 도시 임금 노동자들은 어떤 식으로도 혁명에 의식적이지 않았다. 이들의 노동조합들은 더 많은 임금과 보다 나은 작업 조건들을 얻어내려 애쓰는 당신네 북미의 노동조합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들 노동조합들이 움직인 동력은 그게 다였다. 개중에는 당신네 노조들 몇몇보다 더 부패한 노조도 있었다.

카스트로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폴 바란은 쿠바 지도자들과 대담한 후, 쿠바 혁명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부차적인 구실을 한 것에 관해 이렇게 썼다.

혁명 내내 산업 노동계급 부분은 전반적으로 수동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쿠바 프롤레타리아의 “귀족적” 부위를 이루고 있고 — 쿠바 안팎의 — 독점 기업들의 이윤을 나눠 먹는 이 노동자들은, 라틴아메리카 수준에서 보면 보수가 좋고, 일반 쿠바 대중보다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꽤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이 미국식 실리주의에 지배되고 있었고, 공갈협박과 조직폭력배 같은 행태에 찌들어 있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들이 무관심했기 때문에, 당시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에 대항하는 봉기가 시작된 지 16개월 뒤이자 바티스타가 몰락하기 8개월 전인 1958년 4월 9일에 있었던 카스트로의 총파업 호소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노동자들은 냉담했고 공산당은 파업을 사보타주했다.(공산당은 나중에야 비로소 카스트로 편으로 돌아섰다.1)

카스트로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농민이 한 구실에 대한 평은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밀스는 봉기 와중에 이렇게 썼다.

농민은 중요한 구실을 했다. 농민들은 젊은 지식인들과 함께 봉기를 승리로 이끈 반란군이 됐다. 지식인과 농민들이 핵심 부위였다. … 반란군은 젊은 지식인들이 이끄는 농민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 농민들은 누구인가? “1년 중 대부분 실업 상태인 이 사람들은 … 사실상 농업 부문에 종사하는 임금 노동자들이다.”(밀스) 바란도 이렇게 썼다. “혁명을 일으킨 계급은 농촌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농업 부문의 임금 노동자들이지 영세 자영농이 아니었으며, “소규모 자영농이라는 프티부르주아 계층이 살지 않는 쿠바의 농촌은 … 결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산실’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서술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됐다. 첫째, 카스트로의 군대에 농민은 거의 없었다. 1958년 4월 말경 카스트로 휘하 무장 군인은 도합 180명에 불과했고, 바티스타가 몰락했던 시점에도 고작 803명으로 늘어났을 뿐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지식인들이었다. 실제로 카스트로 휘하에 들어갔던 농민들도, 밀스나 바란이 말한 것처럼 집산주의의 영감을 받은 농업 부문 임금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카스트로의 부대에 들어온 농민들에 대해 체 게바라가 한 증언을 보자.

우리의 최초 농민 게릴라군을 이루었던 군인들은, 토지 소유에 적극적으로 애착을 보이는 사회 계급 소속이었다. 그들의 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프티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이다.

카스트로 운동은 중간계급 운동이었던 것이다. 1956년 12월 멕시코에서 쿠바로 쳐들어온 카스트로 휘하의 82명, 시에라 마에스트라 전투에서 살아남은 12명이 모두 중간계급 소속이었다. [시어도어 드레이퍼는 이렇게 썼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것은 주로 중간계급으로 이뤄진 도시 저항 운동이었다. 그럼에도 이 운동은 신랄한 정치적 폭로를 하고 예리한 심리전을 수행해 바티스타의 전투 부대를 약화시켰다.”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체 게바라는 산업 노동계급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사회주의 혁명들의 핵심 요소가 되기에는 허약하고 무능하다고 주장한다.

농민들이 군대를 이뤄 그들 자신의 위대한 목적, 무엇보다 토지의 공평한 분배를 쟁취하기 위해 농촌에서부터 도시를 점령하려 몰려올 것이다. … 이 군대는 권력 쟁취를 위한 주관적 조건들이 무르익은 농촌에서 만들어져, 도시를 외부로부터 정복하기 위해 전진한다.

게바라는 산업의 발전을 사회주의 혁명의 장애물로 묘사한다.

거대한 중심지에 인구가 밀집해 있고, 효율적 공업화 수준은 아니라 해도 경공업과 중소 규모의 공업이 비교적 발전한 나라에서 게릴라 부대를 준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도시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이 게릴라 투쟁을 방해한다. … 도시 측이 대단히 우세한 나라에서조차, 투쟁의 핵심적인 정치적 구심은 농촌에서 발전할 수 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구실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체 게바라는 농민 게릴라들이 “마르크스주의라는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게바라는 사회주의 혁명이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역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핵심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애초에 카스트로의 강령은 중간계급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광범한 자유주의적 개혁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1958년 2월 미국의 월간 잡지 《코로네트》에 실린 한 글에서 카스트로는 외국인 투자를 몰수하거나 국유화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국유화라는 것이 기껏해야 성가신 수단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됐다. 국유화는 국가를 더 강력하게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반면 국유화는 민간 기업을 약화시킨다. 훨씬 중요한 것은, 전면적 국유화를 시도하면, 가능한 한 빨리 산업화를 달성한다는 우리 경제 강령의 핵심 목표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 목표를 위해서, 외국인 투자는 쿠바에서 항상 환영받을 것이고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다.

