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는 해가 있다. 2011년도 그런 해였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이 아랍 세계 곳곳으로 번졌다.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가 물러났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테델솔 광장에서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운동이 분출해 스페인을 뒤흔들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신타그마 광장에서 전투적인 점거 운동이 분출했다. 이 운동은 이후 몇 해 동안 수십 차례의 하루 총파업을 포함한 노동자 투쟁 물결로 이어졌다.

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에서도 노동조합들의 선언으로 대규모 파업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연금 개악에 맞서 200만 명 규모의 하루 총파업이 벌어졌다.

영국에서는 보수당 정부의 긴축 공격과 경찰의 인종차별적 폭력에 분노해 전국적 소요가 벌어졌다. 1990년 마거릿 대처를 끌어내린 주민세 소요 후 20년 만이었다.

그리고 ‘점거하라’ 운동이 있었다.

좁은 의미에서 ‘점거하라’ 운동은 2011년 9월 17일 ‘월가를 점거하라’로 시작돼 미국과 세계 곳곳으로 번진 광장 점거 운동을 가리킨다.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은 한 달 만에 수십 명에서 10만 명 넘는 행진으로 커졌고, 세계 1500여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 시위를 호소하게 됐다.

아랍 혁명과 유럽의 반긴축 투쟁의 물결이 미국의 ‘점거하라’ 운동으로 확산됐다. 2011년 10월 3일 미국의 ‘점거하라’ 시위 ⓒ출처 Louis Caldarola(플리커)

앞서 열거한 사건들 모두가 이 운동에 영향을 줬다. 광장 점거라는 형식 자체도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 점거에서 따온 것이었다. 스페인·그리스의 광장 점거도 마찬가지였다.

이 운동들은 광장 점거라는 형식뿐 아니라 배경도 같았다.

단연코 중요한 요인은 2007~2008년 경제 위기였다. 각국 정부가 위기에 대응해 긴축으로 일반 대중의 삶을 공격하면서 거대한 불만이 고였다.

미국에서 버락 오바마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서 천대받는 사람들의 엄청난 기대를 안고 취임했지만, 고작 2년도 되지 않아 커다란 배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에서는 우파 정부들은 물론이고,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도 긴축·민영화 같은 공격을 지지하고 직접 집행했다. 이 때문에 주요 나라들에서 주류 개혁주의 정당들이 잇달아 정치적으로 파산했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과정이 위기로 가속된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 이래로 특히 유럽에서 중도 좌파 정당들은 우파 정당들과 번갈아 집권하며 민영화, 규제 완화, 법인세 감면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며 지지를 잃어 왔다.

하지만 이런 혹독한 공격에도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고, 대중의 불신과 분노는 커졌다.

2008년에 추락한 경기는 2011년이 되자 다시 침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선진국뿐 아니라 신흥 공업국에서도 그랬다.

이 시점에 아랍 혁명으로 누적된 분노가 분출해, 투쟁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은 집단적인 자력 해방의 모습을 흘낏 보여 줬다.

아랍 대중은 독재 정권뿐 아니라 그 정권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에도 맞서 싸웠다(특히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그래서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신음하는 다른 지역 사람들도 이집트 혁명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시사적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서방 국가들은 중동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면서 이슬람 혐오를 퍼뜨렸는데, 바로 그 서방의 대중이 저항하면서 아랍 최대 도시의 운동을 모방한 것이다.

“1퍼센트에 맞선 99퍼센트” — 의의와 약점

‘점거하라’ 운동은 투쟁이 얼마나 빨리 국제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이집트 혁명 몇 달 후인 5월에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9월에 미국 뉴욕에서 광장 점거가 벌어졌다. ‘점거하라’는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구호가 됐다.

“1퍼센트에 맞선 99퍼센트”라는 ‘점거하라’ 운동의 구호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는 그 최상층에 있는 대기업과 기성 정치인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 운동은 위기에서 부자들만 구제하는 오바마 정부 등 각국 정부들에게 “1퍼센트가 아니라 99퍼센트를 구제하라”고 요구했다.

