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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계급 투쟁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데이비드 하비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아 왔다. 최근 하비는 이윤율이 떨어져도 이윤량은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며 이윤율과 이윤량을 대립시키고 후자를 더 중시하는 관점을 제시해 왔다.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된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의 한 장에도 이와 관련된 논의가 담겨 있다.

다음은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명예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장, 《자본론 행간 읽기》의 저자인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8월 31일에 발표한 논평으로, 이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고 하비의 주장을 비판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현존하는 마르크스주의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하비는 중요한 저서를 남겼을 뿐 아니라,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배경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관한 온라인 강의를 해서 국제적으로 청중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의 후속작으로 두 권짜리 《자본론》 해설서를 쓰기도 했다.

이제 하비는 《그룬트리세》(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로 초점을 옮겼다. 《그룬트리세》는 1857~1858년 최초의 국제 금융 위기가 작열하던 때에 마르크스가 쓴 방대한 경제학 원고다. 마르크스는 이 원고를 출간하지 않았지만, 이를 개정하려는 시도는 1867년 《자본론》 1권의 출간으로 결실을 맺었다. 《자본론》 2, 3권은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다.

《그룬트리세》는 지극히 풍부한 텍스트이며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미처 깊게 다루지 못한 주제들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해 《자본론》 1권을 내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르크스는 당연히 생각을 고치면서 자신의 분석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그룬트리세》를 마치 진정한 마르크스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장으로 여기는 것은 위험하다.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네그리의 주장이 바로 그런 사례다.

그런데 하비도 《그룬트리세》를 다룬 새 책에서 그런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 《뉴 레프트 리뷰》 최신 호에 실린 그의 글 “비율과 양”은 그 책의 맛보기이다. 슬쩍만 봐도 이 글은 현학적인 문제에 몰두하고 있다. 하비는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경제학자들이 절대량을 너무 경시하는 반면 이 절대량이 변하는 비율을 지나치게 중시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니까 중국의 성장률이 상당히 둔화한 것보다도 중국이 세계 2위 경제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비는 더 콕 집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윤율에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이윤량에는 관심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두 개념은 사실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다. 이윤율이란 노동자에게서 뽑아낸 잉여가치량을, 그 잉여가치를 뽑아내기 위해 투자한 자본의 총량에 비교하는 것이다. 잉여가치량은 그냥 잉여가치 그 자체의 절대량이다.

마르크스는 경쟁이 우선적으로 노동 절감형 투자를 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윤율은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경제 법칙으로 자본주의 경제 위기들을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떨어지기 시작해도 이윤량은 계속 증가할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이것은 이윤율 저하가 가하는 타격을 완화할 수 있다. 하비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을 오랫동안 기각해 왔고, 그 법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잉여가치량을 무시한다고 몰아세운다. 필자는 이 문제에서 하비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자본을 “운동하는 가치”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과정이고 그 안에서 자본은 여러 형태를 취한다. 자본은 노동자를 고용해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서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게 하는 생산자본의 형태뿐 아니라 금융 자본이나 유통 자본 등의 형태를 취한다. 하비는 그가 오랫동안 다뤄 온 주제, 예컨대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방법으로서 고정자본이 갖는 중요성의 증대에 관한 내용을 되풀이한다.

하비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마르크스는 여러 가지 모순으로 자본의 개념도를 어질러 놓는다. 그러나 어떤 모순은 다른 모순보다 더 중요하다. 자본을 운동하는 가치로 규정한다면, 이 운동을 추동하고 이끄는 근본적 모순이 자본에 관한 어떤 이론에서든 중요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소외 자본과 소외 노동의 모순은 그런 것으로 적당하지 않다 ⋯ 그러나 ‘운동하는 가치’에 있어서, 감소하는 비율과 증대하는 양 사이의 모순은 근본적이다.”

당황스러운 얘기다. 비율과 양은 자본과 잉여가치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방법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 잉여가치, 더 나아가 모든 “운동하는 가치”는 어디서 생겨나는가? 마르크스는 노동만이 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하비가 《자본론》 1권 해설서에서 잘 보여 줬듯이 이윤은 자본이 임금 노동을 착취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이지 않으면 하비는 가치를 어떻게 설명하려 하는가?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소외 자본과 소외 노동 사이의 모순”은 사용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계급 투쟁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이다. 이를 부차화하면,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개념은 사라져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