1958년 5월 게바라는 자신의 전기 작가 듀보이스에게 이렇게 확언했다.

7·26 운동은 산업의 사회화나 국유화에 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그런 것들은 우리 혁명에 대한 어리석은 두려움에 불과하다. 우리는 투쟁 첫 날부터 1940년 헌법의 온전한 시행을 위해 투쟁한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 헌법은 생산에서 일정한 구실을 하는 모든 인자들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이들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이 헌법에는 다른 많은 경제적·시민적·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기업 활동과 자본 투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규정들도 있다.

1959년 5월 2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미주기구 경제위원회 회의에서 카스트로는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민간 투자에 반대하지 않는다. … 민간 투자자들의 유용성·경험·열정을 신뢰한다. … 외국인 투자 기업들도 국내 기업들과 똑같이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고 똑같은 권리를 누릴 것이다.”

서로 싸우는 사회 계급들인 노동자와 자본가, 농민과 지주의 무능함과, 역사적으로 타고난 중간계급의 허약함, 일체의 집단적·조직적 이해관계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카스트로 휘하의 새로운 엘리트층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 이런 것들이 카스트로가 민간 기업에 기반한 1953~1958년의 온건한 강령을 버리고 이를 국가 소유 및 계획 경제라는 급진적 정책으로 대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음을 설명해 준다. 1961년 4월 16일에야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적이었다고 선언했다. 쿠바 대통령 오스발도 도르티코스 토라도 박사도 이렇게 말했다. “자신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갈채를 보냈던 바로 그 일이 사회주의 혁명이었음을 … 사람들은 어느 화창한 날 … 발견하거나 확인했다.” 대중을 역사의 의식적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삼는 보나파르트주의적 조작에 대한 훌륭한 진술이 아닐 수 없다!

신생국의 지식인

혁명 운동에서 지식인의 중요성은, 그들을 배출한 사회의 전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후진성에 정비례한다. 이는 러시아 민중주의 운동(나로디즘)이 사회의 가장 후진적 부문인 농민이 혁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비판적 사고”의 대가인 지식인 계층을 가장 소중히 여긴 데서도 드러난다.

러시아의 혁명 운동은 지식인들이 주축이었다. 민중주의 지식인들은 농민의 대의를 위해 활동했고,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노동자의 대의를 위해 활동했다. 하지만 둘은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를 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노동자 운동은 조직돼 있었기 ─ 적어도 투쟁이 고양될 때는 그랬다 ─ 때문에, 지식인들은 노동자 집단에 책임을 져야 했고, 그 노동자 집단의 견제를 받았다. 지식인들은 대중에서 나왔어도 대중과 스스로를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음에도 말이다.

반면 민중주의 지식인들의 세계에는 제약이 비교적 적었다. 그래서 엘리트주의·독단·동요·분열로 나아가는 경향을 분명하고 훨씬 더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당시에 레닌이 말했던 것처럼, “개인주의적이고 규율과 조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바로 그 점이 지식인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계층으로 구분짓는 특성임을 감히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신생 국가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제정 러시아 시대보다 훨씬 더 응집력 있는 세력임이 드러났다. 아주 당연하다. 부르주아지의 사유재산은 보잘것없고, 제국주의의 멍에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다. 그런데 국가자본주의는 (제국주의의 약화, 국가 계획의 중요성 증대, 소련의 사례와 각국 공산당들의 조직적이고 규율 있는 활동으로) 그런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응집력을 부여한다. 특정 직업에 얽매이지 않은 유일한 사회 집단인 지식인들은 상충하는 계층·계급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익”을 대변하는 듯한 “직업 혁명가 엘리트”를 배출하는 원천이다. 게다가 지식인들은 민족 문화에 가장 깊이 동화된 사회 집단으로, 농민과 노동자는 여가를 즐길 여유도 이를 위한 교육도 받지 못한 계층인 것과 다르다.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의 후진성에 민감하기도 하다. 20세기의 과학기술 세계를 접한 이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의 후진성에 숨막혀 한다. 이런 정서는 그런 나라들에 만연한 “지식인 실업” 때문에 더 강해진다. 전반적인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대다수 학생들에게는 공무원 일자리가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마저도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2

지식인들의 정신적 삶도 혼란에 빠져 있다. 전통적 양식이 붕괴되고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와중에 이들은 불안하고, 뿌리가 없고, 확고한 가치관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기존의 문화가 와해되는 것 때문에 지식인들은 새로운 통합을 열망한다. 그런 통합은 사회적·정신적 공허를 채우는 총체적이고 역동적인 것이며, 종교적 열정과 전투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가 정치적 자유를 얻기 전에는 이중의 압력, 즉 다수 대중보다는 특권을 누리지만 외국 지배자들에게는 종속적이라는 압력에 노출돼 있다. 이 때문에 지식인들은 민족해방 운동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면서 망설임과 동요를 그토록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격변을 겪으며 지식인들은 새로운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데, “우매한” 대중에 “빚”을 졌다는 가책, 대중과 구분돼 있다는 유리감, 대중에 대한 우월감 등이 그것이다. 지식인들은 대중에 동화되지 않고 구분되고 대중의 위에 군림하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민족을 통합하고 탄탄대로로 인도하는 동시에 스스로에게 권력을 부여할 역동적인 운동을 추구한다.