광장 점거 참가자들은 주로 청년이었지만, 운동은 더 광범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급진화를 추동했다.

하지만 이 구호에는 약점이 있었다. 이 구호는 한 줌의 사회 최상층 권력자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가 단결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정치를 함축한다. 훗날 스페인 포데모스의 지도자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이를 “카스트 대 민중”으로 정식화했다.

이런 정치(민중주의)는 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있고, 이 사회가 적대적 계급들로 나뉘어 있음을 흐린다.

한편, 이 구호는 대자본가들과 주류 정치권에 대한 광범한 불신(“반(反)정치”)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정치는 ‘점거하라’ 운동의 주된 특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정치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었다. ‘믿을 것은 수평적 연대뿐’이라고 여기는 연성 자율주의 정서가 그것이었다.

이런 정서는 때로 조직 노동운동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특히 스페인에서 그런 점이 두드러졌다. 이는 스페인에서 수십 년 동안  노동계급 투쟁이 비교적 취약했고, 조직 노동계급을 대변한다는 스페인 사회당이 노동계급의 염원을 배신하고 긴축 공격을 추진(하고 노동조합 관료층이 이에 합의)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에서는 타흐리르 광장 점거 운동이 섬유·공공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으로 이어졌다. 이 연결에 혁명적 좌파가 작지만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 파업들은 광장 점거 운동이 제시한 사회 정의를 구체적으로 성취하는 투쟁이었다.

그리스도 마찬가지 사례였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 점거 후 몇 년 동안 40회에 가까운 하루 총파업을 비롯한 강력한 파업이 벌어졌다.(그리스의 사회주의노동자당(SEK) 등 혁명적 좌파가 파업 확산에 커다란 구실을 했다).

미국에서도 ‘점거하라’ 운동은 오랫동안 저하됐던 노동자 투쟁을 자극했다. 같은 해 초 위스콘신주(州) 공무원 노동자들이 주의회를 점거했고, 이듬해에 시카고 등지에서 두드러지는 교사 파업이 벌어졌다.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에서 대규모 파업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투쟁들은 대개 방어적 투쟁이었고, 노동조합 관료의 강력한 통제하에 이뤄졌다. 이런 통제는 상당히 안 좋은 영향을 끼쳤는데, 사회의 정치적 불안이 노동계급의 경제적 투쟁으로 되먹임되고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이 다시 정치 운동을 고무하는 동학을 억제했다.

2011년 10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점거하라 시위대 ⓒ출처 Joe Wolf(플리커)

좌파 개혁주의의 부상과 좌절

운동이 고조되는 시기에 ‘점거하라’ 운동의 이런 약점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운동이 더 전진하지 못하고 기로에 놓이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운동의 영향권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집권을 통해 개혁을 제공한다는 좌파적 개혁주의 정치인과 정당들로 눈을 돌렸다.

2015년에 그리스에서 시리자가 집권했고, 이를 전후해 스페인에서는 포데모스가 부상했다. 같은 해 말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예비경선에 출마해 돌풍을 일으켰고, 영국에서는 노동당 역사상 가장 좌파적이라는 제러미 코빈 지도부가 출범했다.

이들의 정치는 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기성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미국의 경우 민주당)의 대안을 자처하며 성장했다.

이런 부상은 분명한 일보 전진이었다. 2015년 시리자 집권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최초로 급진 좌파가 서구에서 집권한 사례로 일컬어지며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런 좌파적 정당들의 부상은 기성 정치 질서에 균열과 파장을 낳았다.

하지만 이들은 곧 근본적 문제에 부딪혔다.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해 위로부터 개혁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은, 그 국가가 수호하는 체제를 보전해야 한다는 강력한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거듭, 체제 유지의 필요와 노동계급 대중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개혁주의는 동요하다 노동계급에 맞서 체제를 수호해 왔다. 체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유럽연합·IMF의 긴축 요구에 반대하는 대중의 염원을 등에 업고 2015년 집권한 시리자는 집권 반년 만에 그런 선택에 직면했다.

