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팀 주] 이 글은 원래 〈격주간 다함께〉 32호(2004.5.29)에 실렸던 글이다.


카우츠키(1854∼1938)가 지도적 이론가였던 제2인터내셔널은 제1차세계대전 개전 시기인 1914년 8월, 소속 정당들이 이전의 반전 결의와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을 취해 자국 정부를 지지하기로 함에 따라 붕괴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그리고 1912년 바젤에서 제2인터내셔널은 국제주의적 입장을 결의안으로 채택했다. 세계 전쟁이 일어나면 제국주의 강대국의 노동자들은 자국 정부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하고, 오히려 전쟁이 초래할 국내적 위기를 이용해 지배계급에 맞서 항쟁을 한다는 것이었다.

카우츠키의 입장 변화는 기회주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전의 국제주의적 입장을 실행한다면 노동자 운동(애국주의가 득세하고 있는)이 분열하게 될까 우려했다. 더구나 사민당의 집권 가능성이 현실적인 것이 돼 있는 판국에 그런 분열은 응집력 있는 여당 구실을 못 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전시에는]평화를 위해 투쟁하라. 전시가 아닌 때 계급투쟁을 하라.”(카우츠키는 “국가 방위”도 동시에 호소했다.)

카우츠키의 입장 변화는 또한 선거 중심주의에 따른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전쟁이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의 길’로부터 노동자들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린다고 봤다. 전쟁이 아니라 국내의 사회적 쟁점들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초점이 돼야 할 텐데, 그만 전쟁 때문에 독일사회민주당(SPD)은 선거 카드를 내놓지 못하게 됐다는 개탄이다.

전쟁 때문에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장기적 목표를 미결로 둬야 한다면, 전쟁이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위기를 나타낸다고 인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또 다른 단계가 있어야 했다. 이를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에 필요함은 인정했다. 경제가 확대됨에 따라 점점 더 산업 자본가들은 원료와 식량을 찾아 국경 밖으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필요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열강이 서로 갈등을 빚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 세계 전쟁의 결과는 최강국들이 군비 경쟁을 단념하고 동맹을 맺는 것일지 모른다.”

이 전쟁은 단말마적 세계 자본주의의 표현이 아니고, 전쟁이 끝나면 평화적 제국주의의 시대가 도래할지 모르는데, 그게 바로 ‘초제국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이 득이 된다고 카우츠키는 주장했다.

경제주의적인 제국주의 개념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은 그의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의회적 길’을 정당화하는 이론이었다. 전쟁 등 폭력은 이 길에 확실히 장애물이었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가 단말마적 자본주의의 표현이고 전쟁은 세계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주의가 본질적으로 호전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쟁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에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전쟁은 그 자체로 문제이지만 자동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의 기초가 되지는 못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 주장들에 근거해 카우츠키는 반전 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을 사실상 분리시켰다.

카우츠키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특히 산업 자본주의)를 연관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연관시키지 않고 사실상 분리시킨 것은 바로 제국주의와 전쟁의 관계 또는 자본주의와 전쟁의 관계였다.

달리 말해, 제국주의가 갈등에 시달리느냐 아니냐 또는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호전적이냐 평화적이냐 하는 점이 진정한 쟁점이었고, 이 문제에 카우츠키는 후자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카우츠키의 답변은 세계 정치의 불안정성을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경쟁의 폭력적 본질의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 것이었다.

탱크·기관총·독가스·전투기 등 제1차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대량살상무기는 수백만 명을 죽였다. 그 뒤에 훨씬 더 큰 규모로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 세계적 전쟁에서는 도시 폭격 때문에 전에 없던 규모로 민간인들이 살상당했다. 옛 소련 사람들만도 2000만 명이나 죽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핵무기 ⓒ출처 미국 국립 기록 보관소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는 사상 최초로 핵무기가 사용됐다. 이후의 군비 경쟁은 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이 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5년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 1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후 10년도 채 안 돼 베트남전쟁이 일어났다. 베트남인 250만 명과 미군 5만 5000명이 죽었다. 베트남인 사망자의 대다수는 미군 병사들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미군의 융단폭격과 네이팜탄 공격에 희생된 농민들이었다.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은 더는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환상이 유력한 시대에 이라크전쟁 말고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뿐이다. 사실, 세계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평화롭게 지나간 날이 없다. 그동안 100여 건의 전쟁이 일어났다. 사망자 수는 3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세계의 약 40개국이 분쟁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1300만 명이 고국을 떠났고, 1600만 명이 자국 내에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전쟁

부하린과 레닌은 카우츠키가 제국주의의 정치학과 제국주의의 경제학을 분리시켰다고 비판하며, 자본주의와 전쟁의 불가분의 관계를 역설했다.

그들은 세계 경제가 불균등 발전을 한다고 지적했다. 나라마다 경제 성장 속도가 고르지 않음에 따라 세계 체제 내에서 상대적 경제력의 변동이 일어난다. 이는 정치 권력의 변동을 수반하고, 이는 또한 제국주의 간 지속적 협력의 가능성을 감소시킨다.

가령 레닌 시대에 독일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으나 식민지가 거의 없었다. 미국도 비슷했다. 반면, 영국은 식민지가 많았다. 이 식민지들로부터 영국은 상당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하지만 영국의 경제 성장은 덜 역동적이었다. 세계 무대의 후발 주자인 독일과 미국은 “결코 평화적이지 않은 방법에 의해 변하고 있는 새로운 세력관계에 따라 세계를 재분할하는 일에 개입했다.”(레닌,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1916년.) “식민지 분할과 금융자본 영향권이 생산력 발전과 자본 축적에 상응하지 못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하에서 전쟁 말고 달리 무슨 수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국주의간 전쟁 후 평화라는 것은 환상이다. 평화와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평화를 위한 투쟁은 반자본주의 투쟁이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은 실로 자본주의의 위기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적 교전국의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목표로 대외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레닌은 역설했다.

레닌의 전략은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에서 실천으로 검증됐다. 그는 임시정부의 전쟁 지속 정책을 멘셰비키가 지지하는 것(이른바 “방위 전쟁” 또는 “방어적 전쟁”의 이름으로)에 반대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도록 볼셰비키가 이끌게 했다.

이듬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체결해 전쟁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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