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패배로 끝난 ‘테러와의 전쟁’ ⓒ출처 미국 국방부

20년 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재앙이었다.

미국은 이 전쟁이 9·11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실은, 계획적으로 비행기 네 대를 건물에 충돌시킨 이 사건이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공격전을 정당화하는 편리한 명분이 됐다는 것이다.

서방은 미국 본토를 수호하고 전 세계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여러 나라를 침공했다.

부시는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카에다 조직을 비롯해 탈레반과 여타 테러 조직을 분쇄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진정한 테러는 미국이 패권, 이윤, 세계 지배를 위해 2001년부터 지금까지 벌인 일이었다.

이 전쟁은 부시 때 시작돼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지금의 조 바이든으로 이어지는 네 대통령의 임기에 걸쳐 벌어졌다. 각 정부의 대외 정책은 각기 다른 전술로 구현됐지만, 정치적 스펙트럼을 막론하고 정치인들을 단결시켰다.

초기의 침공은 부시의 사악함과 오판에 따른 공격으로 묘사됐지만, 20년 동안 이 전쟁은 미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결속시켰다. 9·11 이후의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라크·리비아·시리아·예멘·소말리아·필리핀에서 최소 59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정확한 민간인 사망자 숫자는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수십만, 수백만을 헤아릴 것이다.

파괴의 규모는 측정 불가능하다. 파괴는 또한 현재 진행형이다. 2018~2020년만 해도 미국은 85개국에서 폭격·지상전 등 군사 작전을 벌였다.

전쟁의 목표는 미국의 경제적 힘이 쇠락하는 때에 미국의 지배력을 세계적으로 뻗치는 것이었다. 중동의 안정과 통제는 이곳 석유에 대한 미국의 이권에도 매우 중요했다.

“항구적 자유 작전”(부시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붙인 이름)은 이 전쟁을 위한 최초의 침공이었다.

2001년 9·11 공격 이전에도 부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빈 라덴을 넘기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하려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시는 그가 찾던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명분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렁에 빠지고 이라크에서 패전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의 처참한 실패로 드러났다.

세계 최강 미군이 거듭 패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개입이 오히려 더 많은 테러를 낳았다. 미국의 전쟁이 낳은 참상은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아이시스) 같은 신생 테러 집단이 성장하는 토양이 됐다. 미국을 향한 증오는 테러 집단들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테러와의 전쟁’에 맞서 전 세계에서 대규모 저항이 벌어지기도 했다. 몇몇 나라에서는 전쟁 반대 운동이 20년 동안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 그들이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에 맞섰다.


시리아 전쟁의 씨앗을 뿌린 이라크 침공

이라크 전쟁은 맹렬한 폭격, 공군·지상군의 진군으로 시작됐다.

조지 부시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을러댔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부시와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자기 목적을 위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부시와 블레어는 조작된 증거를 들이대며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쌓았다.

2003년 3월 21일 미군이 이라크에 첫발을 디뎠다. 4월에는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무너지고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가 미국의 손에 떨어졌다.

2004년에 미국은 종파 간 분열에 따라 구성된 신생 꼭두각시 정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하지만 침공으로 이라크의 사회기반시설은 파괴됐고, 평범한 사람들은 고통으로 내몰렸다.

서방의 점령은 처음부터 저항과 반란에 직면했고, 2006년에는 내전이 발발했다. 2003년 3월에서 2005년 3월 사이 민간인 사망자 2만 4865명 중 37퍼센트가 미국에 의해 사망했다. 그 어느 세력보다도 비중이 크다.

‘테러와의 전쟁’ 때문에, 2008년에 이라크의 인도적 실태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족하고 열악한 물 공급에 의존했다.

2011년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군했지만 고작 3년 후에 다시 돌아왔다. 저항 과정[특히 2011년 아랍 혁명과 그것의 패배 속]에서 부상한 아이시스에 폭격을 퍼붓기 위해서였다. 2017년부터는 수천 병력이 이라크에 남아 있다.

이라크인 약 1100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전쟁 때문에 2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이라크에서 저항이 분쇄된 직접적 결과로서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에서 아이시스가 탄생했다.

‘테러와의 전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서방은 시리아를 적으로 낙인찍었다.

하지만 서방은 고문할 포로들을 시리아로 보냈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2011년 발발한 혁명을 분쇄하려 애쓴 결과, 항쟁은 내전으로 전환됐다. 이 내전 와중에 아이시스는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세를 넓혔다.