2015년 7월에 긴축 정책 수용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60퍼센트는 반대에 투표했다. 그런데 그 투표 후 1주일도 안 돼, 시리자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는 투표 결과를 거슬렀다. 긴축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긴축을 시행해 잉여를 늘리는 것뿐이라며 (그래야 언젠가는 그 잉여를 노동자들에게 돌릴 수도 있다며) 말이다.

시리자는 정치적으로 파산했다. 결국 4년 후 시리자는 우파 정당 국민당에 정권을 내줬다.

민중주의를 시리자보다 훨씬 더 분명히 추구했던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폭발적 성장기가 지나자마자 자신의 공약을 “상식적” 수준으로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포데모스는 인디그나도스 운동의 염원을 반영한 대표 공약들을 속속 철회했고, 이에 반발하는 기층 당원들의 목소리를 억눌렀다.

이후 포데모스는 자신들이 애초에 “카스트”로 규정하고 “손잡지 않겠다”고 한 사회당의 연정 제안을 수용했다. 그 결과 포데모스는 초기의 기세를 완전히 잃었다.(관련 기사 본지 368호 ‘광장 점거 운동에서 포데모스의 좌초까지’)

한편, 미국에서는 ‘99퍼센트의 후보’ 버니 샌더스가 부상했다.

샌더스의 정치는 유럽 주류 사회민주주의 수준이었지만, ‘점거하라’ 운동에서 급진화한 수백만 청년들에 광범한 호소력을 발휘했다(미국의 복지가 특히 열악한 영향도 있었다).

샌더스 선거 운동은 “사회주의를 미국 정치 논쟁의 장에 입성”시켰다는 평을 얻었고, 도널드 트럼프의 대권 도전에 특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2016년 민주당 예비경선 후 샌더스는 뼛속까지 친기업·친제국주의 정치인인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위협을 저지하려면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차악론’이었다.

하지만 이런 ‘차악론’은 ‘점거하라’ 운동에서 나왔던 ─ 그보다 10여 년 전 기업 중심 세계화 반대 운동에서 따온 ─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구호에 담긴 염원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샌더스 지지자들의 사기는 추락했고, 결국 그해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했다. 샌더스는 4년 후 다시 민주당 대선 후보에 도전해 기대를 모았지만, 이번에도 민주당 주류의 집요한 방해와 책략으로 좌절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이든 ‘차악론’에 손을 들어줘 다시 지지자들의 실망을 자아냈다.

2015년 집권한 시리자 정부는 금세 반긴축 열망을 배신하고 도리어 긴축을 시행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장 클로드 융커(우)와 악수하는 그리스 시리자 정부 총리 치프라스(좌) ⓒ출처 유럽연합

교훈

오늘날 팬데믹 위기와 기후 재앙, 끝나지 않는 경제 위기는 이 체제의 한계와 모순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촉발점이 돼 예상치 못한 대중적 분노가 폭발하기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점거하라’ 운동의 성쇠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바로 거대한 위기에서 비롯한 거대한 투쟁이 그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전략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혁명적 좌파는 ‘점거하라’ 운동이 벌어졌던 지난 번 반란 물결에서 교훈을 이끌어내, 체제 내 개혁에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에 맞서기를 촉구하는 혁명적 정치 전략과 운동(조직)을 구축해야 한다. 바로 이 맥락에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시리자 좌파 스타시스 쿠벨라키스와 논쟁하며 “전략의 귀환”에 대해 말한 바 있다(관련 기사 본지 145호 ‘시리자와 사회주의 전략 ─ 노동계급의 힘을 키워 국가를 깨뜨려야 한다’).

그런 정치 전략과 운동(조직)이 있어야만, 위기의 결과에 대한 분노가 투쟁으로 분출했을 때, 그 투쟁이 위기의 원인인 체제를 겨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를 읽은 후에 “[독자편지] 김준효 기자의 ‘‘점거하라’ 운동 10년 - 오늘날의 교훈’ 기사를 읽고”를 읽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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