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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유가족의 소송 제기는 권리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유가족이 〈한겨레〉 신문 기자를 ‘허위사실에 의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사건의 실체가 조사돼 확인된 바 없는데도 그 기자는 ‘박 전 시장이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기정사실화하는 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유가족은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을 사실로 인정한 국가인권위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도 제기했다.

우파 정당 국민의힘의 국회의원 윤희숙은 “2차가해”라며 유가족의 소송 제기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2차가해” 공세는 위선이다. 실체적 진실이나 여성 평등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국민의힘과 우파 언론들은 이 사건을 이용해 정적 공격에만 열을 올려 왔다.(관련 기사: ‘박원순 미투 논란에서 진정 돌아봐야 할 점들’, 〈노동자 연대〉 352호 참조.)

그런데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도 “유족의 슬픔은 이해한다”면서도 “이 소송 자체가 2차가해가 될 것”이라며 소송을 반대했다.

그러나 강 대표의 반대가 성폭력 피해호소 여성을 위한다는 선의의 발로일지는 몰라도, 선의가 정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진실을 가벼이 여기면 나쁜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진실

올해 초 경찰 수사결과 발표 직후 본지가 밝혔듯이, 박원순 성추행 혐의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상황이다. 수사권을 가진 경찰조차 피고소인의 사망으로 증거 확보에 한계가 있었고, 결국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됐다. 따라서 성추행 혐의의 진상에 대해 섣불리 단정하기 어려움을 인정하는 게 불가피하다.

경찰 수사 종결 이후 국가인권위가 일부 ‘성희롱’ 혐의를 인정하긴 했으나, 이조차 피진정인의 사망으로 교차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나온 결과라서 한계가 크다. 인권위 판단의 근거가 된 문자 메시지 등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 전후맥락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더구나 만만찮은 반증도 제기됐다. 박원순 시장 임기 동안 서울시청 출입기자였던 손병관 전 〈오마이뉴스〉 기자는 서울시 비서실 직원 등 무려 50명의 증인을 직접 인터뷰해, 박원순에게 제기된 혐의를 일일이 ‘팩트 체크’했다. 그 결과 혐의 대부분이 근거가 없거나 불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비극의 탄생》, 왕의서재, 352쪽, 2021년)

여러 한계 속에서도 언론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사를 진행해 피해호소인 측 주장에 대해 만만찮은 반증과 가설을 내놓은 것이다.

그만큼 다툼의 여지가 큰 사건이다. 그런데도 일방의 말을 무조건 진실로 단정하는 것은 애먼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만들 위험이 있어 경솔하다.

이런 상황에서 유가족의 소송 제기를 “2차가해”라고 비난하는 것은 진실 추구를 가로막는 재갈 물리기일 뿐이다.

물론 명백한 성범죄 가해자가 처벌을 면하고 피해자나 그 지지자들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보복성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나 이번 소송의 성격은 그와는 다르다(이유는 이하에서 설명).

유가족의 소송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사법부가 언제나 공정하고 진실을 밝혀 낸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번 소송이 평생 성범죄자 가족으로 낙인 찍힐 위기에 처한 유가족의 거의 유일한 수단일 뿐 아니라, 소송 과정에서 제출될 여러 증거와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 토론하는 기회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재갈

게다가 이번 소송은 피해호소 여성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다. 사건을 단정적으로 보도한 유력 일간지의 기자를 상대로 한 것이다. 아직 실체적 진실이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마치 성폭력 ‘사실’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일방의 말을 기정사실화해 보도한 것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는 혐의이다.

성폭력 범죄자라는 낙인이 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줄 엄청난 피해를 생각해 보면, 그 진실 여부를 검증하지 않은 채 경솔하고 무책임하게 보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족 측 법률대리인은 해당 보도의 “성폭력” 용어 사용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피해호소인의 주장만 보더라도, 강간이나 강제추행과 같은 성폭력은 없었고 대개 성희롱 여부가 문제 되는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급진 페미니즘 측에서는 성폭력의 외연을 무한 확장해 ‘성을 매개로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행’ 일체를 ‘성폭력’이라고 칭해 왔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상당한 부작용을 낳았다.

강간이나 강제 성추행 등 여성의 의사에 반한 강압적인 성적 행위를 성폭력으로 여기는 대중의 인식과 괴리돼 소통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성격과 수위와 경중이 엄연히 다른 사건들을 모두 ‘성폭력’으로 뭉뚱그려서 경미한 일을 심각한 일로 부풀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런 과장되고 모호한 언어는 대중의 의식을 개선하기보다 불필요한 갈등을 낳기 쉬웠다. 또, 심각한 성폭력 사건인데도 그에 대해서도 얘기하기 싫고 성가시다는 반응이나 냉소도 부르곤 했다.

주관주의적 “성폭력” 개념(피해자 중심주의)은 진상조사와 사실 확인, 당사자의 소명과 합리적 문제제기 등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과정까지 모두 “2차가해”로 몰았다. 이는 꼭 필요한 논의마저 위축시키거나 봉쇄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종 정치적 경쟁 상대나 이견자를 배척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됐다. 박원순 사건도 우파에 의해 위선적으로 악용돼 왔다.

여성 평등의 진전과 진정한 성인지 감수성 제고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무시하며 필요한 토론을 억누르고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관행은 재고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