영국·미국·프랑스는 반정부 저항군에 자금을 지원했다.

혼돈이 깊어지면서 아이시스와 알카에다가 내전에 끼어들어 저항군, 정부 모두와 싸웠다. 그러자 미국이 폭격을 퍼부었다.

9·11 13년 후인 2014년 9월, 미국은 아이시스를 분쇄하려고 시리아 내전에 끼어들었다.

미국 국방부는 민간인 피해를 피한다는 자신들의 규칙이 시리아에서 가장 느슨하게 적용됐다고 시인했다. 미국 국방부는 실제 민간인 사망자 숫자를 은폐하려고 조작된 수치를 내놓았다.

민간인 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사건 중 하나는 2016년 7월 미군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벌인 폭격이었다. 민간인 56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11명은 아이들이었다.

2017년 3월의 또 다른 폭격에서는 미군이 이슬람 사원을 폭격해 46명이 목숨을 잃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 2018년 6월 폭격 때는 민간이 70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한 대가족에 속한 39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미국이 주도하거나 지원한 폭격 때문에 2021년 4월까지 민간인 8311~1만 3188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자신이 내놓은 집계는 1410명이다.

시리아에서 군사 행동은 계속되고 있다.


중동 전역과 밖으로 번진 ‘테러와의 전쟁’

예멘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혹심한 고통을 겪었다. 2009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의 알카에다 지부들이 조직을 합쳤다.

그래서 2009년 12월 24일 미국은 무인기 폭격을 시작했다. 이것은 예멘 사람들을 상대로 한 미국 자신의 테러였다.

미국의 전투기는 예멘에 있는 알카에다의 훈련 시설을 타격한다며 크루즈미사일을 쐈다.

하지만 이 미사일은 마을에 떨어져 60명 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 28명은 아이들이었다. 뒤이어 미국은 무인기로 일련의 폭격을 벌였다.

2014년 예멘의 후티 반군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던 당시 예멘 대통령 하디의 정부를 타도했다. 2015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을 침공·봉쇄·폭격했다. 이 끔찍한 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예멘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도적 위기에 처해 있다. 예멘인 80퍼센트가 구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5세 미만 어린이 200만 명 이상이 급성영양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침공에 무기를 대고 지원을 제공했다.

미국·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은 2011년에 무아마르 카다피 정부하의 리비아를 공격하기도 했다.

서방은 한때 카다피를 악마화했다가, 그후 카다피와 협상을 체결했다가, 그후 다시 카다피를 공격했다.

정당화

[중동에서 벌인 온갖 개입의] 명분은 ‘테러와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사실 테러와 연관된 정권들로 기울 수도 있는 다른 침공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됐다.

미국의 개입은 위선으로 가득하고, 리비아 사람들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이른바 “국민 보호 책임 원칙”*도 마찬가지다.

리비아를 침공해 카다피를 제거한 후 미군은 리비아를 떠났지만, 2015년에 아이시스를 폭격하러 리비아에 다시 들어갔다.


이라크에서 구금자를 겁박하는 미군 ⓒ출처 PICRYL

야만적 수단을 동원해 공포를 조장한 서방

9·11 공격 저녁, 조지 부시는 당시 백악관 대테러리즘 담당조정관 리처드 클라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 추진에 모든 것을 동원해도 좋다. 앞길을 막을 것은 모조리 치워버렸다. 국제법이 뭐라든 신경 안 쓴다. 혼쭐을 내 주자.”

9월 17일 부시는 억류자를 비밀 수용할 수 있는 권한을 CIA에 부여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억류자라는 표현도 이유가 있어 고른 것이다.

미국은 9·11을 전쟁 행위로 취급하면서도 포로의 처우에 관한 규칙은 아랑곳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CIA 최고 변호사들은 고문의 적법성 여부를 따지고는, “이스라엘의 사례”가 “개인들의 임박하고 상당하며 물리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고문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썼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최초로 잡혀 온 억류자들은 무고한 사람들로, 현상금 때문에 CIA에 팔려 온 사람들이었다.

점령 첫 5년 동안 약 8만 3000명이 미군에 의해 구금됐다. 그중 93퍼센트가 현지 무장 단체에 잡혀서 현상금을 대가로 미국에 넘겨진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이라크로 번지자 또 다른 10만 명이 구금됐다. 이들은 두들겨 맞고, 전기 충격을 당하고, 극한의 추위를 견디고, 팔이 묶인 채 천장에 매달리고, 성적 모욕을 당하고, 머리에 포대가 씌워지고, 수면을 박탈당하고, 백색 소음에 시달리고, 물고문을 당했다.