지식인들은 사회공학적 효율성을 비롯한 효율성을 대단히 신봉한다. 그들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바라며, 감사해 하는 대중에게 새로운 세상을 건네주고 싶어 한다. 자의식적이고 자의에 따라 단결한 대중이 해방 투쟁을 벌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를 정체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많지만 민주주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지식인들은 산업화, 자본 축적, 민족 중흥을 위한 열망을 구현한다. 이들이 권력을 갖는 상황은 다른 계급들이 허약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것과 직결돼 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일당 독재적 국가자본주의가 지식인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목표다. 실로 지식인들은 신생국들에서 공산주의 기치를 치켜드는 주요 집단이다. 어떤 라틴아메리카 전문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공산주의는 학생·중간계급에서 인기가 가장 많다”고 썼다. 인도 암리차르에서 1958년 3~4월에 열린 공산당 당대회에 참가한 “대의원 중 약 67퍼센트가 프롤레타리아·농민 이외의 계급인 중간계급, 지주, ‘소상인’ 등이었다. 72퍼센트는 모종의 대학 교육을 받았다.” (1943년에는 전체 당원 중 16퍼센트가 전일제 상근 당직자였다고 한다.)

신생국 노동계급의 새로운 과제

주체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없을 경우에는,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이끌 요인들이 사회주의와 정반대인 국가자본주의를 낳을 수 있다. 국제 노동운동은 다소 미묘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먼저, 신생국의 노동자들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혁명을 연속적으로 만들지 못했지만, 즉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적 궤도 위에 올리거나 민족적 투쟁을 사회적 투쟁과 결합시키지는 못했지만, 이제 그들 “자신의” 지배계급에 대항해 투쟁해야 할 것이다.(네루는 영국 총독 못지않게 파업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감옥에 가뒀다.) 새로운 국가 체제 하에서는 노동자들의 수도 늘어나고, 장기적으로는 응집력과 특수한 사회적 비중도 키우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선진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전략적 변화가 있다. 즉, 식민 지배를 받는 대중이 받는 민족 억압 일체에 무조건 반대하면서도,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미래에 지배계급이 될 계층이 하는 민족 정체성 운운하기를 멈추고, 그런 나라들의 계급 투쟁과 사회 구조를 조사해야 한다.

“계급 대(對) 계급[의 투쟁]”이라는 구호는 점점 현실이 될 것이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의 요체는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 그 요체는 이렇다. 프롤레타리아는 전 세계에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혁명적 투쟁을 계속해야 하고,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3


  1. 쿠바의 공산당인 인민사회당(PSP)의 과거는 치욕적이다. PSP는 1939~1946년 바티스타의 통치를 지지했다. 바티스타 1기 내각 장관 두 명, 후안 마리네요와 카를로스 라파엘 로드리게스가 PSP 소속이었다. 1944년 공산당 기관지 〈오늘(Hoy)〉은 바티스타를 “대중의 우상, 우리 국정의 위대한 인물, 새로운 쿠바의 신성한 방침을 구현하는 인물”이라고 평했고, 카스트로에게는 프티부르주아 모험가라는 딱지를 붙였다. PSP는 위에서 언급한 1958년 4월 파업에 협력하지 않았다. 1958년 6월 28일에야 PSP는 바티스타를 퇴진시키기 위한 “깨끗한 민주 선거”를 소심하게 옹호했다.

  2. 따라서, 예컨대 인도의 한 조사 결과를 보면, 1949~1953년에 러크나우대학교에서 인문·과학·경상·법학 석사학위를 받은 학생 중 약 25퍼센트는 1957년까지도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인문대학 학생 약 47퍼센트, 과학대학 학생 51.4퍼센트, 상업대학 학생 7퍼센트, 교육대학 학생 85.7퍼센트가 공무원이 되는 데 필요한 필수요건을 충족하려 대학에 입학했다고 밝혔다. 학위 소지자 약 51퍼센트는 대학 교육이 “시간낭비”라고 결론내렸다.

  3. 이 글은 지면 제약 때문에 후진국에서 연속혁명론이 유효한지에 초점을 맞췄고, 선진국에 연속혁명론을 적용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 그 두 번째 요소, 즉 식민지에서의 혁명이 고도로 도시화된 선진국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부분은 애초(1906년)에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의 일부가 아니었고 나중에 접목된 것이다. 이에 관한 고찰은 마이클 키드런, ‘Imperialism, Highest Stage But One’,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9(1962년 여름,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2:61, 1973년 6월호에 재수록됨)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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