2002년에 고문 프로그램이 정비되고 “강화된 심문 기술”이 승인됐다.

한 CIA 요원은 수용소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것이 보도 자료다. 그들은 바로 이런 모습을 당신들이 보기를 원한다. 여기가 바로 그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이다.”

자동차 판매상인 칼리드 엘 마스리는 이름이 비슷한 알카에다 용의자로 오인됐다. 마스리는 버스를 타고 세르비아-마케도니아 국경을 넘다가 체포됐다. CIA는 마스리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족쇄를 채워 보잉737기에 태웠다. 비행기는 바그다드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외곽의 솔트 핏 수용소로 갔다. 마스리는 비행기 바닥에 쇠사슬로 묶여 진정제 주사를 맞았다. 마스리는 네 달 동안 고문받다가 풀려났다.

반면 마스리를 비행기에 태우고 간 자들은 팔자 좋게 지냈다. 마스리를 아프가니스탄 수용소에 실어다 준 후 이 비행기는 지중해 서부 휴양지 마요르카섬으로 날아갔다. 이 자들은 고급 호텔에서 이틀을 보냈다.

솔트 핏 수용소는 원래 버려진 벽돌 공장이었다. CIA 요원들은 헤드랜턴을 쓰고 어두운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수갑을 찬 채 들보에 매달린 구금자들의 몸을 훑어봤다. 수용된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 22시간을 그렇게 매달려 있어야 했다. 17일 동안 매달려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2002년 11월 굴 라흐만은 하의가 모두 벗겨지고 손발이 사슬로 묶여 콘크리트 바닥에 고정된 채 사망했다. 라흐만은 얼어 죽었다.

이를 지시한 요원은 “꾸준히 우수한 성과”를 냈다며 포상금 약 2000달러를 받았다. 훗날 라흐만 건은 신원 착오 사건으로 드러났다.

나중에 수용소는 바그람 공군 기지로 이전됐다. 이 수용소는 광대한 고문 시설 네트워크의 중심지가 됐다.

28개 나라에 있는 수용소 최소 50곳이 구금 시설로 이용됐다. 이에 더해 아프가니스탄에 최소 25곳, 이라크에 20곳이 더 있다. 미국은 함정 17척을 구금자를 수용하고 고문하는 해상 수용소로 동원했다.

2001~2006년 영국을 드나든 항공편 약 1622건이 납치 및 고문에 동원됐다.

영국과 미국은 고문 일부를 외주화해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런 외주화로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고문의 책임자임을 부인할 수 있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 각료들도 고문을 승인했을 뿐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했다.

이 시스템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2003년 이라크에서 영국군은 바하 무사를 살해했다. 무사는 몸에 무리를 주는 자세로 며칠 동안 심문을 받고, 수면을 박탈당하고, 소변과 찬물을 번갈아 뒤집어쓰고, 거듭 구타당했다.

미군이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 갇힌 8000명을 학대하는 사진처럼 이 사건도 ‘테러와의 전쟁’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문으로 찌들어 있음을 보여 줬다.

제국주의의 방위력은 사람들을 고문하기 쉬운 곳으로 인도해 고문하는 과정을 점령과 연계시켰다. 군인들이 일단 사람들을 잡아 왔다. 그리고 잔혹한 여과 시스템을 거쳐서, 뭔가를 아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은 다음 단계로 넘겨졌다.

정보 수집 수단으로서 고문은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점령지 주민들에게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었다. 고문 역시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현지 저항과 전 세계의 반발을 키웠다.

무슬림 혐오라는 신종 인종차별을 만들어 낸 전쟁 이데올로기

1991년에 냉전이 종식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자들은 무슬림이 미국의 새로운 적이라는 사상을 꾸며내느라 일찍부터 여념이 없었다.

하버드대학교 교수 새뮤얼 헌팅턴은 저서 《문명의 충돌》의 바탕이 되는 글을 1993년에 냈다. 9·11 공격이 있기 8년 전이다.

그런 사상의 최종적 형태를 담은 글에서 헌팅턴은 이렇게 썼다. “미국에 이상적인 적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적대적이고, 인종적·문화적으로 다르고, 군사적으로는 미국 사회에 실질적 위협을 가할 만큼 강력한 적일 것이다.”

유럽을 가르던 분단선은 “동쪽으로 몇백 마일 밀려났다. 이제 그 선은 서구 기독교 사회 사람들과 … 무슬림 및 정교회 사람들 사이를 가른다.”

헌팅턴이 “충돌”을 말하고 무슬림을 지목한 것은 부시와 블레어가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의 이정표가 됐다.

블레어는 “선한 무슬림” 운운하기도 했다. 여기서 “선하다”는 것은 자신들의 문화를 “현대화”해 서방에 순응시킬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블레어가 대부분 입에 올린 것은 “악한 무슬림”이었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블레어의 전쟁을 반대하고, 블레어의 처방에 자신들의 신앙을 순응시키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부시와 블레어는 이슬람이 특별히 “후진적”이고 현대 세계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데에서 생각이 같았다.

따라서 계몽된 서방의 책무는 자신의 우월한 가치를 전 세계 만방에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필요하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부시는 이를 “신세계 질서”라고 불렀다.

해외에서 무슬림을 표적 삼은 것은 국내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소위 “국내의 적”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일조했다. 서방의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 특히 서방의 전쟁에 반대하는 무슬림들이 이 범주에 포함됐다. 무슬림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시민적 권리 상당수를 박탈당하게 됐다.

2006년 6월 2일 금요일, 경찰 약 250명이 런던 동부 포레스트게이트의 한 주택을 습격했다. 이 집이 “화학 무기 제조장”이라는 제보를 받고 나서였다.

23세 청년 무함마드 압둘 카하르는 동생 압둘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총에 맞았다.

언론은 방사능 물질이 든 폭탄이니 지역사회에 스며든 테러리스트니 하는 경찰이 흘린 정보로 소설을 써댔다.

그후 6월 9일에 이 형제는 불기소 석방됐다.

직무 규정 위반으로 기소된 경찰은 하나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발포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들은 이 사건을 런던 경찰청의 입 발린 사과 정도면 일단락해도 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후에도 경찰이 무고한 무슬림들에 테러 혐의를 씌워 습격하는 일들은 거듭 되풀이됐다. 영국의 무슬림들 사이에서 커진 국가에 대한 불신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이슬람 혐오를 중세의 십자군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 사회의 반복된 특징으로 봤다. 또 다른 사람들은 무슬림 혐오를 일시적인 것으로, 9·11에 대한 기억이 가시면 함께 끝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저술가 아룬 쿤드나니는 이슬람 혐오가 새로운 형태의 “구조적 인종차별”이라고 옳게 지적했다.

쿤드나니는 권력자들이 무슬림에 대한 편견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이제는 이것이 국가와 법률에 깊이 스며들었다고 지적했다.

쿤드나니는 이렇게 썼다. “이것의 중요성은 이것이 만들어 내는 개인들의 편견이 아니라 더 광범한 정치적 결과에 있다.”

이슬람 혐오는 새로운 형태의 인종차별이었고, 사회 상층부에 의해 조장됐다.

예컨대 영국 정부의 “예방” 프로그램은 정치적·종교적 “급진화”를 식별·대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무슬림 청년을 훨씬 많이 겨냥하고 억압한다는 점에서 인종차별의 근원이자, 그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예방” 프로그램은 모든 공공부문 기관 근무자들에게 “급진화” 징후를 발견하면 신고하라는 지침을 내림으로써, 무슬림이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관념을 퍼뜨린다.

이슬람 혐오가 인종차별을 점화하는 역겨운 구실을 했지만, 이에 대한 항의도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전쟁에 반대해 수백만 명이 행진을 벌이고, 수천 명이 포레스트게이트에서 일어난 경찰의 발포를 규탄하며 시위를 벌이는 등, 출신 배경을 막론한 다양한 사람들이 이슬람 혐오를 몰아내려고 투쟁했다.

하지만 무슬림 악마화는, 정치적이어지거나 ‘테러와의 전쟁’에 맞서다가 국가의 표적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퍼뜨렸다.

이 때문에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 일부가 후퇴했다.

국가가 부추긴 두려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지난해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중 다수가 팔레스타인 연대에도 손을 내민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노골적인 무슬림 인종차별의 피해자다.

이슬람 혐오에 맞선 최근의 투쟁은 차별에 맞선 투쟁이 그 자체로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힘이 됨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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